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약 공급 차단” 외치며 강경책 주문
▶ 베네수엘라, 펜타닐 공급 관련 적어
▶ ‘석유’에 좌지우지된 미-베네수 관계
노벨평화상을 노리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제는 그 마음을 저버린 것일까요. 연이은 미국과 베네수엘라의 갈등에 최근 카리브해 인근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전쟁설’이 나오는 가운데 지난달 16일 미 해군의 원자력추진 항공모함 ‘제럴드 R 포드’함이 카리브해에 들어섰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의 ‘말’들도 전쟁을 가리키는 듯 합니다. 지난달 29일 세계 각국을 향해 “베네수엘라 상공을 비행하지 말라”며 경고를 내뱉은 트럼프 대통령은 이튿날 직접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지금 즉시 나라를 떠나라’고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후 베네수엘라에 대한 지상공격 가능성을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베네수엘라를 공격하는 표면적인 이유는 ‘마약 유입 차단’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마두로 대통령과 베네수엘라 행정부가 미국에 마약 펜타닐을 유통하는 갱단 ‘카르텔 데로스 솔레스(태양 카르텔)’의 지도부라며 이들을 지난달 24일 외국테러조직(FTO)으로 지정했습니다. 그러나 국가 지도부가 마약 총책이라는 이러한 주장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베네수엘라 공격 압박 뒤에 숨겨진 미국의 진짜 의도는 무엇일까요.
■ ‘마약 의심 선박’ 처럼 베네수엘라 공습하나
미국 국방부의 FTO 지정은 미군이 지난 9월부터 카리브해에서 벌이고 있는 ‘마약 의심 선박’ 무차별 공습의 근거이기도 합니다. 미국은 지난 2월 또 다른 베네수엘라 갱단 ‘트렌 데 아라과(TdA)’를 비롯해 8개 마약 갱단을 FTO로 지정했고, 이들이 운영하는 것으로 의심되는 선박을 증거 없이 공습해왔습니다. 미국 CNN방송 집계에 따르면 현재까지 총 23척의 선박 공습이 있었고, 모두 87명이 살해됐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공습이 의회의 허가를 받지 않고 이뤄졌다는 점입니다. 미국 헌법은 전쟁 선포권을 의회의 권한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트럼프 행정부는 구체적인 의회 동의 없이 카리브해에서 군사 작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베네수엘라에 대해서도 의회 허가 없이 공격이 이뤄질 수 있다는 예상이 나오는 대목입니다. 최근에는 피트 헤그세스 미 국방장관이 한 차례 공습에서 살아남은 난파선을 향해 ‘전원 사살’ 명령을 내렸다는 의혹이 제기되며 국제법 위반 논란도 불거졌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주장하는 대로 베네수엘라를 압박하거나 카리브해에서의 ‘마약 운반선’을 공습한다고 해서 미국으로의 마약 유입을 막기 어렵다는 관측도 나옵니다. 미국 관세국경보호청(CBP)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으로 유통 도중 적발된 펜타닐 가운데 98%는 멕시코와의 육상 국경에서 발견됐습니다. 2020년 미국 마약단속국(DEA) 보고서에는 ‘미국 유입 코카인의 4분의 3이 태평양에서 유입된다’는 내용이 담기기도 했죠. 카리브해 연안 국가인 베네수엘라에 대한 트럼프 행정부의 대응을 단순히 ‘마약과의 전쟁’으로 보기 어려운 이유입니다.
■ 우호적인 미-베네수 관계, 왜 틀어졌나
사실 양국은 20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오랜 기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왔습니다. 석유가 그 밑바탕에 깔려있었죠. 1918년 베네수엘라가 원유를 처음으로 수출한 이래 미국은 베네수엘라 원유의 주요 수입국 중 하나였습니다.
미국 에너지정보국(EAI) 통계에 따르면 제1차 오일쇼크로 중동으로부터 석유 수입이 곤란해진 1973년에는 미국의 전체 석유 수입량 가운데 32.7%를 베네수엘라산 석유가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1976년 베네수엘라가 석유 국유화 정책을 추진하며 잠시 주춤해졌던 미국의 베네수엘라산 석유 수입은 이후 베네수엘라가 자국 석유 개발 시장을 외국에 개방하며 1990년대 후반 20%대까지 다시 증가합니다.
미국과 베네수엘라 관계가 지금과 같이 악화된 것은 1999년 2월 취임한 우고 차베스 전 베네수엘라 대통령 시기입니다. 차베스 전 대통령은 좌익 성향 군인 출신으로, 집권 기간 내내 미국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비판하며 반미 정책을 펼쳐왔습니다. 2002년에는 차베스 전 대통령이 국영 석유기업 베네수엘라석유공사(PdVSA) 주요 직위에 측근을 임명한 것이 불만을 촉발하며 반(反)차베스 쿠데타로 이어졌는데, 쿠데타 진압 이후 차베스 전 대통령은 미국 배후설을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차베스 대통령이 대신 손을 내민 곳은 중국입니다. 2007년 차베스 정부는 석유를 담보로 중국개발은행(CDB)으로부터 자금을 빌리는 일명 ‘중국 기금’을 설치합니다. 콜롬비아의 라틴아메리카-중국 관계 연구기관인 안드레스 벨로 재단의 2023년 4월 보고서에 따르면 2005년 이후 중국이 베네수엘라에 제공한 차관은 약 620억 달러에 달합니다. 중국의 라틴아메리카 지역 대출의 45%에 달하는 기금입니다.
중국은 베네수엘라가 2014년 유가 하락 이후 상환능력을 잃어버린 뒤로는 현금이 아닌 석유를 받아가며 차관을 유지해왔습니다. 베네수엘라 대외 관계는 ‘석유’에 따라 요동쳐온 셈입니다.
■ 공격의 진짜 원인도 석유?
이렇다보니 트럼프 행정부의 베네수엘라 공격 이유도 마약이 아닌 ‘석유’에서 찾을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옵니다. 이는 마두로 대통령 본인이 생각하고 있는 바이기도 합니다. 마두로 대통령은 지난달 30일 석유수출입국기구(OPEC)에 보낸 서한에서 “미국 정부는 베네수엘라의 막대한 석유 매장량을 차지하려 한다”고 밝히며 미국의 진짜 공격 의도가 ‘마약 차단’이 아니라 석유에 있다는 주장을 폈습니다. 지난해 기준 베네수엘라의 확정 원유 매장량은 세계 1위 수준에 달합니다.
자체적으로 석유를 생산할 수 있는 미국이 베네수엘라산(産) 석유에 눈독을 들일만한 이유도 있습니다. 베네수엘라에서 나는 석유는 ‘초중질유’라고 불리는 끈적하고 비중이 높은 원유입니다. 일반적인 석유보다 휘발유나 등유 등 고급 연료는 적게 나오지만, 경유·선박용 등유와 같은 산업용 연료나 아스팔트 등을 만들기는 좋습니다. 미국에서 채굴되는 경질·저황 원유에서는 상대적으로 얻기 어려운 것들입니다.
<이정혁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