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형 KAIST 총장) 세상을 거꾸로 매단 ‘거인’의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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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IST 이광형총장

이광형 KAIST 총장이 그리는 인류와 기술의 평행우주

겨울답지 않게 포근한 날씨였다. 대전 구성동 교정 위로 내리쬐는 햇살은 겨울이라는 단어가 무색하게 따스했다. 지난 18일, 대전 KAIST 총장 공관에서 소박한 도시락 오찬을 함께 나눈 뒤, 우리는 찻잔을 앞에 두고 마주 앉았다. 창밖으로 비치는 정원의 고요함과는 대조적으로 내 앞에 앉은 이광형 총장(71세)의 눈빛은 여전히 대한민국 과학의 최전선을 향한 열정으로 번뜩이고 있었다.

그의 집무실 입구에 걸린 거꾸로 된 TV처럼, 이광형은 늘 세상을 뒤집어 보는 사람이다. 평범한 이들이 ‘어떻게(How)’에 매몰될 때 그는 늘 ‘왜(Why)’를 묻는다. 시카고의 매서운 바람을 견뎌내며 타지에서 삶의 터전을 일궈온 우리 동포들에게 이 ‘괴짜 총장’이 던지는 혜안은 단순한 지식의 전달이 아니라 우리가 나아가야 할 생존의 좌표이자 철학적 위로로 다가올 것이다.

질문의 무게, ‘QAIST’가 세상을 바꾸는 유쾌한 방식

이광형 총장의 경영 철학은 ‘QAIST’라는 한 단어로 압축된다. 그중에서도 그가 가장 강조하는 것은 첫 글자인 ‘Q’, 즉 질문(Question)이다. 그는 챗GPT가 세상을 뒤흔들기 훨씬 전부터 질문하는 인재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다. “세상은 질문에서 시작됩니다. AI 시대에 인간과 기계의 결정적인 차별점은 바로 인간의 질문 능력입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그의 목소리는 단호하다. AI는 주어진 질문에 답을 내놓는 도구일 뿐,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왜 이래야만 하는가?”라고 묻는 주체는 오직 인간뿐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기술을 사용하는 과정에서 불편함을 느끼고, 그 불편함에서 새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그것이 특허가 되고 인류 문명의 방향을 결정하죠”. 질문하기 어려운 이유는 세상이 이미 인간 주도로 운영되고 있기 때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문을 던지는 자만이 미래를 설계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KAIST 캠퍼스 곳곳에서 일어나는 ‘유쾌한 반란’은 바로 이 질문의 힘에서 싹트고 있었다.

카이스트 총장 공관에서 이광형 총장(사진 왼쪽)과 본지 특파원이 인터뷰를 하고 있다.

태평양을 건너는 ‘K-사이언스’, 뉴욕과 실리콘밸리를 품다

시카고를 포함한 미 중서부 13개 주와 남미 동포들에게 가장 벅찬 소식은 KAIST가 뉴욕과 실리콘밸리에 거점을 마련했다는 점이다. KAIST는 뉴욕대(NYU)와 조인트 캠퍼스를 구축하고, 이미 13개의 공동 연구센터를 운영하며 150명 이상의 연구진이 머리를 맞대고 있다.

이 총장은 이를 단순한 캠퍼스 확장이 아닌 ‘영토 확장’이라 부른다. “한국 대학의 미국 진출은 상징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이제 우리 학생들의 활동 무대는 한국에 갇히지 않고 글로벌하게 확대될 것입니다”. 서부 실리콘밸리에는 아이디스(IDIS) 김영달 사장이 기여한 캠퍼스가 자리 잡아 학생들의 인턴십과 창업 전진기지로 활용되고 있다. “레드우드 시티의 좋은 위치에 확보된 이 캠퍼스는 우리 학생들이 세계로 나가는 교두보가 될 것입니다”. 이는 한인 2, 3세 과학 인재들에게 새로운 기회의 문을 열어주는 프로젝트이기도 하다.

바이오 헬스케어의 게임 체인저, ‘의과학자’를 향한 고집

이 총장은 “과학을 아는 의사가 필요하다”며 과학기술의학전문대학원(과기의전원) 설립을 강력히 추진하고 있다. 이는 기존 의대 교육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뒤집는 발상이다. 현재 대한민국 바이오 산업의 세계 시장 점유율은 겨우 1%에 불과하고, 나머지 99%를 외국이 점유하고 있다는 뼈아픈 현실을 그는 직시한다.

