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기에 브뤼셀 미술관
온 세상의 축제일, 크리스마스가 다가온다. 거리는 화려하게 변신하고 캐럴이 신나게 울려 퍼지며, 주님의 오심을 반긴다. 기독교 사상이 중심이 되는 서양에서 그리스도의 탄생(The Nativity)은 미술의 핵심 주제 중 하나다. 수많은 화가들이 명작을 남겼지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품은 플랑드르의 대가 피터르 브뤼헐(Pieter Bruegel, 1525–1569)의 〈베들레헴의 인구조사(Census at Bethlehem)>이다. 작품은 나폴레옹이 1794년 설립한 벨기에 브뤼셀 왕립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그림은 성경 루카복음 2장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다. 로마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호적 등록 칙령을 내리고, 만삭의 마리아와 요셉은 살던 갈릴래아 나자렛을 떠나 고향으로 향한다. 요셉의 조상 다윗의 마을, 유다 지방 베들레헴에 도착하지만 여관은 이미 만원. 방을 구하지 못한 부부는 마구간으로 향하고, 그곳에서 예수님이 탄생한다.
예수 탄생 전날의 베들레헴은 16세기 네덜란드 남부의 추운 겨울 풍경으로 대체된다. 나뭇가지에 걸린 해가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지평선을 향할 때, 부부는 고향에 도착한다. 긴 여정에 지친 만삭의 마리아는 눈도 뜨지 못한 채 나귀에 앉아 있고, 요셉은 긴 톱을 메고 호적 등록을 위해 여관 인구조사관에게 향한다.
여관 외벽에는 ‘만원’ 표시의 두 겹 녹색 화환이 걸려 있다. 조사관 앞에는 강추위 속에서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북적이며, 번잡하고 활기찬 마을 풍경 속 두 인물은 단지 스쳐 가는 익명의 방문객이다. 성 가족을 암시하는 단서도, 특별한 관심도 없다. 아이들이 놀고, 간이 술집에서는 술을 마시는 남자들이 있으며, 구걸하는 거지도 보인다. 브뤼헐은 수많은 인물들의 다양한 움직임을 통일시켜, 복잡한 화면을 일관성 있게 아우른다.
성경 이야기를 농민의 일상으로 재구성한 브뤼헐의 시각 언어는 그의 예술적 고백이자 기록이다. 평화롭고 정겨운 마을 풍경과 눈 덮인 길은 당대 농민의 핍박받는 삶을 은유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요셉이 향하는 여인숙의 인구조사관은 당시 네덜란드를 지배하던 스페인의 세금 징수원이며, 여관 외벽 붉은 독수리 문장은 스페인 펠리페 2세 합스부르크 가문의 문장이다. 나병, 소빙하기의 혹한, 과도한 세금, 종교적 갈등 등 당시 농민의 삶은 처참했다.
브뤼헐은 야만적 겨울 속 농민들 사이에 만삭의 마리아를 배치하며, 구세주 탄생을 기다리는 인간적 장면을 그린다. 마구간 주변 눈 덮인 화단에는 나뭇가지로 십자가를 꽂는 인물이 보인다. 이는 생활 속 종교와 역사적 맥락을 담아, 당대 현실과 농민의 암울한 미래를 기록하고 고발하는 장치다.
그림은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조감도(bird’s-eye view)로 구성되었다. 브뤼헐은 인간의 어리석음과 부도덕함을 조롱하거나 비난하지 않고, 담담한 이해와 연민의 시선으로 그린다. 자연과 인간, 종교가 조화를 이루는 그의 회화는 백과사전식 인물 묘사로 보편적 진리를 전달한다. 15세기 북유럽 사실주의와 고딕적 환상을 계승한 브뤼헐은 16세기 플랑드르 회화의 독자적 체계를 구축했으며, 이후 루벤스가 17세기 바로크의 화려함을 이었다.
브뤼헐 가문은 200년 동안 4대에 걸쳐 가족 공방을 운영하며, 브뤼헐 1세의 작품 40여 점을 다량으로 복제했다. 현재까지 13점이 발견되었으며, 서울 국립중앙박물관〈리히텐슈타인 박물관 명품전〉에서는 장남 브뤼헐 2세(1564–1638)의 복제본이 전시되어 큰 인기를 끌었다.
브뤼헐은 예술가이자 시대의 목격자였다. 혹독한 추위 속 마구간에서 인간의 몸으로 오시는 구세주를 묘사하며, 황폐한 동시대인들에게 위로를 전했다. 그의 화이트 크리스마스 이브는 화려하거나 소란스럽지 않고, 고요한 정적 속에 머문다. 가장 낮은 자리에서 익명으로 오신 주님처럼…
<이 아네스 미술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