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관고등학교 박하식 교장이 쏘아 올린 K-에듀의 ‘오래된 미래’
강원도 횡성의 겨울바람은 예나 지금이나 매서웠지만, 그 속에 담긴 청량함은 머리를 맑게 깨웠다. 해발 600미터, 굽이굽이 이어진 소래길을 따라 올라가는 동안 차창 밖으로 스치는 풍경이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십수 년 전, 민족사관고등학교(이하 민사고) 7기생이었던 딸(박원희)을 뒷바라지하며 수없이 오갔던 그 길이다. 당시 교복으로 한복과 개량한복을 입고, 영어와 한국어를 섞어가며 밤새 토론하던 딸아이는 이제 뉴욕의 마천루 속에서 IT 기업의 핵심 인재로 당당히 제 몫을 하고 있다. 학부모로서 가슴 졸이며 찾았던 그 교정을 오늘은 시카고 한국일보 특파원으로서 다시 찾았다.
기와지붕 위에 내려앉은 옅은 눈발이 고즈넉함을 더하는 12월 6일 오후, ‘자사고의 신화’이자 한국 교육의 거목인 박하식 교장을 만났다. 그는 여전히 청년 같은 눈빛으로 교정을 거닐고 있었다. 우리는 학교의 상징인 다산 정약용 선생의 동상 앞을 지나 제설 작업을 끝낸 산책로를 걸으며 인터뷰를 시작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단순한 교육론이 아니라, AI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 선 인류가 지켜야 할 ‘인간의 품격’에 대한 철학적 선언과도 같았다.
어머니의 마음으로 다시 찾은 교정, 그리고 ‘K-에듀’의 르네상스
산책로를 걷는 박 교장의 발걸음은 힘찼다. 그에게 딸아이의 안부를 전하자, 그는 “민사고의 졸업생들은 학교의 자랑이자 대한민국 영토의 확장”이라며 환하게 웃었다. 그 웃음 뒤로 비장함이 스쳤다.
“다시 민사고입니다. 세상은 AI가 모든 것을 대체한다고 호들갑을 떨지만 이곳 민사고는 오히려 가장 ‘사람다운’ 교육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4차 산업혁명 시대, 민사고가 추구하는 ‘미래형 인재’는 역설적이게도 가장 아날로그적인 감수성을 지닌 인재입니다. 기계가 답을 주는 시대에 남들이 하지 않는 질문을 던질 줄 아는 능력. 우리는 그것을 ‘영혼이 있는 지성’이라 부릅니다. 이를 위해 ‘K-디플로마(K-Diploma)’를 완성하여 한국의 교육 시스템 자체가 세계의 표준이 되는 날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붓’과 ‘알고리즘’의 이중주: 창의성은 ‘다름’에서 온다
민사고의 학생들은 새벽에 일어나 심신을 수련하고 오전에는 붓글씨를 쓰며, 오후에는 고도의 코딩 알고리즘을 짠다. 이 이질적인 결합이 과연 가능한 것일까.
“AI가 흉내 낼 수 없는 창의성과 융합적 사고는 어디서 나옵니까?”라는 질문에 박 교장은 활터(국궁장)를 가리켰다.
“창의성은 서로 다른 것이 충돌할 때 폭발합니다. 우리 아이들은 가야금의 선율에서 수학적 패턴을 읽고, 묵향을 맡으며 데이터의 흐름을 상상합니다. 인문학적 소양 없는 기술은 재앙이고, 기술 없는 인문학은 공허하죠. 민사고의 독특한 융합 프로그램은 ‘한국적인 리듬’을 몸에 새긴 채 최첨단 과학기술을 다루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실리콘밸리가, 그리고 세계가 원하는 ‘대체 불가능한 인재’의 원형입니다.”
교사는 ‘지식 기술자’가 아닌 ‘영감의 설계자’
그는 교육의 질은 교사의 질을 넘을 수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금 강조했다. 하지만 그 역할은 완전히 달라졌다.
“AI 시대, 선생님은 더 이상 지식 전달자가 아닙니다. 지식은 AI가 더 많이, 더 빨리 줍니다. 지금 우리 선생님들은 학생들의 잠재력을 폭발시키는 ‘점화자(Igniter)’이자, 인생의 방향을 함께 고민하는 ‘멘토’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에듀테크와 첨단 기술을 교실에 도입하는 것은 기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기기 화면을 보는 시간보다, 학생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는 시간을 더 늘리고 있습니다. ‘하이터치(High Touch)’, 기술이 고도화될수록 교육은 더 따뜻하게 학생의 마음을 어루만져야 합니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리더십이다
민사고의 뿌리는 단연 ‘민족 주체성’이다. 하지만 국경이 희미해지는 초연결 글로벌 시대에, 민족 교육이 자칫 배타적인 국수주의로 흐르지는 않을까? 이러한 기자의 우문에 박하식 교장은 확신에 찬 현답을 내놓았다.
