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유진 노스파크 대학 생물학 교수
장재혁 무디신학대 작곡과 교수
‘하크네스 테이블’. 이 단어의 시초가 된 기부자 에드워드 하크네스 자신은 전혀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의 이름은 곧 이 새로운 방법의 토론 수업을 가리키는 이름이 되었다. 오늘날 이러한 토론식 수업은 ‘하크네스 수업’, 타원형 탁자는 ‘하크네스 테이블’, 교실은 ‘하크네스 교실’이라 불린다. 필립스 엑시터에서 하크네스는 지극히 당연한 일상이 되어 아예 ‘토론하다’와 같은 뜻의 동사로도 사용되고 있다.
하크네스를 ‘소크라테스 식 문답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하크네스는 문답법보다 광범위한 방법이다. 문답법은 선생과 학생 사이의 질문과 대답을 통해 선생이 학생을 정답으로 이끌어 가는 방법이다. 하크네스 토론은 선생과 학생의 일대일 질의에 국한되어 있지 않고 학생과 학생이 대화하며 공부하고 선생은 필요할 때만 개입한다. 토론 중 서로에 대한 존중 뿐 아니라, 급우가 한 얘기를 정리하고 연관된 질문을 하고 나의 의견을 얘기하면서 수업의 주제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여러가지 작업들을 동시에 해야한다. 인성적인 바탕 위에서 통해서 아카데믹한 배움을 훈련해가는 것이다. 물론 내가 가르쳤던 생물학처럼 과학 과목의 하크네스 수업을 하다 보면 문답법의 모습이 종종 나오기 때문에, 문답법이 하크네스와 다르다기 보다는 문답법이 하크네스에 포함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맞다.
많은 사람들이 토론식 수업에 공감하면서도 이런 토론수업 방식은 문학이나 역사 같은 일부 과목에만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특히 수학이나 과학은 공식이나 이론에 따라 답이 딱 나오므로 ‘정답이 없을 수도 있다’라는 하크네스의 원칙이 어색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실제로 필립스 엑시터의 하크네스 수업을 도입한 많은 학교들도 수학과 과학 수업에서는 제외하고 있다.
하지만 필립스 엑시터는 모든 수업에 하크네스를 적용한다는 방침을 굳게 지키고 있다. 일부 과목에서 어려움은 있어도 장점이 더 많다는 사실을 100년에 가까운 오랜 시간 동안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답이 없을 수도 있다’는 원칙은 과학 수업에서도 철저히 지켜진다. 이를 통해 학생들은 공식이나 이론을 암기하는 대신, 함께 질문하고 토론하면서 과학적 사고력을 키워나간다.
사실 필립스 엑시터 재직 초기에 나도 생물학 교사로서 고민이 많았다. 다른 과목의 수업을 참관해 보면 확실히 인문계 수업의 토론이 더 자유롭게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가끔 내 수업의 하크네스가 순수하지 못하다는 자격지심에 빠지기도 했다. 그 때 베테랑 화학 교사인 핀리 선생님의 말이 많은 용기가 되었다.
“아녜요. 하크네스에는 다양한 모습이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해요. 문학 수업에서 하크네스 토론이 제대로 진행되기까지 나름의 연습 과정이 필요하듯이 과학이나 외국어 수업의 하크네스 토론도 다른 모습의 연습 과정이 필요하죠. 난 20년이 지난 지금도 매일 ‘과연 내 수업이 얼마나 하크네스한가?’ ‘어떻게 하면 하크네스의 본질에 가까워질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있어요. 재미있는 여행에 함께하게 된 걸 환영해요.”
‘정답이 없을 수도 있다’는 태도가 잘못 이해되면 토론 시간이 개인적인 견해 발표로 끝날 수도 있다. 하지만 과학 하크네스 시간에 학생들은 데이터를 분석하는 다양한 접근 방법을 서로 나누고, 교과서와 문헌에서 증거를 찾아 해석의 견해를 뒷받침한다. 모든 실험이 원했던 또는 의도했던 결과를 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왜 다른 결과가 나왔는지를 생각하고 토론하는 과정 역시 과학적 사고를 연습하는데 중요한 요소이다.
과학 수업에서 배워야 하는 모든 내용에 이런 과정을 적용하기엔 시간이 부족하다. 하지만 여러 가지의 핵심 내용에 ‘정답이 없을 수도 있지만 우리 함께 찾아보자’의 태도를 가지고 공부하는 연습을 통해 학생들은 실제로 과학자들이 팀을 이루어 연구하는 마인드셋을 배우게 된다. 공부에 있어서 나 개인이 아니라 팀의 개념을 가지게 하는 인성훈련, 하크네스를 통한 과학 수업이야 말로 제대로 된 과학 수업인 것이다.
이 글은 필자의 저서 “세계 최고의 학교는 왜 인성에 집중할까” (다산북스)의 내용이 참조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