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수도’ 넘어 ‘교육수도’ 설계하는 마에스트로,
원성수 전 공주대 총장을 만나다
겨울이라기엔 믿기지 않을 만큼 햇살이 따스하게 부서지던 12월 16일 오후, 국립공주대학교 캠퍼스는 학기말고사 시험 주간이라 고요하면서도 묘한 활기가 감돌았다. 충청권 교육의 심장부라 불리는 이곳 인문사회과학대학 연구실에서 원성수 전 총장(62세)을 마주했다. 그는 단순한 행정가가 아니었다. 4년의 총장 임기 동안 팬데믹이라는 전대미문의 파도를 넘으며 대학의 체질을 바꾼 혁신가이자, 평생을 강단에서 학생들의 눈빛을 읽어온 교육 철학자였다.
시카고를 비롯해 미 중서부 13개 주와 남미 전역의 독자들에게 이 인터뷰가 단순한 ‘한국 소식’이 아닌, 우리 자녀들의 미래를 비추는 거울이 되기를 바라며 그와의 긴 대화록을 펼친다. 그는 부드러운 미소 속에 교육을 향한 ‘송곳’ 같은 통찰을 숨기고 있었다.
거대한 역설: ‘씨앗 속의 사과를 보지 못하는 교육’
원 전 총장과의 대화는 한 편의 시(詩)와 같은 중국 속담으로 시작되었다. “사과 속의 씨앗은 셀 수 있지만, 씨앗 속의 사과는 셀 수 없다.” 이 한 문장은 현재 대한민국 교육, 특히 세종시 교육이 처한 딜레마를 관통하는 화두였다.
그는 현재의 교육 시스템이 아이들을 ‘숫자’로만 파악하려 든다고 질타했다. “우리는 아이들이 가진 무한한 가능성, 즉 씨앗 속에 숨겨진 수천 개의 사과를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성세대가 만든 획일화된 틀 속에 아이들을 가두고 있는 것은 아닌지 처절하게 반성해야 합니다.”
특히 그는 세종시 교육의 획일성을 강하게 비판했다. 아이들은 저마다 타고난 재능이 다르다. 어떤 아이는 수학에, 어떤 아이는 축구에, 또 어떤 아이는 예술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인다. 하지만 지금의 ‘평준화’라는 미명 아래 진행되는 교육은 이 뾰족한 재능들을 둥글게 깎아내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교육은 속담의 내용을 실현하고 증명하는 과정이어야 한다”며, 아이들의 잠재력을 폭발시킬 수 있는 ‘맞춤형 토양’을 제공하는 것이야말로 교육자의 소명임을 역설했다.
세종의 딜레마: 행정수도의 그늘, ‘중학교 절벽’
행정수도 세종. 대한민국에서 가장 젊고 역동적인 도시이자, 고학력 학부모들이 모여 교육열이 가장 뜨거운 곳이다. 그러나 원 전 총장이 진단한 세종 교육의 현실은 화려한 외관 뒤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세종시의 유치원과 초등학교 시설은 세계 최고 수준입니다. 학부모들의 만족도도 높죠. 하지만 아이들이 중학교, 고등학교에 진학할 시기가 되면 학부모들의 눈빛은 불안으로 바뀝니다.”
그는 이를 ‘중학교 절벽’이라 표현하고 싶어 하는 듯했다. 급격한 도시 팽창으로 학교는 늘어났지만, 그 안을 채우는 소프트웨어는 학부모들의 기대치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공교육 시스템에 대한 불신은 결국 학부모들을 사교육 시장으로 내몰거나, 아예 대전이나 서울로 이사를 고민하게 만든다. 실제로 세종시 인구가 40만 명 선에서 정체된 가장 큰 원인 중 하나가 바로 이 교육 불안 때문이다. 그는 “안전하고 깨끗한 시설만으로는 부족하다. 내 아이가 미래에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는 ‘확신’을 주는 교육이 부재하다”고 뼈아픈 진단을 내렸다.