“우리는 임상 진료는 발달했지만 산업 규모는 작습니다. 인류의 질병을 정복할 ‘바이오 헬스케어 엔지니어’를 길러내야만 이 판을 바꿀 수 있습니다”. 지난 정부에서 시작된 사업이 의료 파동으로 좌절되기도 했지만, 그는 희망을 잃지 않는다. “바이오 의료 산업을 포기할 수 없기에 결국 추진해야 할 일이며, 이는 시간문제일 뿐입니다”. 연구 개발의 출발점에서 의학자와 과학 기술자를 아우르는 인력을 지금부터 육성해야 한다는 그의 고집은 대한민국 미래 먹거리를 향한 절박함에서 나온다.

공학도의 가슴에 예술의 단비를, ‘KAIST 미술관’의 진심

차가운 0과 1의 세계에 사는 학생들에게 그는 미술관에 가라고 등을 떠민다. 최근 건립된 KAIST 미술관과 이승택 작가 등의 작품이 전시되는 갤러리들은 그의 이러한 ‘융합 철학’의 결과물이다. “예술과 과학은 창작이라는 관점에서 일심동체입니다. 남의 것을 흉내 내지 않고 항상 새로운 것을 추가해야 한다는 본질이 같죠”.

그는 예술적 직관과 인문학적 상상력이 공학도들에게 필수적인 생존 도구라고 강조한다. 조수미, 장한나, 지디(GD)와 같은 아티스트들을 교수로 영입한 것도 단순한 화제성을 넘어선 결정이다. “뇌 속에서 창의적 사고와 예술은 동일한 부분에서 작동합니다. 우리 학생들이 사회 리더가 되기 위해서는 인문학적 소양과 예술적 감성이 튼튼해야 합니다”. 과학기술을 더 잘하기 위해 음악과 미술이 필요하다는 그의 말은 공학 교육의 새로운 지평을 보여준다.

연구실에서 시장으로, ‘1랩 1창업’이 일구는 애국

“연구실 창업은 곧 애국입니다”. 이 총장의 신념 아래 추진된 ‘1랩 1창업’ 캠페인은 눈부신 성과를 내고 있다. 재임 5년간 약 500개의 창업이 이뤄졌고, 이 기업들의 5년 생존율은 90%가 넘는다. 최근 4년간 20개 회사가 상장되어 총 시장 가치 10조 원을 달성했다는 수치는 경이롭기까지 하다.

“논문에만 머물던 기술을 시장이라는 거친 바다로 내보내야 합니다. 창업은 개인적 보람을 넘어 국가적 공헌으로 이어집니다”. KAIST는 주변 친구들의 활발한 창업 활동과 학교의 강력한 지원 덕분에 창업하기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다. 그는 학생들이 학업 중에 다양한 시도를 해보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사회에 공헌하기를 바란다. 특히 미주 한인 상공인들과 KAIST의 첨단 기술력이 협력할 수 있는 지점을 찾는다면, 그것이 바로 글로벌 코리안 네트워크의 실질적인 시너지가 될 것이라고 그는 확신한다.

실패를 예찬하는 유일한 곳, ‘실패연구소’의 철학

KAIST에는 세계 어디에도 없는 ‘실패연구소’가 있다. 실패를 데이터로 축적하고 심지어 ‘실패상’까지 수여하며 실패의 가치를 재정의한다. “안전한 길만 걷으려는 한국 사회의 풍토 속에서 ‘화려한 실패’를 장려하는 문화가 연구 현장의 공기를 바꾸고 있습니다”.

실패를 두려워하는 청춘들에게 그는 실패를 학습의 기회로 삼으라고 주문한다. “실패로 인해 낙심하거나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더 큰 도약을 위한 배움의 계기일 뿐입니다”. 실패가 좌절의 이유가 아니라 필수적인 과정임을 제도적으로 인정한 이 연구소는 선도자(First Mover)를 꿈꾸는 대학의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고 있다.

