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70 문화산책] 애거사 크리스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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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계웅(문학평론가/시카고)

 

이스탄불 구(舊) 시가의 골든 혼(Golden Horn)과 보스포러스(Bosporus Strait) 해협이 맞닿는 부둣가에 자리 잡은 붉은 벽돌건물의 시르케시(Sirkeci)역(驛)은 멀끔한 외양과는 달리 내부는 오랜 세월 보수를 하지 않아 낡고 허술한 것이 대낮에도 우중충한 분위기에 담배 연기가 자욱하게 배인 대합실엔 무직자들의 집합 장소인 듯 초췌한 몰골의 토박이 터키인들만이 앉아 한가롭게 잡담들을 하고 있었다. 역사(驛舍) 내엔 객차나 승객들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아 한산하기 짝이 없었지만 1930년대만 하더라도 유럽의 귀족들과 부유한 여행객들로 붐비던 장소였다. 바로 그 유명한 ‘오리엔트 특급열차’의 종착역이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1963년에 나온 007영화 ‘위기일발’(from Russia with Love).에서 제임스 본드가 러시아 총영사관 암호요원 타냐와 암호해독기를 탈취하여 급하게 기차를 타고 이스탄불을 탈출하던 장면을 촬영한 기차역이기도 하다.

사상 처음  증기기관차에 전등과 호화 침대, 식당 칸을 구비하고 ‘Orient Express’라는 이름으로 파리에서 이스탄불까지 처녀 운행한 것이 1883년인데, 나중에 노선이 런던까지 연결됨으로서 결국 유럽의 부유층들은 누구나 안락한 침대차와 열차식당의 고급스런 메뉴를 즐기면서 이스탄불에서 동양의 신비스런 풍경을 접해보는 것이 유행처럼 번져 한동안 철도회사는 큰 호황을 누렸다. 당시 종착역에 도착한 승객들이 머물던 호텔이 Pera Palas Hotel이었다. 특급열차 회사가 부호 승객들을 위해 지은 초특급 호텔로 1895년 개업했는데 역에 도착하면 왕족이나 고관대작들은  네 명이 들고 가는 가마를 타고 Galata 다리를 건너 이 호텔에 투숙했다고 한다. 지금도 사용 중인 구식 엘리베이터는 터키 최초의 전력 승강기였다.

내가 이 호텔을 찾아보게 된 것은, 객실 411호 문 앞에서 사진이라도 한 장 찍어 볼까하는 생각에서였다. 영국의 유명한 여류 추리소설가 애거사 크리스티 Agatha Christie(1890-1976)는 이스탄불에 오면 언제나 이 호텔 411호실에 투숙했는데, 바로 이 방에서 그녀의 추리 소설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1934)이 쓰여졌을 뿐만 아니라 호텔 방 열쇄 분실과 함께 그녀가 11일간 행방이 묘연했던  소설 속 이야기와도 같은 미스터리 실종 사건도 1926년 12월 3일 바로 이 방에 묵다가 생긴 일이었다. 이 호텔의 411호 실은 일 년 전부터 이미 예약이 되 있어서 이스탄불에 왔던 김에 그냥 기념으로 411호 문 앞에서 사진이라도 한 장 막 찍으려고 하는데, 마침 방문이 열리면서 투숙객이 나오는데 동양인들이었다, 일본인 가족들로 내가 한국인임을 알게 되자 특히 대학생 또래의 딸이 ‘욘사마’ 나라 손님이라고 반기면서, 잠간 방에 들어와 사진 찍어도 좋다고 호의를 베풀어 참으로 운 좋게도 방안을 둘러 볼 수가 있었다. 실내에는 여느 호텔 방과 다름이 없었지만 벽에는 크리스티 흑백 사진과 색 바랜 옛날 오리엔트 특급열차 광고문이 붙어있었고, 낡은 책상위의 책장에는 흡사 고서처럼 보이는 크리스티 소설 몇 권이 꽂혀 있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