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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nesday, March 4,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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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배 목사] 상주 산골 ‘악바리’ 소년, 방송사 CEO 거쳐 낮은 곳의 목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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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배목사 (68)

김기배 목사의 인생 다큐멘터리

2월 27일, 서울 역삼동의 한 레스토랑. 초봄의 미풍이 창가를 부드럽게 두드리는 오후. 김기배 목사(전 SBS스포츠 제작사 대표, 전 기독교 텔레비전 CTS 대표, 영상전공 1호 언론학박사)와 마주 앉았다. 깡촌 소년에서 방송사 CEO로, 그리고 다시 낮은 곳을 향하는 목회자로 변모해 온 김기배 목사의 68년 생애는 그 자체로 한 편의 서사시이자, 격동의 한국 미디어사였다.

상주 산골의 붉은 감나무, 결핍이 빚어낸 ‘악과 깡’의 서사

경북 상주 외남면 청당골, 일명 ‘박사 마을’로 불리는 그곳이 김기배 목사의 뿌리다. 가을이면 감나무에 감이 주렁주렁 맺히는 그 아름다운 산골에서 그는 부지런한 농부이자 인술을 베풀던 선친 김창곤 옹과 기도의 어머니 김수열 여사 슬하에서 자랐다. 선친은 가난한 형편에도 자식들에게 “공부를 하려면 도시로 나가라.”며 지게조차 지지 못하게 하셨다. 중학교 시절 보충 수업비를 내지 못해 친구들이 공부할 때 교실을 청소해야 했던 소년. 하지만 그는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결핍은 도심의 텃세를 이겨내는 강인한 정신력의 자양분이 되었다. 고등학생 때 귀했던 송아지와 곶감을 팔아 마련한 학비를 들고 서울 경신고로 전학 온 ‘상주 촌놈’은 전교생 앞에서 “상주에서 왔습니다!”라고 당당히 외치며 인생의 첫 전입신고를 마쳤다. “쪽팔림은 잠시이나 후회는 영원하다.”는 그의 강단 있는 좌우명은 그때부터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MBC 감독 7년과 SBS의 개척자, 렌즈 너머로 본 시대의 자화상

1985년, 청년 김기배에게 찾아온 MBC 공채 입사 합격 소식은 단순한 취업이 아닌 ‘신의 허락’과도 같은 운명적 사건이었다. 당시 그는 급성 B형 간염으로 병원에 입원해 사경을 헤매고 있었으나, 생의 의지는 병마보다 강했다. 놀랍게도 광고계의 명문 오리콤과 대한민국 방송의 심장부 MBC 두 곳을 동시에 거머쥐는 기염을 토했다. 그는 주저 없이 적성에 맞는 방송인의 길을 택했다. ‘사랑과 야망’, ‘수사반장’, ‘전원일기’ 등 이름만으로도 가슴 설레는 당대 최고의 드라마 현장에서 그는 뷰파인더(세상을 보는 눈)를 통해 세상을 읽어 나갔다. 그가 담고 싶었던 프레임은 화려함이 아니었다. 그 속에는 언제나 ‘공정하고 정의로운 세상’에 대한 갈망과 소외된 이웃을 향한 따뜻한 시선이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안주를 거부하는 야생마였다. 1991년, 안정적인 MBC를 뒤로하고 신생 방송사였던 SBS의 창립 멤버로 합류하는 파격적인 결단을 내렸다. 남들이 가지 않은 가시밭길을 자처한 경력 사원의 삶은 고단함의 연속이었다. 무거운 카메라 장비를 어깨에 짊어지고 전국 방방곡곡, 세계 곳곳의 현장을 누비는 사이 그의 척추는 서서히 휘어지는 고통에 직면했다. 하지만 육신의 통증도 그의 집념을 꺾지는 못했다. 88 서울 올림픽의 환희부터 대한민국 최초의 우주인 이소연 프로젝트를 생중계하기 위해 카자흐스탄의 거친 땅을 밟았을 때도, 역사의 결정적 순간에는 언제나 김기배의 렌즈가 깨어 있었다. “특종은 두 번 오지 않으며, 현장의 진실은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절박함이 그를 지탱했다. 이러한 ‘지독한 악바리’ 정신은 결과로 증명되었다. 그는 입사 동기들보다 무려 4년이나 앞서 승진 가도를 달렸고, 마침내 월급쟁이의 꽃이라 불리는 계열사 CEO의 자리에까지 오르며 방송계의 전설적인 인물로 각인되었다.

