[6070 문화산책] 크네셋 미노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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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계웅(문학평론가)

 

이스라엘 국회를 영어로 ‘크네셋’이라하고, 우리 눈에 익은 유대인들의 일곱 촛대를 ‘미노러’라고 하는데, ‘크노셋 미노러’(The Knesset Menorah)라고 할 것 같으면, 예루살렘에 있는 국회의사당 앞뜰에 세워놓은 거대한 흑암색 대리석 일곱 촛대상을 가리킨다.

이스라엘을 방문하는 관광객이라면 으레 그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느라고 부산을 떨게 되는, 그런 명물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이 ‘크노셋 미노러’에는 아담과 이브로 시작하여 노아와 모세, 이사야 그리고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에 이르기까지 전 이스라엘 역사의 골자와 야훼께서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이스라엘 민족이 장차 하늘의 별과 바닷가의 모래알만큼 많아지겠다는 그네들의 국가적인 비젼이 예술적인 조각 작품으로 감명 깊게 새겨져 있었는데, 이스라엘 역사뿐만이 아니라 전 인류 역사의 획기적 구심점이랄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거기에 빠져있다는 사실을 알아 차렸을 때 나로서는 크나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너희들 해도 정말 너무했다. 나사렛 예수를 너희들이 메시야로 믿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너희들의 위대한 역사적 인물로는 인정해야 될게 아니냐. 너희들 사실 예수때문에 얼마나 많은 이익(利益)을 보고 있느냐. 아무리 쥬이시 어메리칸들이 미국의 매스컴과 경제권을 거머쥐고 있다하더라도 만약에 미국이 기독교국가가 아니라면 너희들이 받는 특혜조치가 어림 반 푼이나 있겠느냐!”

그러자 유태인관광안내원은 어깨를 움칫하며 아주 무감동한 표정으로 대꾸한다는 말인즉슨 이러했다.

“우리는 이제껏 미국으로부터 특혜를 받은 적도 없고, 유대교에서는 자기 자신을 신(神)이라고 말한다는 것은 사형에 처할 최악의 불경(不敬)이요, 이단이며, 예수 때문에 홀로코스트에 이르기까지 극심한 박해와 피해를 받아왔다.” 그러니까 메시아로 인정할 수도 없고, 모세와 같은 민족적 인물도 될 수가 없다는 태도였다. 순간 나는 내가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하는 가정에서 모태(母胎) 신앙을 지녀왔다는 사실이 얼마나 귀중하고 감사한 일인지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우리는 지금 예수의 재림을 대망하고 있는 판인데, 선민으로 자처하는 유태인들은 아직도 메시야를 헛되이 기다리고 있다니… 카이로에서 성(聖) 케더린 수도원(The Monastery of Saint Catherine)의 시내(Sinai) 산까지의 노정이 기껏해야 자동차로 14시간이요, 비행기로 2시간 밖에 안 걸리는 거리를 40년간이나 헤매었으면 족할 것이지, 또 다시 2천년간이나 민족적 시행착오를 그네들이 범하고 있는 것을 보면, 참으로 “앞선 자가 뒤서고,” “지혜로운 자들로 하여금 스스로 자기 궤휼에 빠지게 한다”는 성서의 말씀이 딱 들어맞는 것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 기독교인들은 스스로가 똑똑하다는 유태인들보다도 무려 2천년이나 종교, 문화사적으로 앞선 셈이 되는 것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내 깐에는 안타까운 심정에서 아무래도 유태인 친구에게 한마디 진지하게 덧붙여 두지 않을 수 없었다.

“너희들은 예루살렘 동쪽 성벽에 막혀있는 ‘황금의 문’(The Golden Gate)이 기적적으로 열릴 때, 메시야가 홀연히 나타날 것으로 굳게 믿고 있지만, 사실은 너희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예루살렘 성전 터 자체가 왜 사분오열이 되었는지를, 더구나 달걀의 노른자 같은 지성소 자리를 왜 모슬렘들이 차지하고 있는지에 대한 시대적 교훈을 진작 알아차렸어야 할 것이다. 유태인이나 헬라인이나 코리언이나 아랍인들이 모두 너희와 똑 같이 선택받은 야훼 하나님의 귀중한 자녀들이요, 너희들이 말끝마다 외쳐대는 바로 그 화해 평화의 ‘샤롬 정신’으로 온 세계만방 민족이 한데 어우러져 손에 손잡고 어깨동무를 하고서 예루살렘 거리를 누비는 기쁨의 축제를 벌일 때 비로소 ‘황금의 문’은 열린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될 것이다.”

나의 흥분된 열띤 어조에도 불구하고, 어깨를 또 한 번 움칫거리는 유태인 친구의 얼굴 표정은 여전히 차갑기만 했다. 그 순간 인자 예수가 얼마나 답답하였으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를 거듭하면서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안타까이 언급한 성구가 얼핏 머리를 스쳐지나가면서 “땅 끝까지” 전도를 해야 될 현장이 바로 예루살렘이구나 하는 깨달음과 동시에 유태인들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연민의 감정이 그간 메말랐던 내 마음 속 깊은 데서부터 울컥 솟아오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