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복에 담은 외교의 철학’, 정사무엘이 설계하는 공감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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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한문화진흥협회 정사무엘회장

사단법인 한문화진흥협회 정사무엘회장

가을비가 유리창을 적시던 오후, 햇살 같은 사람을 만나다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하염없이 내리던 9월 24일 오후, 본지 특파원은 서울 서초구 방배동에 위치한 한문화진흥협회에서 정사무엘 회장을 만났다. 그가 들어서는 순간 창밖의 궂은 날씨가 만든 스산함은 순식간에 그의 존재감 뒤로 밀려났다. 마주 앉아 몇 마디 나누기도 전에 그의 이야기에 설득당하고 있었다. 마음이 환해졌다는 감상적인 표현보다, 그의 세계로 빠져들고 있었다는 고백이 더 정확했다. 마흔을 갓 넘긴 젊은 얼굴에는 소년 같은 미소가,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오는 문장들은 수십 년간 연마한 대가의 칼날처럼 단단하고 정교했다. 창밖의 빗줄기와 대조적으로, 그의 이야기는 따스한 햇살처럼 인터뷰 내내 마음을 환하게 밝혔다. 일과 사람, 그리고 세상을 대하는 그의 태도에는 억지로 꾸미지 않은 깊은 신뢰가 배어 있었다. 오늘만큼은 비 오는 날에도 햇살은 존재한다는 역설을 온전히 믿고 싶어졌다. 그는 단순한 문화사업가가 아니었다. 한 나라의 품격을 디자인하고, 세계의 마음을 움직이는 ‘문화외교’라는 거대한 판을 설계하는 아키텍트(Architect)였다.

문화, 외교의 심장을 관통하는 가장 부드러운 언어

한문화진흥협회는 무엇을 하는 곳인가. 섣부른 질문에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명료한 언어로 조직의 정체성을 규정했다. “공감 가능한 의전과 상징, 그리고 경험을 통해 세계인의 마음을 움직여 궁극적으로 한국의 위상을 바꾸는 플랫폼입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협회의 활동은 8개의 단단한 기둥 위에 세워져 있다. 문화 교류, 학술 포럼과 세미나, 글로벌 컬처 프로그램, 국내외에서 열리는 한복모델 선발대회, 세계 각국을 무대로 한 한복 패션쇼, 각국 외교 의전 설계, 그리고 한국의 정수를 체험하는 컬처럴 투어까지. 이 모든 활동을 관통하는 하나의 키워드는 바로 ‘공감’이다. “모든 것의 출발점은 상대 국가의 종교, 역사, 정치, 관습을 철저히 고려한 의전 설계에 있습니다. 한 나라의 국민이 ‘우리가 존중받고 있다’는 감각을 체험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문화외교의 첫걸음입니다.” 그의 말처럼 존중이라는 씨앗이 뿌려져야 비로소 공감의 싹이 튼다. 이 모든 섬세한 설계를 현실로 만드는 힘은 오랜 기간 축적된 100여 개국 이상의 대사 네트워크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프로토콜 운용 능력이다. 놀라운 것은 이 거대한 프로젝트가 상근 직원 11명의 민간 독립 운영 체제로 움직인다는 사실이다.

보이지 않는 설계도: 프로토콜, 심벌, 네트워크, 미디어
그가 말하는 문화외교는 눈에 보이는 화려함이 전부가 아니다. 무대 뒤에는 치밀하게 계산된 네 개의 축이 유기적으로 작동하며 거대한 톱니바퀴를 굴린다. 첫째는 ‘의전(Protocol)’이다.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의전은 행사를 돕는 부수적 업무가 아니라, 전략 그 자체입니다.” 상대의 역사와 종교, 관습을 존중하는 절차와 동선 하나하나가 모여 공감이라는 거대한 성을 쌓아 올린다. 둘째는 ‘심벌(Symbol)’이다. 국기나 전통의상 같은 국가적 상징을 상대의 정서에 맞춰 창의적으로 재해석하는 작업이다. 각국 대사들이 자국의 국기 문양으로 만든 한복을 입고 무대에 오르는 오프닝 세리머니는 그 대표적인 예다. 단순한 패션쇼가 외교적 메시지로 승화되는 순간이다. 셋째는 104개국과의 장기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구축된 ‘네트워크(Network)’다. 마지막 넷째는 ‘미디어(Media)’다. 행사의 기획 단계부터 리셉션, 콘텐츠 제작, 그리고 현지 인플루언서와의 협업을 통한 파급력 설계까지 아우른다. “이 네 개의 축이 하나의 무대 안에서 일관된 메시지로 작동할 때 비로소 외교는 딱딱한 정치의 언어가 아닌 마음을 움직이는 문화의 언어로 설득력을 얻게 됩니다.”

