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유진 (노스파크 대학 생물학 교수)
장재혁 (무디신학대 작곡과 교수)
한국에서는 대학들을 무조건 일렬로 줄 세워 순위를 매기곤 한다. 이 순위는 좀처럼 바뀌지 않고 단단히 고정되어 있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다르다. 어떤 특정한 대학이 최고 명문이라고 쉽게 단정 짓지 않는다. 대학 순위는 참고 사항일 뿐이지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어떤 점을 비중 있게 평가하느냐에 의해 순위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전공에 따라 그 순위가 많이 달라지기도 한다. 한국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대학이지만 전공에 따라 하버드나 예일보다 더 우수한 학교로 인정받는 곳도 있다. 고등학교도 마찬가지다. 한국처럼 명문대 합격생 수를 기준으로 순위를 매기지 않는다.
하지만 아무리 대학 순위가 고정되어 있지 않다 해도 ‘아이비리그’에 속하는 여덟 개 사립대학인 하버드, 예일, 프린스턴, 컬럼비아, 코넬, 펜실베이니아, 브라운, 다트머스가 미국의 주요 명문대로 여겨지듯, 명실공히 명문고로 꼽히는 학교들이 존재한다. 대표적인 것이 일종의 고등학교 버전 아이비리그라 할 수 있는 TSAO (Ten Schools Admission Organization)다. 필립스 엑시터 아카데미 (Phillips Exeter Academy)를 비롯해, 자매 학교 관계인 필립스 아카데미 앤도버 (Phillips Academy Andover), 그리고 디어필드 아카데미 (Deerfield Academy), 로렌스빌 스쿨 (The Lawrenceville School), 루미스 체이피 스쿨 (The Loomis Chaffee School), 세인트 폴 스쿨 (St. Paul’s School), 초트 로즈메리 홀 (Choate Rosemary Hall), 태프트 스쿨 (The Taft School), 하치키스 스쿨 (The Hotchkiss School), 힐 스쿨 (The Hill School) 까지 열 개 학교가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 이름을 올린 학교들은 모두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동부의 사립 보딩스쿨이다. 그 동안 이곳 출신의 많은 학생들이 아이비리그를 포함해 주요 명문대에 진학했다. 하지만 이 학교들이 명문고로 꼽히는 것은 단순히 이런 사실 때문만은 아니다. 학생들이 학구적인 분위기 속에서 자신의 재능을 찾아 발전시키도록 이끌고, 다양한 전인 교육 시스템을 통해 인격적으로도 성숙함을 갖춘 사회인으로 성장하도록 하는 것. 바로 이것이 명문고로 평가 받는 진짜 이유다. 그 가운데서도 필립스 엑시터 아카데미는 하버드에서 발행한 『하버드 사립학교 가이드 The Harvard Independent Insiders Guide to Prep Schools』에서 최고의 보딩스쿨로 뽑히기도 했다.
필립스 엑시터 아카데미의 한국인 졸업생 중에서 가장 알려진 사람들 중에 소설가이자 프린스턴 영문학과 교수인 이창래 씨가 있다. 대학 1학년 때 나는 서점에 갔다가 ‘주목 받는 책’ 코너에 진열되어 있는 신간 『영원한 이방인 The Native Speaker』을 보았다. 책 표지에 선명하게 있는 ‘Chang-Rae Lee’ 라는 한국식 이름이 눈에 확 들어왔다. 나 역시 ‘Yoojin Choi’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이민자로서, 한국식 이름으로 활발히 활동하는 작가를 지켜보는 것은 큰 위로요 격려였다. 그 소설은 한인 이민자들의 삶을 다룬 것이었는데, 그 묘사가 그리 호의적이지는 않다는 지적도 있었지만 내겐 ‘보통 미국인’ 독자들에게 한인 사회와 이민자들의 애환을 소개한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이창래가 필립스 엑시터 신입생이었을 때의 일이다: 영어 수업의 첫 과제물로 제출한 단편 소설을 읽고 그 재능을 엿본 담당 교사가 이렇게 말했다. “남은 기간 동안 다른 과제는 하나도 하지 않아도 좋아. 그러니 네가 쓰고 싶은 걸 쓰렴.” 바로 이 순간 작가 이창래가 탄생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뛰어난 재력을 가진 학생, 그 재능이 꽃필 수 있도록 돕는 교사, 그리고 그 교사의 결정권을 존중하는 학교! 바로 이것이 필립스 엑시터에서 많은 인재가 배출될 수 있었던 힘이다.(이 글은 필자의 저서 “세계 최고의 학교는 왜 인성에 집중할까”/다산북스의 내용이 참조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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