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네스의 세계미술관산책4]그림을 읽다, 바로크 성화와 역사화. 시카고 미술관 2

4
엘 그레코 <성모승천 The Assumption of the Virgin> 1577–79 유채, 403.2 × 211.8 cm

미국 미술관을 방문하면 먼저 고전주의 작품부터 볼 것을 권한다. 서양미술의 본고장인 유럽에서 대다수를 소장하니 볼 기회가 드물다. 구매를 하고 싶어도 경매에 나오지도 않지만 가격도 너무 비싸다. 그래도 미국 미술관 곳곳에는 고전주의 명작이 많이 전시된다.

때로는 그림을 읽어야 선명하게 보일 때가 있다.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성경, 신화, 역사가 주제인 그림이다. 과거 그림은 문맹자를 위한 언어의 기능을 하였는데, 특히 성화는 ‘읽는 성경’이다. 시카고 미술관의 엘 그레코(El Greco, 1541-1614)의 <성모승천>은 보기도 하지만 읽어야 하는 그림이다.

시카고 미술관이 소장한 올드마스터(19세기 이전의 대가)의 최고 그림은 4m가 넘는 거대한 크기이다. 목을 꺾어 한참을 올려다보아야 한다. 가까이 보면 조명이 반사되어 색상과 형태가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멀찍이 떨어져 보아야 그림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이름 자체가 ‘이방인’을 뜻하는 그리스 태생의 엘 그레코는 베니스와 로마에서 후기 매너리즘 양식을 익히고, 1577년 스페인 톨레도로 이주한다. 도착 후 산토 도밍고 엘 안티구오 교회의 제단화 9점을 주문받았다. 교회는 후원자인 미망인 도냐의 장례 예배당을 재건 중이었다. 새 도시에서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엘 그레코에게 천운의 기회였다.

그는 첫 번째로 제작한 <성모승천>을 중심으로 웅장한 제단화를 구성하였다.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죽음을 맞은 성모 마리아를 하늘로 불러 올리시는 장면이다. 성경 기록에는 없지만, 전승에는 성모님의 임종을 12사도들이 지켜보았다고 한다. 이 내용을 바탕으로 성모님과 12사도를 한 화면에 빼곡하게 담았다.

미망인이 열망하는 구원은 환상적인 이미지로 펼쳐진다. 나선형 운동을 보이는 화면은 지상과 천상으로 양분되었다. 성모 마리아는 초승달 위에서 천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승천한다. 공간을 깊숙하게 빼는 사선의 열린 관 주변에 당황한 사도들이 보인다. 이들은 빈 관을 확인하고 하늘로 오르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엘 그레코는 신비로운 분위기와 독창적인 화법으로 승천을 묘사하였다. 길게 늘인 비현실적인 인물과 강렬한 색채는 활기찬 붓놀림으로 자신감 있게 표현하였다. 흠잡을 데 없는 드로잉과 생동감 넘치는 인물은 형태에 대한 탁월한 이해로 완벽한 균형을 이루며, 바로크 대가의 독보적인 면모를 보인다. 이 그림의 성공으로 그는 37년간 활동하며 톨레도의 화성으로 영원히 남아 있다.

1830년, 200년간 교회 제단을 지킨 그림은 스페인 왕족에게 팔린다. 1875년 다시 매물로 나오는데, 미국 출신의 인상주의 여류 화가 메리 카사트는 대중과 교육을 위해 미국이 소장하기를 원했다.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보스턴, 필라델피아 미술관 등과 접촉하였지만 모두 거부하였다. 돌고 돌아 1906년 스페인 바로크 대가의 작품은 시카고 미술관의 품에 안긴다. 정작 원래 그림이 있던 교회 제단에는 복제본이 걸려 있다.

시카고 미술관에는 엘 그레코의 대작과 같은 해에 제작된 또 다른 명작이 있다. 물의 도시 베니스의 화가 틴토레토(Tintoretto, 1518-1594)의 <타르퀴니우스와 루크레티아>이다. 그림 앞에서 관람객은 벌거벗은 남녀의 모습이 몹시 궁금하다. 놀랍게도 그림은 고대 로마 왕정의 종말과 450년 공화정이 설립되는 역사적 사건이다.

기원전 509년경 루크레티아는 전쟁에 나간 남편의 무사 귀환을 기다리는 아름다운 유부녀였다. 로마 왕의 아들 타르퀴니우스는 그녀의 미모에 반해서 겁탈을 하였다. 그녀는 남편과 가문을 불명예로부터 지키기 위해 자결을 한다. 이 사건에 분노한 로마 시민들의 봉기로 새로운 공화정이 세워진다.

많은 화가들은 이 주제로 그림을 그렸다. 중세 암흑기 천년을 지나 르네상스 인문주의가 부활하며 예술적 표현 또한 자유로워지기 시작하였다. 화가들은 앞다투어 금기시되던 여성의 신체를 미적 표현을 빌어 공개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다. 권력을 가진 강한 남성이 여성을 겁탈하는 역사 이야기는 명분 있는 주제이다.

틴토레토는 베네치아 화파 특유의 격렬하고 극적인 화법을 보인다. 바로크 미술의 특성인 불안정한 사선 구도는 쫓고 쫓기는 긴박한 순간의 불안감을 고조시킨다. 몸싸움 중 베개와 조각 장식품은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고 침실은 엉망진창이다. 진주 목걸이는 끊어져 알갱이는 공중으로 흩어지고 바닥에도 널려 있다.

부드러운 천을 배경으로 움직임이 가득 찬 화면은 웅장하고 역동적이다. 비극적이고 폭력적인 순간은 강렬한 색상과 빛과 어둠의 극명한 대비로 생생하게 묘사하였다. 그는 대담한 구도와 파격적인 관점으로 당대 전통 회화에 도전한다. 뛰어난 색채 감각과 혁신적인 회화 방식으로 틴토레토는 명작을 남겼다.

두 화가 모두 베네치아 회화의 영향을 받았지만 화풍은 판이하게 다르다. 르네상스의 완벽한 균형미에서 벗어나 과장된 감정과 역동적 구성을 강조하였다. 엘 그레코는 왜곡된 형태와 색채로 감각적인 신비주의를 추구하였다. 반면 틴토레토는 강렬한 명암 대비와 격정적인 양식으로 감정을 극대화시킨다.

두 그림의 바탕은 성경과 역사이다. 내용을 온전히 알고 보면 원작은 관람객에게 더 생생하게 다가온다. 시카고 미술관에서 16세기 바로크를 이끈 두 거장의 명작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다.

이 아네스 미술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