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예보다 책임을, 직함보다 실행을…”
불의에 침묵하지 않는 리더
시카고 한인사회의 틀을 세우다
[편집자주]
본보는 시카고 한인사회를 일궈온 개척자들의 발자취를 기록하며 공동체의 뿌리를 되짚어보고자 한다. 그 네 번째 순서로 김창범 전 시카고한인회 회장의 삶을 소개한다.
김 회장은 ‘풀타임 회장’으로 헌신하며 한인회 운영의 틀을 세우는 데 힘썼다. 이후 5년에 걸쳐 미주 각지를 직접 찾아 자료를 모아 ‘시카고 한인사’를 펴낸 기록자이기도 하다.
본보는 김 회장의 80여 년 삶을 따라가며 시카고 한인사회의 형성과 성장, 그리고 그 안에 담긴 그의 헌신을 돌아본다.
▲ 생사의 고비를 넘기며 다져진 ‘강철 같은 심장’
김창범 회장의 강직한 성품과 추진력은 어린 시절 겪은 전쟁과 피란의 시간 속에서 다져졌다. 1938년 함경남도 북청에서 태어난 그는 1945년 해방과 함께 부모를 따라 내려와 서울 후암동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평온한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가족은 다시 대구로 피란길에 올라야 했다. 어린 시절 그는 권총 오발 사고로 크게 다칠 뻔했고, 이듬해에는 물에 빠졌다가 가까스로 구조되기도 했다. 어린 나이에 잇따라 생사의 고비를 넘긴 셈이다.
김 회장은 훗날 그 시절을 떠올리며 “그때부터 제 삶은 덤으로 얻은 인생이라고 생각했다”며 “이미 죽었을지도 모를 목숨인데 세상에 두려울 것이 무엇이 있었겠느냐”고 말했다.
이 같은 경험은 그의 성격에도 깊게 배어들었다. 그는 불의를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했고, 해야 할 말은 하고야 마는 성품으로 성장했다. 그의 어머니는 생전 장남의 이런 기질을 걱정하며 “세상에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살 수는 없으니, 때로는 보고도 못 본 척하며 살아야 한다”고 타일렀다고 한다. 그러나 타협보다 원칙을 앞세우는 그의 성정은 훗날 시카고 한인사회에서 불의에 침묵하지 않고 앞장서는 삶으로 이어졌다.
▲ 독일 광산에서 배운 삶의 태도, ‘당당함’을 캐다
6·25전쟁을 겪은 뒤 청년이 된 김 회장에게 당시 한국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국민소득이 87달러에 불과했던 1964년, 그는 낯선 땅 독일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지하 수백 미터 깊은 광산에서 일하는 파독 광부의 삶이었다.
그가 3년 동안 근무하며 독일 사회에서 느끼고 배운 것은 약자에 대한 배려였다. 가난한 나라에서 온 젊은 노동자들을 명절이면 집으로 초대해 식사를 대접하고, 낯선 타국에서 외롭지 않도록 따뜻하게 대해주던 독일인들의 모습은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김 회장은 독일 생활을 돌아보며 “그 시기에 강자 앞에서 위축되지 않고 약자를 돌아보는 태도를 더욱 분명히 갖게 됐다”고 말했다.
독일에서 3년의 계약 생활을 마칠 무렵, 김 회장은 다시 한 번 삶의 방향을 고민하게 됐다. 당시 파독 광부들 앞에는 대체로 세 갈래 길이 놓여 있었다. 계약을 마친 뒤 한국으로 돌아가거나, 미국이나 캐나다로 향하는 길이었다. 김 회장 역시 그 갈림길 앞에 섰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도 있었지만, 그는 더 넓은 세상에서 새로운 기회를 찾고 싶었다. 그러나 당시 미국행은 누구에게나 쉽게 허락되는 길이 아니었다. 미국 비자를 받는 일도 점점 어려워졌고, 독일에 머물던 한국인들 사이에서도 미국 이주는 쉽지 않은 선택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뜻밖의 인연이 길을 열었다. 예전에 미국 비자 문제로 한국인들을 속였다고 오해해 김 회장이 따져 물었던 한 유학생이 있었다. 훗날 그는 김 회장에게 손을 내밀었다. 독일에서 억울한 일을 당한 한국인을 위해 앞장서 싸우는 김 회장의 모습을 보고, 정의감이 강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 인연으로 김 회장은 미국 비자를 얻는 데 도움을 받았고, 1968년 시카고로 향하게 됐다.
▲ 독일에서 미국으로… 또 한 번의 길
당시 시카고는 공업지대가 발달해 일자리를 구하기 수월했고, 한인들도 하나둘 모여들던 시기였다.