“뿌리가 깊지 않은 나무는 거센 바람에 금방 넘어집니다. 하지만 뿌리가 깊은 나무는 태풍을 견디고 그 가지를 더 넓은 세상으로 뻗어 나갑니다. 박원희를 포함해 민사고 졸업생들이 세계 무대에서 인정받는 핵심 이유는 단순히 영어를 원어민처럼 구사해서가 아닙니다. 그건 기본일 뿐이죠. 진짜 경쟁력은 혼란스러운 세상 속에서도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확고한 정체성과 철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박 교장은 민사고의 상징인 한복과 전통 예절 교육을 ‘영혼의 갑옷’에 비유했다.
“학생들이 매일 한복을 입고, 웃어른께 예를 갖추는 것은 겉치레가 아닙니다. 그것은 매 순간 ‘한국인으로서의 자존감’이라는 튼튼한 갑옷을 입는 과정입니다. 스스로를 귀하게 여기는 자존감이 있어야 타인의 문화도 깊이 존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단단한 정체성을 바탕으로 기후 변화, 빈곤, 전쟁 등 인류가 직면한 보편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앞장서는 리더를 길러냅니다. 결국 ‘민족 주체성’과 ‘글로벌 리더십’은 서로 다른 두 개의 축이 아니라, 세계를 떠받치는 하나의 거대한 기둥인 셈입니다.”
숫자를 넘어선 ‘스토리’: 입시의 본질을 꿰뚫다
현실적인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좋은 교육 철학도 결과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공허할 수 있기에, 학부모들의 시선이 가장 먼저 머무르는 진학 실적을 물었다. 박교장은 자신감에 찬 목소리로 올해의 성과를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올해 민사고의 입시 결과는 그 어느 때보다 괄목할 만합니다. 아이비리그를 포함한 해외 유수 명문대에 국제학부 학생들이 합격하여 글로벌 인재 양성의 산실임을 다시 한번 입증했고, 국내에서도 서울대를 비롯한 최상위권 대학과 의학 계열에 합격하는 소식들로 다시 한 번 진학의 쾌거를 이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화려한 합격자 숫자보다 그들이 대학에 던진 치열한 ‘성장 스토리’에 더 주목합니다.”그는 숫자는 결과일 뿐, 본질은 과정에 있다고 강조했다. “급변하는 입시 환경 속에서 세계적인 명문대들이 원하는 건 단순한 ‘점수 기계’가 아닙니다. 고교 3년 동안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하며, 자신만의 서사를 써 내려간 학생을 원합니다. 수능 제도가 바뀌고 내신 평가 방식이 달라져도 민사고의 입시 결과가 늘 압도적인 이유는 분명합니다. 우리는 대학 입시를 위한 기술자가 아니라 학문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깊이 탐구하는 ‘학자’를 길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질’을 추구하는 교육 그것이 바로 올해도 입증된 민사고의 필승 전략입니다.”
기숙사, ‘작은 사회’에서 치열하게 배우는 관계의 미학
“AI 시대가 도래할수록 역설적으로 변치 않는 가치는 바로 ‘전인교육’입니다. 아니, 오히려 그 중요성은 생존과 직결될 만큼 커졌습니다.”
박교장의 목소리에는 단호한 힘이 실렸다. 그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학생들이 생활하는 기숙사 건물, ‘생활관’ 쪽을 응시했다.
“지식과 정보는 이제 손가락 터치 한 번이면 AI가 쏟아내는 시대입니다. 혼자서도 얼마든지 박사가 될 수 있죠. 하지만 ‘인성’과 ‘사람의 향기’는 결코 독학으로 배울 수 없습니다. 오직 사람과 사람이 살을 맞대고 부대끼는 과정에서만 체득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민사고의 전교생 기숙사 생활은 단순한 숙식을 넘어, 그 자체가 거대한 ‘인성 용광로’이자 ‘사회성 실험실’입니다.”
그는 민사고의 기숙사 생활을 ‘보석이 다듬어지는 과정’에 비유했다.