‘존중’이라는 이름의 번역: 10초의 장벽을 넘어서

문화 교류의 현장은 언제나 예측 불가능한 변수와 장애물로 가득하다. 음악, 복식, 심지어 작은 카피라이팅 문구 하나까지 나라별로 금기는 천차만별이다. 한식을 소개할 때는 할랄 이슈가, 전통 타악 공연에서는 금속성 음향에 대한 선호도 차이가, 한복을 입힐 때는 서구인의 체형과 동양 복식의 조화 문제가 어김없이 등장한다. 그는 이 모든 장벽을 ‘존중’이라는 열쇠로 풀어낸다. “첫 10초가 가장 중요합니다. 그 짧은 순간에 상대방이 마음의 빗장을 열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의 해결책은 놀랍도록 섬세하다. 이슬람 국가 여성을 위해 히잡을 대체할 우아한 ‘한국적 베일’ 즉 쓰개치마를 제안하고, 체형이 드러나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이들을 위해 당의나 원삼 디자인으로 기품 있게 몸을 감싸준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오프닝 무대에 각국의 ‘국기 한복’을 배치해 시작과 동시에 존중의 메시지를 강력하게 전달한다. 베트남에서는 한복 원단으로 그들의 전통의상인 아오자이를 재해석해 선물함으로써 두 국가의 상징을 하나로 엮어내는 감동적인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일부 정상급 의전에서는 상대국 영부인에게 한복 착용을 성공적으로 설득해, 그 자체로 역사적인 상징이 되는 순간을 만들어냈다. 이는 단순한 ‘현지화’를 넘어,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와 존중이 빚어낸 ‘번역’의 경지였다.

홀로 서는 외교, 후원 없는 무대의 미학
자본의 논리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시대, 그의 ‘무후원(無後援)’ 원칙은 시대의 흐름에 대한 가장 날 선 반기(叛旗)처럼 들린다. 정사무엘 회장은 지난 10여 년간 단 한 번도 기업이나 정부의 돈에 기대지 않았다. 그는 인터뷰 내내 단호했다. “후원은 반드시 대가와 요구를 동반합니다. 이는 콘텐츠의 공정성과 의전의 중립성을 훼손할 가장 큰 위험 요소입니다.” 상업적 논리나 정치적 입김에 콘텐츠의 영혼을 담보 잡히는 순간, 문화외교의 진정성은 증발해 버린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다.
그는 쉬운 길 대신 스스로 판을 짜고 무대를 세우고 주인공이 되는 길을 택했다. 물론 그 선택은 살얼음판을 걷는 것과 같은 재정적 리스크를 동반한다. 하지만 그는 다년 계약, 행사 포트폴리오 분산, 상시 전문 스태프 운영이라는 정교한 위기관리 시스템으로 그 위험을 정면으로 돌파한다. 무엇보다 그의 심장을 뛰게 하는 것은 ‘남의 잔치’를 대신 차려주지 않겠다는 예술가적 자존감이다. 스스로 가치를 창조하고 지켜내는 이 고독한 항해의 끝에서 그가 얻는 것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신뢰’라는 화폐다. 세계 각국의 외교 사절단이 그에게 보내는 절대적인 믿음은 바로 이 지점에서 비롯된다. 결국 그의 무후원 원칙은 단순한 재정적 독립 선언이 아니라, 문화의 가치를 그 무엇과도 바꾸지 않겠다는 가장 순수하고 강력한 선언인 셈이다.

