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은의 명화여행] ‘검은 피카소’ 장 미쉘 바스키아, 흑인 천재 예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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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미쉘 바스키아

Jean Michel Basquiat 1960-1988

장 미쉘 바스키아는 아이티 출신의 회계사인 아버지와 푸에르토리코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예술에 조예가 깊어, 어릴 적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바스키아를 데리고 여러 미술관과 전시회를 다녔다.

한 전시회에서 피카소의 게르니카 그림을 본 바스키아는 그때부터 화가의 길로 가기를 다짐했다고 전해진다. 7세 때 집 앞에서 공놀이를 하다가 큰 교통사고를 당해 비장을 떼어내는 수술을 하는 등 오래도록 병상에서 보냈는데, 그때 그의 어머니가 그레이의 해부학 책을 사줬다고 한다.

책에서 배운 인체의 해부를 자연스럽게 드로잉 해보면서 많은 드로잉을 연습할 계기가 됐다. 그러나 그 해 부모의 이혼으로 사춘기를 방황하며 보내던 그는 고교 때 디아즈라는 친구와 그래피티(거리의 낙서로 불리며 공공장소에 스프레이 페인트로 그림을 그리는 비주류 예술) 화가로서 뉴욕의 뒷골목 담벼락을 낙서로 도배시키곤 했다. 그것이 그에게는 일종의 반항 의식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었다.

바스키아는 나중에 성공한 후 한 인터뷰에서 “제가 가진 모든 기본적인 것들은 어머니가 주셨습니다. 제 예술의 원천은 어머니입니다.”라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바스키아의 삶과 예술에 지대한 영향을 준 이는 그의 정신적인 지주 어머니였다.

뉴욕 타임즈는 바스키아를 흑인 최초로 성공한 천재 아티스트이자 ‘검은 피카소’라고 극찬했다. 그는 흑인이자 히스페닉계의 미국인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최초의 화가였고, 유성과 같이 등장해 반짝이는 명성을 누렸다.

말 그대로 천재 화가였던 바스키아는 미술 작품들에 흑인들은 거의 그려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이를 시정하기 위해 종종 흑인의 얼굴과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 그로 인해 그의 작품 속에서 흑인을 표현한 그림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바스키아의 미술은 내용 면에서 본다면 노예의 역사, 인종차별주의, 흑인들의 정치에 관한 것들이 많은데, 확실히 백인 관람객들을 동요시키기 위한 의도가 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의 작품에는 왕관이 자주 등장하는데, 그 의도와 메시지는 인간에 대한 존경을 표시한다. 그의 그림에는 자유로운 낙서와 거침없는 붓놀림과 밝은 색채 속에 고독과 외로움이 담겨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래피티를 통해 뉴욕 현대미술관 앞에서 엽서나 티셔츠 위에 그림을 그려 팔면서 그만의 회화 세계를 구축한 바스키아가 이른 나이에 성공 가도를 달리게 된 데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앤디 워홀’이다.

바스키아는 앤디 워홀을 만나기 위해 그가 자주 들리는 단골 레스토랑 근처에서 자신이 그린 엽서와 티셔츠를 판매하면서 그가 나타나기를 기다렸고, 레스토랑에 들어가 식사하는 워홀에게 다가가 엽서를 10달러에 사주기를 간청했다. 그때 워홀은 대충 그린 그림이라며 사기를 거절했는데, 그때 바스키아는 “당신이 그린 그림도 그렇잖아요”라고 응수했다는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진다.
워홀은 그 식당에 갈 때마다 나타나는 바스키아를 눈여겨 봤고, 그의 위트와 천재성을 알아보고 자신의 팩토리 스튜디오에 자유롭게 왕래하도록 하는 등 그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의 즉흥적이고 원시적인 그림은 강한 에너지를 분출하며 그 당시 매너리즘을 앓고 있던 미술계에 신선한 자극을 줬고, 바스키아는 그야말로 혜성과 같이 순식간에 스타로 군림하게 된다. 이 때문에 그의 그림에 대한 수요가 엄청나서 스튜디오를 방문했던 수집가들은 반쯤만 그려진 바스키아의 미완성 그림들까지 사가곤 했다고 한다.

그러나 성공이 행복의 모든 것을 보장해주지는 않았다. 갑자기 유명해진 바스키아에게 갈등이 시작됐다. 그는 워홀과 동성 연애 중이라는 소문에 시달렸고, 코카인을 더욱 가까이하게 됐다. 앤디 워홀이 세상을 떠난 지 1년 후, 바스키아는 27세의 나이에 약물 중독으로 짧은 생을 마감하게 된다.

홍성은 작가
시카고 한인 미술협회 회장
미술 심리치료 전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