“전국 각지 아니 세계 각국에서 모인 개성 강하고 똑똑한 아이들이 한방을 씁니다. 처음에는 당연히 갈등이 생깁니다. 살아온 환경이 다르고 생각하는 방식이 다르니까요. 우리는 그 갈등을 억지로 덮거나 피하게 하지 않습니다. 24시간 함께 생활하며 사소한 생활 습관부터 가치관의 차이까지 날 것 그대로의 충돌을 겪습니다. 그 과정에서 밤새 토론하고, 싸우고, 화해하고,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며 양보하는 법을 배웁니다. 이것은 교과서에는 없는 하지만 리더가 되기 위해 가장 필요한 ‘살아있는 관계학’입니다.”
박 교장은 이어 진정한 엘리트 교육의 정의를 다시 내렸다.
“제가 아이들에게 늘 강조하는 것이 있습니다. ‘공부해서 남 주자’는 것입니다. 과거의 엘리트 교육이 남을 이기고 밟고 올라서서 쟁취하는 1등을 목표로 했다면, 민사고가 추구하는 미래의 리더는 다릅니다. 넘어진 친구에게 손을 내밀어 일으켜 세우고, 내가 가진 재능으로 공동체에 기여하며 함께 성장하는 사람, 그것이 진짜 실력입니다.
AI는 효율성을 계산하지만, 인간은 ‘함께’의 가치를 압니다.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고 갈등을 조정하며 공동체의 선(善)을 위해 기꺼이 헌신하는 자세. 이 ‘공동체 의식’과 ‘도덕성’이야말로 AI가 흉내 낼 수 없는 인간 고유의 영역이자 민사고가 배출하는 인재들이 세상에 나가 환영받는 진짜 이유입니다.”
디아스포라의 꿈, 민사고가 잇는 가교
시카고를 비롯한 미주 동포 사회에 대한 그의 애정은 남달랐다.
“해외에 계신 동포 2세, 3세들에게 민사고는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방학 캠프나 교류 프로그램을 통해 그들이 모국의 문화를 체험하고, ‘코리안 아메리칸’으로서의 뿌리를 확인하도록 돕고 싶습니다. 민사고 졸업생들이 구축한 글로벌 네트워크는 이제 미주 한인 사회의 강력한 자산이 될 것입니다. 시카고의 한인 청소년들이 이곳 강원도의 별을 보며 자신의 뿌리를 찾고, 다시 세계로 나아가는 꿈을 꿉니다. 우리는 그 연결고리가 되겠습니다.”
거친 파도를 즐겨라, 그대들은 ‘민족의 등불’이니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교정에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도서관과 기숙사의 불빛은 더욱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인터뷰를 마치며 미래를 준비하는 젊은 세대에게 한마디를 부탁했다.
“파도가 높다고 배를 띄우지 않는 선장은 없습니다. 불확실한 AI 시대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변하지 않는 것은 ‘사람의 가치’와 ‘도전하는 용기’입니다. 민사고 교훈 중에 ‘출세하기 위해 공부하지 마라. 공부해서 남 주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재능을 세상의 어두운 곳을 비추는 데 쓰십시오. 스스로를 귀하게 여기고, 당당하게 나아가십시오. 여러분 가슴속에 켜진 그 작은 등불이, 언젠가 온 세상을 비추는 찬란한 빛이 될 것입니다.”
강원도의 짧은 해가 완전히 넘어가고, 민사고의 한옥 처마 끝에 걸린 풍경 소리가 겨울바람에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박하식 교장과 나누었던 대화는 인터뷰라기보다 깊은 우물을 길어 올리는 철학적 여정이었다. 문득 뉴욕에 있는 딸아이가 생각났다. 그 아이가 이곳에서 보낸 치열했던 2년(조기졸업)이 단순한 입시 준비가 아니라, 인생을 살아갈 단단한 뼈대를 만드는 시간이었음을 새삼 깨닫는다.
박하식 교장은 교육자이기 이전에 ‘희망을 심는 농부’였다. 척박한 현실 속에서도 ‘민족’과 ‘세계’, ‘전통’과 ‘첨단’이라는 씨앗을 뿌리고 가꾸는 그의 손길에서 대한민국 교육의 밝은 미래를 보았다. 한인 동포 여러분들이 이역만리에서 흘리는 땀방울이 헛되지 않은 것은 바로 고국에 이런 든든한 ‘교육의 등불’이 켜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저 산 너머 세상이 아무리 AI로 급변한다 해도, 이곳 횡성의 소나무 숲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의 눈망울이 살아있는 한, 우리의 미래는 여전히 뜨겁고 희망차다. 박하식 교장의 마지막 당부처럼, 우리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세상을 비추는 등불’이 되기를 소망해 본다.
<이가희 시카고한국일보 한국 특파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