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금룡 이사장, 100년의 꿈을 향해 멈추지 않는 항해를 외치다
광야의 개척자, ‘나눔의 구루’를 만나다.
2025년 8월 13일 서울, 변덕스러운 소나기가 아스팔트의 열기를 식히던 오후. 본지 특파원이 오랫동안 만나길 고대했던 대한민국 벤처 1세대, 이금룡 이사장을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서초동 오피스텔에 위치한 그의 공간은 화려한 명성과는 거리가 먼, 치열한 열정의 ‘컨트롤 타워’에 가까웠다.
한쪽 벽을 쌓여있는 서류 더미는 그의 지난한 역사를, 중앙의 화이트보드엔 미처 지워지지 않은 글씨들이 조금 전까지 계속됐을 그의 뜨거운 현재를 증명하는 듯했다. 그 틈에서 발견한 여러 권의 인문학 서적은 이 테크 구루의 깊이를 느끼게 했다. 또 G&G 스쿨의 새 교육생을 맞이할 채비로 분주한 그의 시선은 미래를 향한 확고함을 짐작게 했다.
벤처 1세대라는 훈장 대신, 그는 갓 창업한 청년 같은 맑은 눈빛과 마음을 무장 해제시키는 환한 웃음으로 본지 특파원을 맞이했다. 향긋한 커피 향 속에서 우리는 대한민국 IT 역사의 산증인이자 미래를 향한 나침반인 그의 깊고 푸른 바다 같은 이야기 속으로 항해를 시작했다.
삼성의 항구를 떠나 ‘옥션’이라는 신대륙으로
1999년, 모두가 선망하던 삼성물산의 임원 자리를 박차고 나와 생소하기 짝이 없던 인터넷 경매 회사 ‘옥션’의 대표로 자리를 옮겼을 때, 그의 선택은 무모한 도박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는 안정된 항구를 떠나 거친 바다로 나아가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확신이 있었다.
“삼성이라는 거대한 조직 안에서도 홈플러스와 삼성몰을 기획하며 인터넷이라는 신대륙의 가능성을 봤습니다. 하지만 대기업의 틀 안에서는 제가 꿈꾸는 그림을 온전히 그리기 어려웠죠. 생산자가 중간 유통 과정 없이 소비자와 직접 만나는 C2C 모델, 즉 ‘오픈 마켓’은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에게 이로운 혁신이라고 믿었습니다.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는 사회적 미션, 그것이 저를 새로운 세상으로 이끈 동력이었습니다.”
그에게 옥션 시절 가장 보람 있던 순간은 코스닥 상장이나 거액의 매각이 아니었다. 울릉도에서, 지리산 골짜기에서, 부모님의 방앗간에서 미숫가루를 팔던 대학생에게서 날아온 감사 편지들이었다. 자신의 상품이 제값을 받는 것을 처음 경험한 생산자들의 환희, 산지의 신선한 물건을 저렴하게 구매하게 된 소비자들의 기쁨. 그는 기술을 통해 사람들을 연결하고, 소외되었던 이들에게 새로운 기회의 장을 열어주었다. 그 경험은 훗날 그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나눔’의 철학이 되었다.
사업가, 경영인, 그리고 기업가.. 경계를 허문 거인의 정의
삼성의 전문경영인에서 옥션의 창업가적 경영인으로, 그리고 다시 후배들을 위한 플랫폼을 만드는 기업가로. 그의 다채로운 이력만큼이나 ‘기업가’와 ‘전문경영인’의 차이에 대한 그의 정의는 명쾌하고 깊었다.
“저는 비즈니스를 창업-사업-경영-기업의 4단계로 봅니다. ‘사업가’는 북 치고 장구 치고 혼자 다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다 규모가 커져 혼자 할 수 없게 되면 시스템을 만들고 권한을 위임하는데, 이때부터 ‘경영’의 단계가 시작되죠. ‘전문경영인’은 바로 이 단계에서 내부의 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해 회사를 키우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기업가’는 무엇이 다른가? 그는 여기서 ‘정신’이라는 키워드를 꺼내 들었다.