시카고에 도착한 첫날, 먼저 정착해 있던 친구의 초대로 당시 유일한 한식당이었던 ‘산미장’에 환영 자리가 마련됐다. 그러나 반가운 환영보다 먼저 돌아온 것은 뜻밖의 충고였다. 친구 중 한 명이 “이곳에는 유학생과 지식인들이 많으니 독일에서 광부로 일하다 왔다는 말은 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김 회장은 당시를 떠올리며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고 하지만, 당시 사회에는 육체노동에 대한 은근한 편견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지난 시간을 숨길 생각이 없었다. 그는 사람들 앞에서 “나는 독일에서 노동하다 온 사람이며, 땀 흘려 정직하게 일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라고 당당히 밝혔다. 실랑이는 점점 거칠어졌고, 결국 그날 주먹다짐으로까지 이어졌다고 회상했다. 그는 자신의 이력을 감추기보다 노동의 가치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쪽을 택했다.
이후 그는 독일을 거쳐 온 광부와 간호사들을 중심으로 미주 최초의 ‘동우회’를 만들고 초대 회장을 맡았다. 그것은 숨기고 지워야 할 이력이 아니라, 서로를 연결하고 지지할 수 있는 경험으로 받아들인 결과였다. 동우회는 이후 다른 지역으로도 이어지며 미주 한인사회 안에서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갔다.
정착 초기의 이 경험은 김 회장에게 중요한 출발점이 됐다. 남의 시선보다 자신의 삶을 먼저 인정했던 그 태도는 훗날 시카고 한인사회에서 그가 여러 단체를 이끌고 굵직한 일을 추진해 나가는 밑바탕이 됐다.
▲ 명예보다 일을 앞세운 ‘풀타임 회장’
1980년 김 회장이 제15대 시카고한인회 회장에 당선되면서, 한인회 운영 방식에도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당시 한인회장은 본업을 이어가면서 행사나 회의를 챙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김 회장은 당선된 뒤 ‘풀타임 회장’으로 움직였다.
그는 한인회가 단순히 이름을 내세우는 단체가 아니라, 낯선 땅에서 살아가는 동포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조직이 돼야 한다고 봤다. 이에 따라 자신이 하던 일을 뒤로하고 매일 한인회 사무실에 나와 전화를 받고, 동포들의 민원을 직접 챙겼다. 한인회장이 사무실을 지키며 실무를 돌보는 모습은 당시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김 회장은 “이름만 걸어놓고 명함만 들고 다니는 회장은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직함이 아니라, 동포들이 실제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일이었다.
이 같은 성향은 한인회 전화번호 ‘1900번’을 확보한 일화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외우기 쉽고 상징성 있는 번호가 공동체의 중요한 연결 창구가 될 수 있다고 보고, 직접 전화국 관계자들을 찾아다니며 공을 들였다. 전화번호 하나까지도 한인사회의 시스템으로 받아들였던 셈이다.
▲ 미시간 대로를 덮은 태극 물결
김 회장 리더십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장면은 1982년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 퍼레이드였다. 시카고 중심가인 미시간 대로에서 한국인의 존재감을 알릴 수 있는 드문 기회였고, 김 회장은 이 행사를 누구보다 크게 구상했다. 그가 내놓은 계획은 60대의 꽃차를 앞세운 대규모 행진이었다.
당시 인력과 예산을 감안하면 쉽지 않은 구상이었다. 그러나 김 회장은 “이왕 하는 일이라면 제대로 해서 시카고 한복판에 한국인의 존재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언론사와 기업, 한인 단체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협조를 구했고, 계획을 차근차근 현실화해 나갔다. 퍼레이드 당일 미시간 대로에 60대의 꽃차가 줄지어 들어서자 시카고 시민들은 발길을 멈추고 지켜봤고, 현장에 참석한 한인 동포들도 큰 감격을 느꼈다.
태극기가 시카고 도심 한복판에 나부끼고 한국의 음악과 문화가 거리 위를 채운 그날의 풍경은 많은 이민 1세대에게 오래 남는 기억이 됐다. 단순한 행사 하나를 넘어 시카고 한인사회가 이 도시 안에서 분명한 존재감을 드러낸 상징적인 장면이었다.
▲ 1,500명의 연말 행사와 3,000명의 야유회… 사람을 모은 힘
김 회장 재임 시절 시카고 한인사회는 유례없는 응집력을 보여줬다.
당시 다운타운 힐튼호텔에서 열린 연말 행사에는 1,500여 명이 참석했다. 주차비가 비싸고 거리도 가까운 편은 아니었지만, 많은 동포들이 행사장을 찾았다. 여름이면 함스파크 등지에서 열린 야외 야유회에도 3,000명이 넘는 한인이 몰렸다.