지독한 학구열의 미학, ‘전무후무’한 3석사 1박사의 기록

김기배 목사의 삶을 관통하는 또 하나의 거대한 키워드는 단연 ‘배움’이다. 그는 방송 현장에서 몸소 겪은 치열한 경험들을 단순히 개인의 노하우로 남기지 않고, 이를 학문적으로 체계화하여 후대에 남기겠다는 일념으로 불혹의 나이에 다시 펜을 잡았다. 1998년 SBS 대학원 장학생으로 선발된 그는 서강대 언론대학원과 한양대 언론대학원이라는 국내 최고의 두 상아탑에 동시 합격하는 이례적인 결과를 만들어냈다. 보통 사람이라면 하나도 감당하기 벅찬 일정이었으나, 그는 월화는 서강대에서, 수목은 한양대에서 밤이슬을 맞으며 공부하는 기염을 토했다. 단순히 출석 체크에 의의를 둔 것이 아니었다. 그는 특유의 리더십과 친화력으로 두 대학원의 원우회장을 동시에 역임하며 인적 네트워크와 학문적 깊이를 모두 챙겼다. 결국 1999년 8월, 불과 나흘 차이로 두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한꺼번에 거머쥔 기록은 방송가에서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는 전설로 통한다. 하지만 그의 학구열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2000년 경희대 대학원 신문방송학과 박사 과정에 진학해 마침내 우리나라 ‘영상 제작 전공 1호’ 언론학 박사 학위를 받으며 학자로서의 정점에 섰다. 이는 결코 명예를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다. 현장의 실무가 정교한 이론과 만났을 때, 자신이 평생을 바쳐 만든 영상 언어가 사회적으로 어떤 가치를 지니는지, 그리고 대중에게 어떤 선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지를 객관적으로 증명하고 싶었던 학자적 양심의 발로였다.

K-콘텐츠의 글로벌화, ‘정신’이 담기지 않은 기술은 껍데기일 뿐

김기배는 과거 대학원에서 뉴미디어를 전공하던 시절부터 이미 매체 간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플랫폼이 무한 확장될 것임을 예견했다. 그는 현재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K-컬처의 열풍을 반기면서도, 그 이면에 흐르는 본질적인 가치에 대해 묵직한 조언을 던진다. “이제는 누구나 스마트폰 하나로 영상을 제작하고 유통하는 1인 미디어의 시대다. 기술적 장벽은 이미 무너졌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화려한 기법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정신’이다.” 그의 목소리에는 힘이 실려 있다. 그가 강조하는 그 ‘정신’의 실체는 다름 아닌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사랑이다. 그는 K-콘텐츠가 글로벌 무대에서 일시적인 유행을 넘어 지속 가능한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기술적 완성도를 넘어, 전 세계인이 공감할 수 있는 따뜻한 인간애와 진실한 소통이 담긴 스토리텔링이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단언한다. 특히 그는 세계한인방송협회(WABC)를 비롯한 글로벌 미디어 네트워크의 역할에 대해서도 “전 세계에 흩어진 한인 방송망은 단순한 정보 전달의 창구를 넘어서야 한다. 고국을 그리워하는 동포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고, 그들의 삶에 영적인 위로와 정체성을 심어주는 ‘정서적 공동체’이자 ‘복음의 통로’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영혼의 공허를 채운 신독(愼獨)의 삶, 광야로 나간 CEO

방송사 사장으로서, 학자로서 세속적 성공의 정점에 서 있었을 때 역설적으로 영혼의 공허가 찾아왔다. 그때 그를 붙든 것은 하나님 앞에서 홀로 정직하고자 했던 부모님의 ‘신독(愼獨)’의 자세였다. 선친은 면허 없는 한의사였음에도 정성으로 환자를 돌보고 돈이 없는 이들에겐 약값을 받지 않던 인술의 대가였고, 어머니는 한센병 환자 부부에게 따뜻한 밥상을 차려주며 예수님의 사랑을 몸소 실천하셨다. “머리로 아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실천하는 것만이 사랑이다.”라는 깨달음은 그를 신학의 길로 이끌었다. 세상의 시청률과 성과라는 기준을 내려놓고, 한 영혼의 가치를 우선시하는 목회자로의 가치관 전환은 그에게 가장 큰 도전이자 은혜의 과정이었다. 그는 이제 카메라 렌즈 대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보이지 않는 영적 진리를 비추는 목자가 되었다.

