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ustav Klimt 1862-1918
구스타프 클림트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 자세히 알려진 것들은 별로 없다. 왜냐하면 클림트가 자서전을 쓴 적도, 인터뷰를 한 적도 없기 때문이다.
“나는 말하고 쓰는 일에는 재주가 없다. 특히 나 자신이나 작품에 관한 것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지극히 간단한 편지를 써야 할 경우에도 마치 뱃멀미를 걱정하는 사람처럼 공포에 사로잡히곤 한다. 그러므로 예술적인 혹은 문학적인 자화상은 기대하지 말기 바란다.”
“내가 어떤 사람이며,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런 일은 조금도 유감스럽지 않다. 나에 관해 알고자 하는 사람은 물론 화가로서의 나를 말한다. 중요한 것은 바로 그것뿐이므로 내 작품을 보고 찾아내면 될 것이다.”
그가 평소에 한 말과 알려진 가정 상황을 통해 다만 우리는 그의 성장 과정을 짐작할 뿐이다.
그는 1862년 7월 14일 빈 근교의 바움가르텐에서 7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체코 출신의 금박 세공사였다. 그가 나중에 금을 이용하여 모자이크 작업을 펼칠 때 아버지의 수공예품에 대한 기억이 크게 도움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또한 클림트는 오페라 가수인 어머니에게서 음악에 대한 열정도 물려받았다. 후에 천재 베토벤을 기념하는 위대한 벽화 작품을 만든 것도,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그가 1896년에 완성한 철학적 교향곡 3번의 노랫말은 그대로 클림트 그림의 이론이 된다)를 숭배했던 것도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음악에 대한 열정이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 클림트는 인류 영원한 주제라고 할 에로틱을 탐구하면서 억눌린 성적 욕망과 여성의 숨겨져 있는 관능성을 찬란한 황금빛 예술로 분출시켰다. 동시대의 프로이드는 그의 심리 분석을 빌어 성을 억압하는 사회 분위기가 예술적 통로로 대리 충족되어 발현되었다고도 했다.
클림트는 평생 혼인하지 않고 많은 여인들과 관계를 맺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많은 모델들과 관계한 데에는 그는 어쩌면 진정으로 안주할 여인을 찾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혹은 혼인하여 아기를 낳고 생활에 안주하는 것 자체가 스스로에게 부담되는 일이었을까? 클림트의 전기작가들도 그가 영원한 피터팬이 되고 싶어했다고 짐작할 뿐이다.
그것은 그가 오히려 사랑에 관한 한 이상주의자였음을 말해준다. 이상적인 사랑은 쉽게 오지 않는 것, 클림트에게는 이상적인 사랑을 나눌 만한 사람은 오직 한 사람, 에밀리 플뢰게라는 여인뿐이었던 것 같다. 플뢰게는 클림트와 늘 함께한 정신적 반려자였지만, 두 사람의 육체적 관계를 맺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사람들은 클림트의 명작 <키스>의 여주인공이 그녀였을 거라고만 짐작하고 있다.
플뢰게는 화가로서 같이 활동한 클림트의 동생 에른스트(28세의 나이로 결혼 1년 만에 사망)의 아내의 여동생으로서 클림트와는 사돈 관계였다. 동생의 사망 후, 클림트가 남은 가족의 후견인이 되면서 27년의 세월을 함께 보낸 여인이었다.
항상 60세까지 살고자 희망했던 클림트는 56세에 뇌졸증으로 쓰러져, 그해에 유행하던 스페인 독감으로 침상에 누운 자신을 스케치한 에곤 쉴레(클림트에게 재능을 인정받은 후배 화가)와 정신적 연인이었던 플뢰게를 바라보며 눈을 감았다.
플뢰게는 그의 마지막을 지켜주었고, 서로 주고받은 400여 장의 엽서와 편지들을 소각시켜 그의 비밀들을 지켜주었다. 그의 사후 14명의 여인들이 친자 소송 확인을 신청하였고, 그중 4명이 클림트의 자식으로 판명되었다. 그러자 플뢰게는 클림트에게 받은 유산을 이들에게 고루 분배하였다.
당시에는 외설로 여겨졌던 작품 내용들이 지금은 참으로 부드러운 낭만이 되었고, 그의 작품 앞에서는 인간의 육체에서 발하는 미묘한 숭고함을 느낄 수 있다. 가장 여성적이고 관능적인 사랑이 세상을 구원하리라는 클림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가 남긴 작품의 수는 250점, 드로잉은 3,000여 점이고, 그 중 3분의 1 정도가 그가 말년에 그린 아름다운 아테제 호수 주변을 그린 풍경화이다.
홍성은 작가
시카고 한인 미술협회 회장
미술 심리치료 전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