AI 쓰나미 앞에서: “교사가 변하지 않으면 교실은 침몰한다”
화제는 자연스럽게 시대의 화두인 인공지능(AI)으로 넘어갔다. 챗GPT, 제미나이 등 생성형 AI가 지식의 판도를 뒤흔드는 시대, 그는 토마스 쿤의 ‘과학 혁명의 구조’를 인용하며 지금은 점진적 변화가 아닌 ‘패러다임의 수직적 전환’이 일어나는 시기라고 강조했다.
“과거 산업화 시대의 지식은 이제 유효기간이 끝났습니다. 어제 배운 지식이 내일이면 낡은 것이 되는 시대입니다.”
그의 우려는 학생보다 ‘교사’에게 향해 있었다. 아이들은 이미 디지털 네이티브로서 변화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만, 그들을 가르치는 교사 양성 시스템과 사범대학의 커리큘럼은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그는 “교사가 먼저 변하지 않으면 아이들의 미래 경쟁력을 담보할 수 없다”며, 교사 재교육 시스템의 혁명적인 변화를 주문했다. 단순히 태블릿 PC를 나눠주는 것이 디지털 교육이 아니라, AI 리터러시를 통해 기계를 도구로 부리며 창의성과 인간 고유의 감성을 지키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깊은 울림을 주었다.
K-에듀의 불편한 진실: ‘질문 없는 교실’과 중국의 공습
미국 오하이오와 텍사스에서 유학하며 글로벌 교육 현장을 직접 경험한 원 전 총장은 한국 교육의 ‘순위 중독’을 날카롭게 꼬집었다. 그는 오바마 대통령의 기자회견 일화를 꺼냈다. 한국 기자들이 침묵할 때, 중국 기자가 유창한 영어로 질문을 독점했던 그 장면은 여전히 우리에게 트라우마처럼 남아 있다.
“질문이 사라진 교실, 정답만을 강요하는 평가 시스템이 우리 아이들을 ‘벙어리 천재’로 만들고 있습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과학 기술 분야에서의 ‘차이나 쇼크’였다. 세계 대학 과학 랭킹 상위권을 중국 대학들이 휩쓸고 있는 현실을 언급하며,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가 의대 입시에 목매달고 있을 때, 중국은 기초과학과 공학에 천문학적인 투자를 하며 미래를 선점하고 있습니다. 10년 후가 두렵습니다.” 그는 한국 교육이 우물 안 개구리식 서열 싸움을 멈추고,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는 평가와 인재 양성 시스템으로 환골탈태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수월성과 평준화의 조화: “평등은 하향 평준화가 아니다”
교육계의 영원한 난제, ‘수월성(Excellence)’과 ‘평준화(Equity)’의 대립에 대해 그는 명쾌한 해법을 제시했다. 그는 “수월성과 보편적 교육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라고 단언했다.
세종시의 경우, 특목고나 자사고로 우수 학생들이 쏠리는 현상을 우려해 획일적인 평준화 정책을 고수해 왔다. 하지만 원 전 총장은 이것이 오히려 ‘역차별’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는 더 깊이 있게 배울 권리가 있고, 예체능에 재능이 있는 아이는 그 분야를 집중적으로 팔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세종시에 민족사관고 같은 명문고, 혹은 반도체 특화 과학고, 축구 전문 고등학교가 들어서지 못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는 학교별로 특색 있는 커리큘럼을 도입해 보이지 않는 선의의 경쟁을 유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국제적인 교육 과정인 IB(International Baccalaureate) 프로그램 도입을 주저하는 세종시 교육 행정에 대해 “행정수도의 위상에 걸맞은 최고 수준의 교육을 원하는 학부모들의 열망을 외면하는 것”이라며 강한 아쉬움을 표했다.
선생님을 다시 ‘등대’로: 행정 다이어트와 교권 회복
“과거에 선생님은 우리네 인생의 ‘등대’였습니다. 하지만 지금 그 등대 불빛이 너무나 희미해졌습니다.”