아름다움 교회의 사명, 낮은 곳으로 흐르는 은혜의 빚 갚기

그가 담임하는 ‘아름다움 교회’의 이름에는 그의 철학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나눔과 섬김에 있다는 믿음이다. “오죽하면 나를 찾아왔을까.” 하는 마음으로 소외된 이웃에게 손을 내밀 때 그는 세상 어떤 명예와도 바꿀 수 없는 평안을 얻는다. 그는 이를 ‘부모님께 받은 사랑의 빚을 갚는 일’이라 부른다. 과거 어머니가 집 대문 앞 방앗간에 기거하던 한센병 부부에게 고깃국을 나누어 주었듯, 그 역시 방송사의 화려한 수치보다 한 사람의 인격체를 소중히 여기는 목회 현장을 지키고 있다. 그의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사랑이 실천되는 그곳이 바로 성전이라는 그의 평소 지론이 구현되는 공간이다.

“될 때까지 해보자”, 시카고 동포들에게 전하는 희망의 자막

이민 생활의 고단함 속에서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일궈나가는 시카고 한인 동포들에게 김기배 목사는 자신의 삶 전체를 증거로 삼아 깊은 위로와 울림을 건넨다. “경북 상주 깡촌 소년이었던 저도 도심의 매서운 텃세를 온몸으로 견뎌내야 했습니다. 낮에는 방송 현장에서 땀 흘리고 밤에는 책장을 넘기며 주경야독한 끝에 박사가 되었고, 마침내 CEO의 자리에도 올랐습니다. 제가 살아보니 노력은 배신하지 않으며, 정직한 땀방울은 반드시 값진 결과를 가져다줍니다.” 그에게 있어 고난은 삶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아니라, 오히려 더 큰 미래의 희망을 단단하게 쌓아 올리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일 뿐이다.

이러한 불굴의 의지는 그의 가계에 흐르는 공통된 유전자이기도 하다. 현재 백석예술대 교수로 재직 중인 친동생 김영배 박사의 사례가 이를 뒷받침한다. IMF 외환위기라는 국가적 재난 속에서 준비되지 않은 해고를 당하며 벼랑 끝에 섰던 동생 역시, 좌절하는 대신 인생의 방향타를 과감히 돌려 집념과 끈기로 학문의 길을 개척해 교수가 되었다. 김 목사는 동생과 자신의 삶을 반추하며, 어떤 가혹한 환경에서도 결코 굴하지 않는 ‘악바리’ 정신과 당당한 자세를 거듭 강조한다.

“지금 마주한 고난의 터널이 아무리 길고 어둡더라도, 그 끝에는 반드시 눈부신 희망의 빛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시카고의 매서운 바람 속에서도 뿌리를 내리려 애쓰는 동포 여러분, 절대 기죽지 말고 당당하게 나아가십시오.” 낯선 이국 땅에서 외로움과 싸우며 내일을 일구는 이들에게 던지는 그의 외침은 단순한 조언을 넘어, 먼저 그 길을 걸어온 선배가 보내는 뜨겁고도 절절한 응원가다. 그의 삶이 증명하듯 ‘될 때까지 밀어붙이는’ 그 무서운 집념이 있는 한, 시카고 동포들의 인생 다큐멘터리 역시 반드시 해피엔딩으로 기록될 것이라 그는 확신한다.

가족이라는 이름의 완성, 참 아름다웠던 마지막 엔딩 장면

인터뷰의 막바지, 그는 자신의 인생 다큐멘터리 엔딩 장면을 그려보았다. 6남매가 배우자와 함께 커플티를 입고 웃으며 걷는 모습, 그 배경에는 어머니가 곁에서 읽어주시던 성경 구절과 아버지가 매일 밤 의서를 읽으시던 평온한 음악이 흐른다. 그리고 화면에는 “지금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고, 가족의 사랑으로 완성된 삶이었습니다. 참 아름다웠습니다.”라는 자막이 흐른다. 특히 그는 아내 이종은 여사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았다. 퇴직 후 수입이 없을 때나 현직에 있을 때나 변함없이 아침 밥상을 차려주고 머리를 매만져주는 아내의 보살핌이 있었기에 오늘의 김기배 목사가 존재한다. 세계 최고의 저널리스트들이 부러워할 만한 그의 ‘풀스토리’는 결국 사랑으로 귀결된다. 세상을 담던 그의 렌즈는 이제 가장 가까운 가족과 소외된 이웃의 눈동자에 머물러 있다. 그의 인생 2막, 그 깊은 삶의 향기가 시카고의 독자들에게도 따스한 위로로 전해지길 바란다.

이가희 시카고한국일보 한국특파원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