“‘기업가’는 경영을 통해 쌓은 부와 인재를 가지고,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외부의 변화를 읽으며 새로운 사업에 뛰어드는 사람입니다. 가전 회사가 반도체로, 통신으로 진화하는 것처럼요. 이들은 단순히 돈을 버는 것을 넘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고 시대를 개척하려는 ‘기업가 정신’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더 이상 모험하지 않아도 되는데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는 도전, 그것이 기업가를 만드는 핵심입니다.”
이는 이병철 선대 회장을 직접 모시며 체득한 통찰이자, 스스로 광야에 뛰어들어 체화한 살아있는 지혜였다. 그의 정의는 시카고의 한인 비즈니스 리더들에게도 자신의 위치를 돌아보고 다음 단계를 모색하게 하는 깊은 울림을 준다.

‘도전’이라는 고독한 길, ‘나눔’이라는 따뜻한 동행
그의 인생 2막은 ‘도전과 나눔’이라는 이름으로 요약된다. 매달 새벽 5시에 일어나 300여 명의 창업가와 리더들이 모이는 조찬 포럼. 이곳에서 청년 창업가들이 얻는 가장 큰 변화는 무엇일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이른 아침,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여 배우는 모습을 보며 받는 자극입니다. ‘이게 장난이 아니구나’ 느끼며 나태해진 자신을 채찍질하죠. 둘째는 시야의 확장입니다. 자기 제품만 보던 ‘터널 비전’에서 벗어나, AI, 역사, 트렌드 등 최고수들의 강의를 들으며 넓은 세상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그가 가장 강조하는 가치는 따로 있었다. “창업가들을 외롭게 해서는 안 됩니다.” 자금난과 불확실성 속에서 ‘죽음의 계곡’을 건너는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지식 이전에 따뜻한 연대다. 선배 멘토가 저녁을 사주며 고민을 들어주고, 비슷한 처지의 동료들과 교류하며 ‘나만 힘든 게 아니구나’라는 위안을 얻는다. ‘도전’이라는 씨앗이 ‘나눔’이라는 거름을 만날 때 비로소 싹을 틔울 수 있다는 것. 이것이 그가 설계한 ‘나눔의 생태계’의 핵심이다.
G&G 스쿨, 죽음의 계곡을 건너는 스타트업의 나침반
‘도전과 나눔’의 활동 중에서도 백미는 단연 ‘G&G (Great Challenge! Growth & Global) School’이다. 시리즈A 투자를 받은, 즉 ‘초등학교’를 막 졸업하고 ‘중학교’로 진학하는 단계의 스타트업들을 위한 스케일업 과정이다.
“기술만으로 버티던 단계에서 다음으로 넘어가려면 성장통을 겪습니다. 사람을 더 뽑고, 시스템을 갖추고, 글로벌로 나가야 하죠. 이 단계는 정부나 엑셀러레이터가 가르치기 어려운 영역입니다. G&G 스쿨은 바로 이 지점을 타겟으로, 각 분야 최고 강사진이 6개월간 집중적으로 실전 노하우를 전수합니다.”
전 과정은 무료로 진행되며, 후원자인 이윤재 회장의 숭고한 나눔 정신 위에 서 있다. 이곳에서 스타트업 대표들은 단순히 배우는 것을 넘어, 최고의 강사진과 끈끈한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같은 길을 걷는 동기들과 함께 성장한다. 한국의 유니콘을 키워내는 특별한 온실이자,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갈 날개를 달아주는 발사대인 셈이다.
“기본으로 돌아가라”… AI 시대, 다시 인문학을 묻다
첨단 기술을 논하는 포럼에서 이 이사장은 동시에 인문학 교실을 연다. 그는 인공지능이 인간의 많은 지적 노동을 대체할수록, 리더에게는 오히려 인간 고유의 영역인 통찰력과 지혜가 더욱 중요해진다고 역설했다. 그는 손흥민 선수의 아버지, 손웅정 감독의 일화를 예로 들었다.
“손웅정 감독이 아들에게 6년간 슈팅을 못 하게 하고 드리블과 패스라는 기본기만 연마시켰다고 합니다. 덕분에 손흥민 선수는 지금 세계 최고의 기본기를 갖추게 됐죠. 경영자에게 기본기는 무엇일까요? 바로 ‘변화를 읽는 눈’과 ‘사람을 품는 마음’입니다.”