비전으로 신뢰를 얻다, ‘모금의 신’이 된 총장

이광형 총장은 취임 후 KAIST에 역대급 기부 행렬을 이끌어내며 ‘모금의 신’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4년간 총 2,800억 원의 기부금을 모았는데, 이는 하루 평균 약 2억 원에 달하는 금액이다. 기업가들이 소중한 재산을 선뜻 내놓는 것은 KAIST의 미래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투자자들의 마음을 여는 비결은 명확한 비전 제시입니다. KAIST가 세계 일류 대학으로 발전할 것이라는 믿음을 주고, 기부자들이 자랑스럽게 느끼도록 하는 것이죠”. 그는 기부자들의 신뢰를 지키기 위해 원하는 사항을 실시간으로 실행하고, 명절 묘지 참배와 기일 방문 등 정성을 다하는 ‘예우’를 실천한다. 이렇게 모인 기금은 세계 10위권 대학 도약을 위한 핵심 자산으로 쓰이고 있다.

포스트 AI 시대, 인간다움이라는 마지막 요새

AI가 인간의 지능을 위협하는 시대, 이 총장은 역설적으로 ‘인간다움’을 강조한다. AI와 공존하는 사회에서 인간 고유의 가치는 결국 대체 불가능한 질문과 새로운 아이디어 창출 능력에 있다는 것이다. 그는 “세상은 질문에서 시작됩니다. AI 시대에 인간과 기계의 결정적인 차별점은 바로 인간의 질문 능력입니다.”라고 단언한다. AI는 주어진 데이터 안에서 최적의 해답을 내놓는 도구일 뿐,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왜?”라는 의문을 던지는 주체는 오직 인간뿐이기 때문이다. 이 총장은 “우리 자녀들이 갖춰야 할 역량은 AI가 하지 못하는 것을 하는 능력입니다. 미래의 인재는 AI보다 우월한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라며 교육의 방향성을 제시한다.

이러한 철학은 최근 KAIST가 단행한 파격적인 행보로 구체화되고 있다. KAIST는 2025년 12월 정기 이사회에서 국내 과학기술대학 최초로 ‘AI 단과대학’ 신설을 최종 의결했다. 2019년 설립되어 국내 최고의 연구 역량을 자랑하는 ‘김재철 AI대학원’의 성공을 발판 삼아, 이제는 학부 과정까지 아우르는 거대한 AI 교육 생태계를 구축하겠다는 의지다. 새로 출범하는 AI대학은 AI컴퓨팅, AI시스템, AX(AI 전환), AI미래 등 4개 학과를 통해 매년 300명의 핵심 인재를 양성하게 된다. 이는 단순히 기술자를 기르는 것이 아니라 AI 특이점 시대에 인류의 정체성을 새롭게 확립할 미래 전략가를 키워내겠다는 이 총장의 승부수다.

그는 미래의 교실 풍경 또한 완전히 달라져야 한다고 본다. “공부는 AI한테 하고, 선생님과는 질문하고 토론해야 합니다.”라며 지식 전달과 인간 중심의 상호작용이 50대 50의 균형을 이루는 수업 방식을 제안한다. 특히 그는 어린이 교육에서 ‘인간관계’의 중요성을 무엇보다 강조한다. “기계와만 지내는 아이들은 정신적 붕괴의 위험이 큽니다. 외로움과 힘든 순간에 의지할 수 있는 친구, 부모님과의 관계를 미리 구축해 놓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사람들과 잘 사귀고 여가 시간을 즐겁게 보내는 연습이 나쁜 길로 빠지는 것을 예방하고 멋진 삶을 만든다는 그의 말은, 기술의 정점에서 다시 ‘휴머니즘’으로 회귀해야 한다는 묵직한 이정표를 우리에게 제시한다.

시카고의 열정 위에 혜안의 울림을 더하며

오찬 후 이어진 긴 대화가 끝날 무렵, 공관 정원의 햇살은 더욱 깊어져 있었다. 이광형 총장은 마지막으로 조국을 위해 헌신하는 750만 재외동포들에게 따뜻한 격려를 전했다. 대한민국의 발전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 동포들의 힘이 합쳐진 결과라는 사실을 그는 거듭 강조했다.

“해외 동포들이 한국의 일자리 기회에 주저 없이 참여하고, 필요할 때 활발히 교류하는 시대를 열어가야 합니다. KAIST는 그들을 연결하는 구심점이 되겠습니다.” 실리콘밸리 캠퍼스를 한인 과학자들의 공간으로 활용하고, 해외 동포 학자들과의 교류를 활성화하겠다는 그의 약속은 든든한 희망의 전언이었다. 시카고의 매서운 바람 속에서도 뜨겁게 살아가는 동포들의 삶 위에 세상을 거꾸로 매단 채 ‘질문’을 던지는 이 거인의 혜안이 밝은 등불이 되어주길 응원한다.

<이가희 시카고한국일보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