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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February 19,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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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네스의 세계미술관 산책 10> 샤갈이 유리에 새긴 시카고 스카이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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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 미술관 7

시카고 미술관에는 아주 특별한 공간이 있다. 북적이는 입구를 지나 아스라한 푸른빛이 흐르는 긴 복도를 따라가 보면, 어느 순간 푸른 심연의 장소에 다다른다. 시카고 미술관에 영구 설치된 마르크 샤갈(Marc Chagall, 1887-1985)의 스테인드글라스 <아메리칸 윈도우 American Windows>가 자리한 곳이다. 이 창문은 1977년, 미술관 개관 100주년을 축하하는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마르크 샤갈 <아메리카 윈도 America Windows> 1977 Stained glass 244 × 978 cm

이 프로젝트는 단순한 기념 작품이 아니다. 미술관은 미래의 정체성을 새롭게 정의하려는 시도였다. 과거의 작품을 수집하고 보관하는 장소에서 벗어나, 대체할 수 없는 영구적인 설치 작품을 통해 공간 자체를 예술로 만들고자 했다. 건축적 공간 안에 빛 자체를 구현하는 방식에서 〈아메리칸 윈도우〉는 하나의 작품이자 하나의 환경이 된다.

미술관의 야심찬 프로젝트의 유일한 인물은 20세기 미술의 살아 있는 전설, 마르크 샤갈이었다. 샤갈은 러시아 유대인으로 태어나 파리에서 활동하다 나치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대표적인 이민자 예술가였다. 시카고는 1871년 대화재 이후 이민자와 노동자들이 다시 세운 도시이다. 파괴 이후의 회복이라는 이야기는 샤갈 개인의 삶과 도시의 역사 속에서 자연스럽게 겹쳐진다.

샤갈은 미술관의 초대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90세의 나이에도 여러 차례 시카고를 방문하며 도시의 풍경을 직접 관찰했다. 작품은 세 개의 구획, 여섯 개의 패널로 구성되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왼쪽부터 음악, 회화, 문학이 등장하며, 악보와 붓, 펜을 쥔 손들은 인간의 창조성과 기록의 능력과 가치를 상징한다. 예술이 문명의 부속물이 아니라 문명 자체가 인류의 토대임을 암시한다.

중앙에는 시카고의 스카이라인과 자유의 여신상이 보인다. 이는 미국 독립 200주년을 기념하는 동시에 도시의 역동성과 민주적 이상을 상징한다. 마지막 패널에서 연극과 무용은 가면과 춤추는 인물, 소용돌이치는 색채 속에서 전개된다. 예술은 더 이상 제도나 형식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로운 에너지로 표현된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창문 속 도시는 사실적인 풍경과는 거리가 멀다. 고층 건물들은 안정된 형태의 수직적 구조로 화면을 지탱한다. 반면 인물과 동물, 천사들은 중력을 무시한 채 공중에서 부유한다. 직선과 곡선, 구조와 환상의 대비는 현대 도시의 물질적 세계와 인간의 감성적 세계를 나타낸다. 그러나 이 둘은 충돌하지 않는다. 샤갈에게 문명과 인간은 대립의 개념이 아니라 조화를 이루는 공존이다.

샤갈이 선택한 색은 압도적인 푸른색이다. ‘샤갈 블루’라 불리는 이 색은 회화 전반에 반복되는 자유와 평화, 그리고 영원한 희망을 상징한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유대인 박해, 54세에 미국으로 망명하며 고국 러시아를 상실한 경험을 한 노년의 예술가에게 푸른빛은 세상과 다시 화해하기 위한 언어였다.

그는 60세 이후 본격적으로 스테인드글라스 작업에 몰두한다. 회화가 아닌 빛으로 존재하는 예술을 추구하기 시작한다. 그는 홀로 사라진 중세 성당의 신비로운 빛을 20세기에 되살린다. 30여 년간의 집념은 〈아메리칸 윈도우〉에서 완성된다.

그러나 이처럼 평온한 빛의 세계로 오기까지 샤갈은 긴 암흑의 시간을 통과해야 했다. 시카고 미술관은 그의 가장 비극적인 시기를 볼 수 있는 명작 을 소장한다. 샤갈은 기독교의 전통적 주제를 빌려 박해받는 유대인을 표현했다. 유대인의 고통은 외면받지만, 그리스도의 수난은 세상이 이해할 수 있다는 절박한 인식 속에서 그는 민족의 비극을 십자가의 이미지로 호소한다.

<하얀 십자가 처형> 1938 캔버스에 유채 154.62 cm × 140 cm

이 그림은 샤갈이 역사 앞에 증언자로서 남긴 가장 비극적인 자화상이다. 화면 중앙에는 유대교 기도 숄인 탈리트를 두른 예수가 하얀 십자가에 매달려 있다. 이는 구원자가 아니라 끝없이 희생되는 무고한 존재로서 박해받는 유대인을 상징한다. 불타는 회당과 약탈당하는 마을, 도망치는 난민들이 혼돈 속에 배치되어 1930년대 유럽의 반유대주의 폭력을 고발한다. 회백색의 차가운 색조는 직접적인 폭력 묘사 없이도 현실의 잔혹함과 시대의 비극성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이 그림은 나치의 폭력과 광기에 정면으로 맞선 시각적 선언문이었다. 동시에 샤갈 자신을 나치의 공공연한 표적으로 만든 결정적 계기였다. 그는 결국 나치를 피해 미국 뉴욕으로 망명했다. 그리고 고통을 기록하는 화가로 머무르기보다, 살아남은 자로서 세상과 다시 관계를 맺는 예술을 모색한다. 이러한 태도 변화는 캔버스에서 스테인드글라스로의 전환으로 이어졌다. 어둠을 그리던 손은 빛을 투과시키는 손으로 변모한다.

그 결실이 바로 〈아메리칸 윈도우〉다. 시카고의 스카이라인은 파괴 이후에도 삶이 계속된다는 조용한 선언이다. 샤갈에게 미국은 구원의 공간이었다. 시카고는 잿더미에서 다시 일어선 현대 도시의 상징이다. 작품은 개인의 생존 서사와 도시의 역사적 경험이 빛이라는 매체 안에서 결합되어 탄생했다. 고통에서 다시 살아난 샤갈 예술의 도착점이기도 하다.

샤갈은 97세까지 빛을 통한 화해를 추구했다. 유작이 된 독일 마인츠 성 슈테판 성당 스테인드글라스에는 유대인 학살을 넘어선 용서와 화해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레이크 미시간의 물빛과 겹쳐지는 〈아메리칸 윈도우〉의 푸른빛이 가득 찬 공간은 작은 성소이자 명상의 장소다. 희망의 기념비로 살아남은 자가 빛으로 써 내려간 고백록이기도 하다. 이 창문의 진짜 주인공은 도시도 예술가도 아니다. 그 빛을 통과해 서 있는, 지금 이 순간의 관람객이다.

<이 아네스 미술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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