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병천 박사의 손자병법인문학] 상처뿐인 영광은 필요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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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략리더십 연구원장

피해야 할 승리, 피로스의 승리
자보이전승(自保而全勝) ― 『손자(孫子) 군형 제4편』

미국 필라델피아의 한 빈민가에서 4회전 복서로 근근이 입에 풀칠하며 살아가는 청년이 있었다. 그에겐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암울했다. 삶을 지탱하게 하는 유일한 힘은 그가 짝사랑하는 애완동물 가게의 점원 아가씨 애드리언이다. 어느 날 그에게도 기회가 왔다. 헤비급 세계 챔피언이 독립기념일의 이벤트로서 무명의 복서에게 도전권을 준 것이다. 챔피언의 핵주먹에 15회를 버텨내는 것이 그의 유일한 목표였다. 드디어 결전의 날이 왔고 청년은 방심한 챔피언을 먼저 다운시키는 등 선전을 하면서 결국에는 15회를 견딘다. 비록 판정패를 했지만, 인간승리의 주인공인 그에게 마이크가 집중되고 그는 “애드리언!”을 외친다. 아마도 50, 60대 장년들은 이 영화를 잘 기억할 것이다. 무슨 영화일까? 1976년에 개봉된 ‘록키(Rocky)’다. 암울했던 70년대 사람들은 자신의 처지에 빗대 이 영화를 보면서 열광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 여러분도 어쩌면 록키의 극적인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 “와!”하고 박수를 쳤을 것이다. 손자가 영화를 봤다면 어떻게 말했을까? “어이구, 한심한 친구….” 아마 이랬을 것이다. 왜냐고? 록키는 손자가 가장 싫어하는 형태의 싸움을 했기 때문이다. 여섯 편의 록키 영화를 보면 하나 같은 공통점이 있다. 마지막 장면이다. 록키가 경기에서 이기든 지든 관계없이 링에 선 그의 눈은 시퍼렇게 멍들고 입은 퉁퉁 부었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다. 그야말로 상처뿐인 영광이다. 손자가 대단히 싫어하는 싸움이다. 이러한 싸움은 가장 피해야 할 싸움이다.
영화 록키의 실제 주인공, 즉 ‘리얼 록키’(Real Rocky)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최근 밝혀졌다. 그가 바로 미국의 복싱선수였던 척 웨프너(Charles Wepner·1939년 출생)라고 한다. 60~70년대 헤비급 선수로 활약했던 선수로서 실제로 당시 헤비급 세계 챔피언 알리와 경기를 했었는데, 15회까지 버티다가 마지막 19초를 남기고 TKO패를 당했다. 이때 그의 코뼈는 부러져 있었고, 두 눈에는 피가 철철 흘러내렸다. 이 장면을 감명 깊게 본 무명배우 실베스터 스탤론이 3일 만에 후다닥 시나리오를 썼고 이로써 그는 일약 세계적인 스타가 된다.
피로스의 승리(Pyrrhic Victory)라는 게 있다. 비록 이겼지만 승리 그 자체가 오히려 재앙인 경우다. 피로스(Pyrrhos)는 기원전(BC) 3세기께 북부 그리스 지방에 있는 에페이로스의 왕이었다. 역사가들은 그를 알렉산더 대왕에 비교할 만한 인물로 다룬다. 기원전 279년 피로스는 2만5000명의 군인과 20마리의 코끼리를 이끌고 로마를 침공해 헤라클레아와 아스쿨룸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그는 군대의 3분의 1 이상을 잃었다. 그는 승전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탄식했다. “슬프다. 이런 승리를 한 번 더 거두었다간 우리는 망하고 만다.” 이것이 바로 피로스의 승리다. 상처뿐인 승리라는 뜻으로, 1885년 영국의 데일리 텔레그래프가 처음 사용하면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피로스의 군대는 비록 이겼으나 그 피해가 너무 커서 예전의 상태로 재건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로마인들은 그런 허점을 노리고 즉시 후속 군대를 파병했다. 계속 이어지는 전쟁으로 피로에 지친 피로스의 군대는 하나씩 무너져 갔다. 결국 피로스는 기원전 272년 스파르타를 점령하기 위해 싸움을 벌이다 아르고스 시(市)에서 전사했다. 다시 주목하자. 이겼다고 해서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다. 피할 수 없는 싸움이라면 현명하게 싸우는 게 바람직하다. 우리가 오늘날 무한 경쟁의 세상을 살아가는 데 이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어떻게 하는 것이 현명한 싸움인가?