행사가 끝난 뒤에 남는 것들에 대하여
“그래서, 행사가 끝나면 무엇이 남습니까?” 많은 이들이 던지는 질문에 그는 ‘지속 가능한 관계’라는 결과물로 답한다. 한문화진흥협회는 117개국 주한 대사단으로 구성된 외교 사절단 협의체(CDC)와 최초로 MOU를 체결한 민간단체라는 기념비적인 기록을 가지고 있다. 이는 일회성 행사를 넘어, 공동의 의제를 설정하고 함께 미래를 논의하는 파트너로서 인정받았다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이 강력한 합의 기반 네트워크는 ‘행사 이후’의 실행력으로 이어진다. 공동 의제 포럼, 문화·교육 프로그램, 고위급 인사의 방한 시 제공되는 전통 의전 패키지 등은 모두 이 네트워크를 통해 살아 움직이는 결과물이다. 그는 참여국 수의 증가, 공동 행사의 연속성, 그리고 상대국의 정책에 우리 문화가 긍정적으로 반영되는 사례 등을 통해 성과를 냉정하게 평가하고 관리한다고 덧붙였다. 화려한 막이 내린 뒤, 더 깊고 단단한 관계의 막이 오르는 것. 그것이 그가 설계하는 문화외교의 진짜 모습이다.

스물셋 청년의 꿈, 다음 세대의 외교를 그리다

그의 인생을 바꾼 결정적 순간은 스물셋, 우연히 만난 주한 코스타리카 대사와의 대화였다. “그분을 만나기 전까지 저는 그저 평범한 청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분과의 대화를 통해 세상의 지평이 열리는 경험을 했고, ‘프로토콜’이라는 세계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겪었던 그 강렬한 경험을 다음 세대에게도 선물하고 싶었다. 그래서 청년들이 현직 대사와 1:1로 만나 대화하며 “훗날 국제 무대에서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주고받는 ‘뉴스 앰배서더 아카데미’를 설계했다. 그의 꿈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앞으로는 AI 활용 능력, 미디어 리터러시, 크로스컬처 마케팅 교육을 통합해 외교, 기업, 문화 현장을 잇는 실질적인 커리어 트랙을 만들 계획이다. 이미 아카데미 출신 제자 중 외교관이 된 사례도 나왔다. 그는 거듭 강조했다. “모든 교육의 본질은 기술이 아니라,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는 ‘품격 있는 공감 능력’을 기르는 데 있습니다.”

아버지의 가르침, 그리고 한 사람의 결심

한 사람의 철학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그의 이야기는 아버지의 가르침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아버지는 제게 ‘10년은 네 마음대로 마음껏 해봐라’라고 말씀하시며 간섭 대신 기다림으로 저를 키우셨습니다.” 스스로 빚을 내고 스스로 갚는 과정을 통해 살아있는 신용의 가치를 배우게 한 실전 교육 역시 그의 단단한 자립심에 자양분이 되었다. 스물셋의 청년 정사무엘을 ‘공감 없는 외교와 문화는 교류가 아니다’라는 신념으로 이끈 코스타리카 대사와의 첫 만남, 그리고 그를 믿어준 아버지의 기다림. 이 두 경험이 오늘날 문화외교 설계자 정사무엘을 만든 뿌리였다. 그는 지금도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 코스타리카와의 상징적인 협업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한 사람의 굳건한 믿음이 어떻게 세상을 바꾸는지를 보여주는 가슴 뭉클한 서사였다.

한 청년이 연 공감의 외교, 세계로 번지는 한류의 두 번째 장

정사무엘 회장과의 대화를 마치고 빗속으로 걸어 나오며, 한 청년이 스스로 닦은 길이 어떻게 한 나라의 품격을 드높이고 세계인의 마음을 움직이는지를 목도했다. 문화외교는 거창한 구호가 아니었다. 타인의 역사와 관습에 먼저 귀 기울이는 겸손한 태도, 그것이 전부였다. “외교는 결코 AI가 대신할 수 없는, 가장 인간적인 영역입니다.” 그의 마지막 말은 깊은 울림으로 남았다. 진심이 담긴 공감은 때로 세상에서 가장 효율적인 설득의 기술이며, 상대를 향한 존중은 가장 빠른 성장의 언어다. 오늘 그가 정성껏 지어 올린 한 벌의 한복, 한 번의 섬세한 의전, 한 차례의 따뜻한 리셉션이 내일의 국가 간 신뢰를 만들고 새로운 제도를 싹 틔울 것이다. 비 온 뒤 땅이 굳고 하늘이 맑아지듯 그는 젊은 문화 전도사의 뜨거운 심장으로 한류의 영토를 넓히는 두 번째 장을 열고 있었다. 이제 세계는 한국을 더 깊이 사랑하게 될 또 하나의 이유를 갖게 되었다.

<이가희 시카고한국일보 한국 특파원>

[시카고 한인사회 선도언론 시카고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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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초구 방배동에 위치한 한문화진흥협회에서 정사무엘 회장과 본지 특파원이 인터뷰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