특히 청소년들을 위한 소프트볼 대회는 김 회장이 각별히 힘을 쏟은 행사 가운데 하나였다. 참가팀이 많다 보니 경기가 밤늦게까지 이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날이 어두워지면 그는 경기를 멈추기보다 자동차 헤드라이트를 켜고 남은 일정을 이어갔다. 주어진 여건 속에서도 끝까지 행사를 마무리하려 했던 그의 성향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는 각종 행사와 함께 한인 주소록을 발간하고 한인회보를 정기적으로 펴내며 공동체를 잇는 정보 인프라도 구축했다. 흩어져 있던 개인들을 ‘한인 공동체’라는 이름 아래 묶어냈다. 당시 한인들에게 시카고 한인회는 단순한 단체가 아니라 거친 이민의 삶을 지탱해 주는 든든한 요새였다.
이 같은 변화는 저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풀타임 회장으로 일하는 동안 그의 사업은 적지 않은 타격을 입었고, 그에 따른 경제적 부담도 고스란히 감당해야 했다. 그럼에도 김 회장은 “공동체를 위해 쏟은 시간과 노력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돌아봤다.
김 회장은 1981년 한인회관 개관식을 주관하며 한인사회의 기반을 다졌고, 일본 교과서 왜곡 규탄대회 등에 앞장서며 동포사회의 목소리를 드러냈다. 사람들을 한자리에 모으는 대형 행사는 물론, 한인사회가 주류 사회에서도 분명한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도록 판을 넓혀갔다.
많은 이들이 김 회장을 두고 ‘큰 일꾼’이었다고 기억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에게 회장직은 명예를 위한 자리가 아니라 책임을 감당하는 자리였고, 직함보다 실제로 무엇을 남기느냐가 더 중요했다.
▲ 6년의 집념으로 엮어낸 기록, ‘시카고 한인 이민사’
김 회장은 한인사회발전협의회를 맡으면서 시카고 한인 이민사의 발자취를 기록으로 남기는 일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시간이 흐를수록 1세대의 기억은 사라지고, 이를 남겨두지 않으면 공동체의 역사 또한 함께 잊힐 수 있다는 절박함이 그를 움직였다.
그는 “5~6년에 걸쳐 미주 각지를 직접 돌며 자료를 모았다”며 “하와이에서 뉴욕에 이르기까지 15개 주 주요 도시를 찾아다니며 초기 이민자들의 기록을 수집하고, 원로들을 만나 구술을 듣고, 사진과 문서를 하나하나 확인했다”고 설명했다. 그 과정에서 적지 않은 시간과 비용이 들었고 생업에도 부담이 따랐지만, 그는 끝내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모인 자료는 2012년 ‘시카고 한인 이민사’로 출간됐다. 김 회장에게 이 책은 단순한 출판물이 아니었다. 낯선 땅에서 힘겹게 삶의 터전을 일군 1세대 한인들의 시간을 후세에 남기기 위한 기록이었다. 그는 직함에 머무르지 않고, 누구나 쉽게 해낼 수 없는 기록 작업을 끝까지 완수한 사람이었다.
▲ “뿌리를 잊지 말라”
김 회장은 차세대 후배 리더들에게 “정착한 지역에서 존경받는 시민이 돼야 하며, 뿌리를 잊지 말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그는 과거 전두환 전 대통령을 예방했을 때 들은 이 말을 오래도록 마음에 새겨왔다고 했다.
그가 남기고 싶어 했던 것은 이름이나 직함이 아니었다. 김 회장은 “이민자의 삶이 고단할수록 서로를 붙들어야 한다고 믿었다”며 “낯선 땅에서도 뿌리를 잃지 않으려 했고, 공동체의 역사는 결국 누군가의 헌신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가 평생 실천으로 보여준 리더십은 사람을 먼저 세우고 공동체를 앞세우는 태도에서 비롯됐다.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그는 마지막으로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치열했던 세월 끝에서 제 모자람을 인내해 준 가족과 형제들, 그리고 묵묵히 제 손을 잡아주며 시카고 한인 사회를 함께 일궈온 모든 분께 뜨거운 감사를 드립니다.”
명예보다 책임을, 직함보다 실행을 앞세웠던 한 사람의 삶은 그렇게 마지막까지 감사와 책임의 언어로 남았다. 그리고 그 나직한 울림은 앞으로도 시카고 한인 사회가 오래 기억해야 할 따뜻한 유산으로 남게 됐다.
<윤연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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