원 전 총장은 무너진 교권과 땅에 떨어진 교사들의 사기를 우려했다. 학부모들의 악성 민원, 쏟아지는 행정 업무, 그리고 승진에만 목매게 만드는 경직된 인사 시스템이 교사들을 ‘교육자’가 아닌 ‘행정가’ 혹은 ‘방어적인 직장인’으로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해법은 ‘행정 다이어트’와 ‘확실한 인센티브’다. 그는 대학 총장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교사들이 교육 본연의 업무에 집중할 수 있도록 불필요한 공문과 보고서를 과감히 없애거나 자동화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또한, 학교 폭력이나 악성 민원은 교육청이 전담하여 학교의 부담을 덜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아가 열심히 연구하고 가르치는 교사가 우대받는 문화를 만들어, 20%의 열정적인 교사가 학교 전체의 분위기를 바꿀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대학 총장의 혜안: “도시 전체가 학교다”
대학 총장을 역임한 그의 시야는 학교 담장을 넘어 도시 전체로 확장되어 있었다. 그는 세종시가 가진 풍부한 인적, 물적 자원을 교육에 활용하지 못하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세종시 주변에는 공주대, 고려대 세종캠퍼스, 홍익대, 한국영상대 등 훌륭한 대학 인프라가 즐비합니다. BRT로 20분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박사급 전문가와 첨단 실험실이 있습니다.”
그는 대학과 초중고를 연계하여 학생들에게 맞춤형 진로 교육과 심화 학습 기회를 제공하는 구체적인 로드맵을 제시했다. 또한, 세종시에 거주하는 수많은 은퇴 과학자, 고위 공직자, 전문가들을 ‘인력 풀(Human Resource Pool)’로 구성하여 방과 후 학교나 멘토링 프로그램에 투입하자는 아이디어는 무릎을 치게 만들었다. 이는 교사들의 업무 부담을 줄이면서 동시에 학생들에게는 교실에서 배울 수 없는 생생한 지식을 전달하는 일거양득의 전략이다.
세종, ‘바이링구얼 국제도시’를 꿈꾸다
인터뷰 말미, 그는 미주 독자들의 가슴을 뛰게 할 대담한 비전을 내놓았다. 바로 세종시를 ‘바이링구얼(Bilingual, 이중언어) 국제도시’로 선포하자는 것이다.
“해외에 계신 수많은 동포가 고국으로 돌아오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자녀 교육 문제 때문에 주저하죠. 한국에 돌아오면 아이가 ‘외국인’처럼 겉돌까 봐 두려운 것입니다.”
원 전 총장은 세종시가 과감하게 영어 상용화 교육을 도입하고, IB 프로그램과 같은 국제 표준 교육 과정을 공교육 안으로 끌어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통해 해외 인재들이 맘 편히 돌아와 정착할 수 있는 도시, 우리 아이들이 영어 때문에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세계 무대를 누빌 수 있는 도시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영어 교육 강화를 넘어, 세종시를 명실상부한 글로벌 행정수도로 완성하는 마지막 퍼즐 조각과도 같다.
인터뷰를 마치고 연구실을 나서는 길, 원성수 전 총장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그는 교육을 ‘망치’라고 표현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교육을 ‘기다림’과 ‘믿음’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 믿음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낡은 시스템을 깨부수는 망치가 필요함을 역설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는 미주 한인 사회와 세종의 학부모들에게 이렇게 전했다.
“어떤 직함이든 상관없습니다. 제게 주어진 소명은 우리 아이들이 가진 저마다의 씨앗이 거대한 사과나무 숲이 되도록 돕는 것입니다. 세종이 바뀌면 대한민국 교육이 바뀝니다. 그리고 그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시카고의 칼바람 속에서도 고국을 그리워하는 독자 여러분, 그리고 아이들의 미래를 걱정하며 밤잠 설치는 학부모 여러분. 여기, 교육의 본질을 꿰뚫고 혁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한 교육자가 희망의 불씨를 지피고 있다. 그의 비전처럼 세종시가, 그리고 대한민국이 ‘씨앗 속의 사과’를 세어보는 지혜로운 눈을 갖게 되기를, 그리하여 언젠가 여러분이 돌아올 그곳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육의 숲’이 되어 있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이가희 시카고한국일보 특파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