그는 기업(企業)이라는 한자가 ‘사람(人)이 머무르는(止) 곳’이라고 설명했다. “결국 모든 비즈니스는 사람으로 귀결됩니다. 고객, 직원, 투자자, 협력사 등 모든 것이 사람으로 둘러싸여 있기에, 리더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깊은 성찰을 멈춰서는 안 됩니다.” 그는 리더가 겪는 가장 큰 고통은 기술이나 자본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사람 문제’에서 온다고 진단했다. 믿었던 사람에게 받는 배신, 예측 불가능한 인간의 욕망과 심리는 재무제표처럼 명확하게 분석되지 않는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인문학적 사유다. 역사를 통해 흥망성쇠의 패턴을 읽고, 철학을 통해 인간 존재의 의미를 탐구하며, 문학을 통해 타인의 삶을 깊이 공감하는 훈련. 이것이 바로 불확실한 변화의 파도 속에서 조직의 중심을 잡고 올바른 결정을 내리게 하는 리더의 ‘기본기’라는 것이다. 기술이 모든 것을 대체하는 AI 시대에, 역설적으로 인간을 이해하는 인문학적 소양이 리더의 가장 중요한 경쟁력이 될 것이라는 그의 통찰은 서늘한 지혜를 선사한다.
전 세계 한민족 네트워크, 100세를 향한 그의 마지막 숙제
국내 스타트업의 글로벌 진출에 가장 부족한 역량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는 단호하게 ‘네트워크’라고 답했다.
“과거의 무역은 제품을 수출하는 것이었지만, 지금의 스타트업은 기술과 플랫폼을 현지화(Localization)해야 합니다. 국내에서 투자받고 개발하느라 정신없는 창업가들이 해외 네트워크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시카고를 비롯한 전 세계 750만 한인, 한상(韓商)들의 역할이 절실합니다.”
그는 삼성물산 시절 교포 무역인들에게 큰 도움을 받았던 경험을 회상하며, 이제는 새로운 시대의 가교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지금 한국의 젊은 창업가들은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과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언어의 장벽, 문화의 차이, 그리고 현지 시장에 대한 정보 부족으로 인해 날개를 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해외에 계신 우리 동포 여러분께서 이들의 눈과 발, 그리고 든든한 동반자가 되어 주셔야 합니다. 현지 사정에 밝은 한인들이 국내 유망 스타트업의 ‘가이드’이자 ‘에이전트’, 나아가 ‘투자자’가 되어달라는 것입니다.” 그는 이것이 단순한 도움이 아니라, 함께 성장하고 새로운 부를 창출하는 ‘윈윈(Win-Win) 전략’이라고 강조했다. 한국의 혁신적인 기술이 동포 사회의 비즈니스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동포들의 글로벌 네트워크는 한국 스타트업이 세계로 뻗어 나가는 고속도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그는 국내 스타트업 정보를 모아놓은 ‘K-Global 500’ 같은 플랫폼을 만들어 전 세계 한인들과 연결하는 작업을 이미 시작했다.
“세월이 지나 100세가 되면 무엇을 하고 계실 것 같습니까?” 마지막 질문에 그는 소년처럼 웃었다.
“아마 그때도 나눔을 실천하고 있겠죠. 제 꿈은 전 세계 한민족을 하나의 네트워크로 묶는 것입니다. 알래스카든, 아프리카든, 클릭 한 번으로 그곳의 한인 커뮤니티와 비즈니스가 연결되는 ‘디지털 노마드’ 대한민국을 만드는 것, 그것이 제 마지막 숙제입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그의 오피스텔을 나서는 길, 끈질기게 내리던 비는 그치고 서울의 하늘은 맑게 개어 있었다. 안주하지 않는 도전, 그리고 그 도전을 더 가치 있게 만드는 나눔의 철학. 이금룡 이사장의 멈추지 않는 항해는 시카고의 광활한 평원 위에서, 미시간 호수의 드넓은 수평선 너머에서 새로운 도전을 꿈꾸는 우리 모두에게 외치는 가장 뜨거운 응원가였다.
<이가희 시카고한국일보 한국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