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카고 미술관 5
시카고 미술관은 네덜란드 화가 빈센트 반 고흐(Vincent Willem van Gogh 1853-1890)의 명작 중 하나인 <침실>과 <자화상>을 비롯해 18점을 소장하고 있다. 고흐는 전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화가이다. 고흐는 생전에 1점의 그림만 팔 정도로 주류 화단과 대중에게 외면받았다. 헌신적인 동생 테오도 고흐가 죽은 지 6개월 후에 사망했다. 그런 고흐는 현재 거장의 반열에 올라 있다. 고흐는 어떻게 최고의 화가가 되었을까.
고흐의 위대한 명성 뒤에는 제수이, 테오의 아내 요안나 봉허(Johanna Bonge 1862-1925)가 있었다. 요안나는 돌된 아들과 고흐가 남긴 200여 점의 그림, 그리고 형제가 나눈 800여 통의 편지로 고흐를 불운한 천재 화가로 등극시켰다. 그녀는 훌륭한 마케터였다. 효과적이고 전략적인 계획과 헌신으로 고흐의 성공 신화를 이루었다.
요안나는 주류 미술계의 외면에도 끈을 놓지 않았다. 한편으로 고흐의 편지를 예술과 삶을 통합한 책으로 엮어 출간하였다. 그녀는 문학을 통해 고흐를 천재적인 예술가로 그려냈다. 예술로 고뇌하고 번민하는 열정적인 화가로서의 비전과 작품에 대한 대중의 이해를 도왔다. 그녀는 결국 미술계와 대중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고흐의 명성은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고, 그림 가격은 20배나 상승했다.
요안나는 뉴욕 미술계의 인정과 중요성을 잘 알았다. 그녀는 영어교사이자 번역가의 경력을 살려 4년간 뉴욕에 머물며 영어로 책을 출간했다. 1935년 뉴욕 현대미술관에 열린 전시회에는 10만 명이 입장하며 폭발적인 지지를 얻었고, 고흐는 범접할 수 없는 스타 작가로 부상했다. 고흐는 미국 경제대공황과 맞물리며 희망의 아이콘으로 비춰졌다. 미국 컬렉터들은 유럽이 세계대전으로 혼란했던 시기에 많은 작품을 수집했으며, 미국 미술관의 모더니즘 컬렉션은 풍요로웠다.
시카고 미술관의 자화상은 1887년에 파리 시기에 작업한 17점 중 하나이다. 40여 점의 자화상은 가난으로 모델을 구하기 힘든 상황에서 자신을 모델 삼아 색채와 기법을 연습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자화상은 새로운 색채 조합이나 붓 터치 기법을 마음껏 실험하는 연구실과 같았다. 동시에 화가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작업이기도 했다.
파리 시기는 인상파의 영향으로 색채가 점차 밝아지는 시점이다. 자화상은 짙은 바탕에 표현력 넘치는 붓 놀림으로 다채로운 색채를 사용했다. 밝은 색채로 작고 고르게 덧칠한 짧은 붓 터치는 쇠라의 점묘법에서 받은 영향이다. 쇠라의 냉철하고 과학적인 기법은 고흐의 손에서 자유롭고 주관적인 터치로 표출되었다.
강한 색상의 입자들로 가득 찬 화면에는 역동적인 고흐의 모습이 드러난다. 빨강, 파랑, 주황색의 눈부신 점들 속에서 고흐의 깊고 강렬한 초록색 눈빛은 관람객에게 고정된다. 고흐는 테오에게 쓴 편지에 “나는 성당보다 사람의 눈을 그리는 것이 더 좋아. 성당이 아무리 엄숙하고 웅장해도, 가난한 거리 여인의 영혼이라도 인간의 영혼이 내게는 더 흥미로워.”라고 하였다. 고흐의 눈에는 세상과 소통을 원하는 절실한 갈망과 고독이 담겨 있다.
고흐의 자화상은 단순히 자신의 얼굴을 그린 것이 아니다. 고통스러운 삶과 예술에 대한 끊임없는 열정이 담긴 자기 발견이자, 화가로서의 길을 잃지 않으려는 의지이다. 자화상은 고흐 예술적 고뇌와 철학, 그리고 정신적 변화가 담긴 내면의 기록물이다. 고흐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 어렵다고 말합니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지만, 자기 자신을 그리는 것 또한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침실 Bedroom in Arles> 1889, 캔버스에 유채화, 73.6 × 92.3 cm
파리 생활에 지쳐 환멸을 느낀 고흐는 강렬한 태양과 새로운 영감을 찾아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의 아를로 거처를 옮겼다. 아를의 밝은 빛과 색채에 강렬한 노란색이 더해지며 고흐의 독창적인 화풍이 확립되었다. 그는 노란 집으로 이사한 한 달 후에 그림을 구상했다. 예술가로서 처음으로 소유한 자신만의 집이었다. 그에게 집이라는 개념을 불러온 <침실>은 세 버전으로 제작되었다.
고흐는 벽을 장식할 그림 작업에 열정적이었다. 얼마나 몰입했는지 지쳐서 이틀 넘게 쉰 후 다시 그렸다.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 ‘벽은 옅은 라일락색, 붉은색 바닥, 노란 크롬색 의자와 침대, 레몬색의 베개와 시트, 붉은 피빛의 침대보, 주황색 화장대’로 색채를 묘사했다. 밝고 단순한 색채의 침실은 휴식과 평화를 상징하며, 고흐가 느낀 행복이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고갱을 기다리며 꾸민 열정적인 색채의 침실은 안전한 기지로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의 공간이다. 그러나 캔버스는 뒤로 후퇴하는 혼란스럽고 불안정한 관점의 구도이다. 결국 아를에서 고흐는 고갱과의 불화로 발작 상태에서 면도날로 자신의 왼쪽 귀를 자른다. 이 일로 병원에 수감된 동안 론강이 홍수로 범람하며 그림이 손상되었다. 테오의 권유로 두 번째로 제작한 그림이 바로 시카고 미술관의 침실이다.
고흐는 침실을 그린 아를에서 머문 15개월 동안 200여 점의 대표작을 쏟아냈다. 가장 열정적이면서도 격정적인 시기로 ‘해바라기’와 ‘밤의 카페 테라스’ 등 주옥 같은 명작이 탄생했다. 그러나 고흐는 다음 해 보리밭에서 스스로 가슴에 총을 쏘고, 테오가 지켜보는 가운데 37세로 사망했다. 고흐의 활동 기간은 10여 년으로 짧았지만, 유화 860점을 포함한 2천여 점의 작품을 남겼다.
고흐는 두터운 물감의 임파스토 기법으로 짧고 강렬한 붓 터치를 반복적으로 사용하여 역동적이고 생생한 질감을 표현했다. 대담한 색채에서 발산되는 격렬한 감정과 에너지는 20세기 미술의 방향을 제시했다.
고흐는 요안나가 없었다면 역사 속으로 사라진 화가였다. 요안나는 생전에 무명 화가 고흐를 사후 재평가하게 하고, 대중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불멸의 화가로 세웠다.
<이 아네스 미술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