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실질적으로 새 차와 다름없는 ‘제로킬로미터(주행거리 0km) 중고차’를 해외로 대규모 수출하면서 새로운 형태의 덤핑 우려가 커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방식이 사실상 국제 규제와 관세를 회피하는 꼼수라며, 각국과의 무역 갈등을 촉발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최근 중국과 해외 언론 보도에 따르면, 중국 내 주요 자동차 제조사들이 신차를 먼저 등록하고, 그 후 중고차로 분류해 수출하는 사례가 급증하고 있다. 이른바 ‘제로킬로미터 중고차’로 판매되는 차량들이 대표적이다. 심지어 중국 전기차 업체 리오토(Li Auto) 최고경영자는 최근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 같은 관행을 인정하기도 했다.
중국자동차딜러협회(CADA)에 따르면, 2024년 중국은 전기차를 포함해 총 43만 6,000대의 중고차와 상용차를 해외로 수출했다. 이 가운데 약 90%가 제로킬로미터 차량인 것으로 추정된다.
대만 난화대학교의 국제관계 및 비즈니스학과 쑨궈샹 교수는 이를 “은폐된 덤핑”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러한 방식은 중국 자동차 브랜드의 해외 유통구조와 가격 시스템을 교란시키고, 결국 브랜드 가치와 이미지에 악영향을 줄 것”이라고 경고했다.
중국 내 일부 딜러들은 제로킬로미터 차량을 중고차로 수출하면서, 중고차 수출에 적용되는 세금 환급을 노리는 사례도 적지 않다. 이렇게 세금을 절감하는 한편, 내수 시장 침체와 과잉 생산 문제를 해소하려는 의도다.
중국 자동차 업계는 이미 심각한 공급과잉과 내수 침체라는 이중고를 겪고 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최근 5년간 중국의 자동차 수출은 크게 늘었고, 저가의 중국산 전기차와 하이브리드 차량들이 유럽과 동남아, 중남미로 대거 진출하면서 현지 산업을 위협하는 덤핑 논란이 일었다.
이에 대응해 미국은 중국산 전기차에 100%의 고율 관세를 부과했고, 유럽연합도 중국산 전기차에 최대 45%의 관세를 매겼다. 그러나 중고차 형태로 수출되는 제로킬로미터 차량은 상대적으로 규제에서 자유로운 상황이다.
중국 공산당은 지난 2019년부터 중고차의 해외 수출을 공식 허용했고, 2023년에는 수출 규모가 27만 5,000대에 달했다. 이 중 60% 이상이 사실상 새 차 수준의 제로킬로미터 차량이었다.
2024년 2월, 중국 상무부 등 관련 부처는 ‘중고차 수출 관련 사항에 대한 통지’를 발표하며, 사실상 전국 모든 도시에서 중고차 수출을 전면 허용했다. 이후 제로킬로미터 중고차의 해외 수출은 더욱 급증했다.
이들 차량은 주로 러시아, 중앙아시아, 중동 등으로 흘러들어가고 있다. 특히 중국 서북부 호르고스 항을 통해 키르기스스탄, 카자흐스탄 등 저관세 국가를 경유한 뒤 러시아로 대량 반입되는 루트가 대표적이다.
러시아는 2023년, 이미 공식 딜러가 진출한 브랜드의 제로킬로미터 중고차 수입을 금지했다. 중국 지리(Geely), 체리(Chery), 창안(Changan) 등이 그 대상이다. 요르단 등 일부 국가도 중고차의 정의와 기준을 강화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업계 전문가들은 중국발 제로킬로미터 중고차 현상이 중국 자동차 산업의 구조적 문제를 드러낸다고 지적한다. 과잉 생산과 내수 부진이 수년째 지속되며 가격 인하 경쟁이 극에 달했기 때문이다.
올해 들어 중국 전기차 최대 업체인 BYD는 22개 모델을 대상으로 최대 34%의 대규모 할인 행사를 벌였고, 타 업체들도 뒤따라 가격을 내렸다.
하지만 이 같은 편법이 결국 중국 자동차 산업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우려도 적지 않다. 난화대학교 쑨 교수는 “제대로 된 사후 서비스가 없는 상태로 차량이 판매되다 보니, 소비자 불만과 브랜드 신뢰 하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또 “허위 판매 실적과 세금 보조금 악용 등 회색 산업 사슬이 형성되며, 산업 혼란과 금융 리스크로 번질 우려가 있다”고 경고했다.
중국 지방정부들도 이 같은 수출을 장려하는 분위기다. 광둥, 쓰촨 등 20여 개 성·시가 제로킬로미터 중고차 수출 확대를 공식적으로 지원하며, 추가 수출 허가, 세금 환급 신속화, 수출 인프라 투자, 해외 교류 확대에 나서고 있다.
쑨 교수는 “지방 정부들은 중앙정부가 설정한 GDP 성장 목표를 채우기 위해 이 같은 수출을 적극 장려하는 것”이라며, “중국의 정치 체제 특성상 중앙정부의 묵인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지적했다.
<심영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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