손자병법 13편은 정확히 6109자로 이뤄져 있다. 물론 판본에 따라 조금씩 글자 수는 차이가 있다. 6109자 글자에서 딱 한 글자만을 남기고 나머지는 다 지워버리라고 한다면 그 한 글자는 바로 ‘전(全)’이다. 그 의미를 조금 더 확장해 보면 ‘자보이전승(自保而全勝)’이다. 군형(軍形) 제4편에 나오는 이 말은 ‘나를 보존하고 온전한 승리를 거둔다’는 의미다. 여기 나오는 전승(全勝)에서 전(全)의 의미를 정확히 새길 필요가 있는데, 이때 전의 의미는 ‘완전(完全)’이라기보다는 ‘온전(穩全)’이라는 의미가 강하다. ‘완전’이라는 의미는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갖춰져 있다는 것이지만, ‘온전’이라는 의미는 그 형태가 처음과 같이 고스란히 보존돼 있다는 것이다. ‘완전’과 ‘온전’의 미세한 차이다. 그래서 ‘자보이전승’은 ‘나를 보존하고 온전한 승리를 거둔다’고 풀이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모든 리더는 ‘자보이전승’을 지상목표로 해야 한다. 가장 이상적인 승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분명히 그것을 알고는 있지만 실제로 그렇게 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自保而全勝 자보이전승
나를 보존하며 온전한 승리를 얻는다
주변을 돌아보면 모두가 싸우는 것처럼 보인다. 그만큼 치열한 경쟁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피가 터지는 싸움이 영화나 스포츠뿐만 아니라 실제 생활 가운데도 엇비슷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데 우리의 고민이 있다. 초등학교에서 반장 선거를 치르는 것부터 전쟁이다. 교정 안팎에서 부는 엄마들의 치맛바람이 얼마나 거센가. 저 멀리 섬마을의 이장선거로부터 지방자치단체장 선거판까지 모두 전쟁 일색이다. 학력 위조니, 위장전입이니 하는 등등의 흑색선전도 난무한다. 동네의 작은 구멍가게는 공룡처럼 거대한 대형마트와 전쟁을 벌인다. 대기업일지라도 국내외의 특허전쟁, 판매전쟁을 해야 한다. 불법다단계로 청년들이 무너진다. 불법대출, 부실운영으로 졸지에 은행이 도산한다. 그러고 보니 이런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이 마치 지뢰밭을 걷는 것과 같다. 언제 어떤 상황을 만날지, 언제 뭐가 터질지 모른다. 눈을 뜨면 뉴스에 뭔가 뻥뻥 터져 있다. 이런 세상이다 보니 서울외신기자 클럽 신임회장 스티브 허먼 기자의 말이 와 닿는다. “한국은 무슨 기사를 써야 할 지 걱정할 필요가 없는 나라다.” 과연 세상은 전쟁터다. 우리는 이 전쟁터를 피할 수 있는가? 심산유곡에 파묻혀 살지 않는 한 전쟁에서 자유롭기란 불가능하다. 현실적으로 그럴 수 없다면 달리 도리가 없다. 경쟁과 다툼의 세상에 정면으로 맞서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관심은 그저 소극적으로 싸움을 피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현명하게 싸움을 할 것인가’에 있는 것이다. 이것이 적극적인 관점에서 싸움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다. 여기서 꼭 명심할 것이 있다. 이긴 후에도 후회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록키의 승리처럼 상처뿐인 영광은 곤란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머리를 써서 싸우지 않고도 어떻게 하면 내가 원하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가를 늘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현명하게 싸울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