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dy Warhol 1928~1987
1950년대 중·후반부터 시작된 ‘팝 아트’란 단어가 암시하고 있듯이, 대중적이고 통속적인 것을 예술로 포용하려는 움직임을 일컫는 말이다. 산업사회에서 대중에게 소비되어질 목적으로 만들어진 제품을 주제로 하여 미술 언어로 풀어낸 것이다.
앤디 워홀은 체코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부모 밑에서 태어나 펜실베이니아의 피츠버그 카네기 공대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하였다. 그는 졸업 후 유명해지겠다는 일념으로 뉴욕으로 가서 티파니, 보그, 글래머 등의 패션 잡지사에서 10년간 디자이너로 일을 하였으나, 고상한 예술만을 중요시하던 당시의 화상들로부터 외면당했다.
앤디 워홀은 항상 디자인을 하면서도 유명해지려면 자신만의 특별한 뭔가가 있어야 함을 알았고, 자신만의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만들기 위해 흔하고 흔한, 그래서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무언가도 예술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앤디 워홀은 또한 미술품의 대량 생산을 최초로 시도한 작가이기도 한데, 작품을 대량 생산해서 많은 대중에게 전파시킬 수만 있다면 그것이 진정한 예술의 가치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단시간에 수십 장을 찍어낼 수 있는 실크스크린 판화 기법을 도입해 그가 선보인 작품은 산업 예술과 순수 예술의 경계를 무너뜨렸고,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이를 통해 예술은 거창한 것이 아니고, 소수의 전유물도 아니며, 많은 대중이 즐기고 향유할 수 있는 것이 곧 진정한 예술이고 문화라는 것을 일깨워주었던 진정한 작가였다. 그 시절 책의 삽화를 그리고 무대 디자인도 하고 미술관에서 전시회를 열 만큼 성공 가도를 달리게 되었다.
앤디 워홀은 자신의 나이나 배경들을 정확하게 밝히기를 꺼려했고, 또한 거짓으로 이야기 꾸미기를 일삼았다. 예를 들면 가짜 앤디 워홀을 무대에 세워놓고, 정작 자기 자신은 객석에 앉아 관객들이 열광하는 모습을 지켜보기를 즐겼다. 200여 편의 영화를 촬영하였고, 만화, 유명 배우 사진, 대중적 이미지를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구상하여 현대 미술의 아이콘이자 팝 아트의 대표 작가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심약한 성격의 소유자로 건강도 썩 좋지 않았다. 인형을 가지고 놀거나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였고, 딕 트레이시와 뽀빠이를 우상으로 삼았다. 그는 선천적으로 남성성을 부인하는 동성애자였으며 친구도 많지 않았다. 삐쩍 마른 몸매에 병약하기까지 해서 그는 자신의 외모에 평생 열등감을 느꼈으며, 피부색이 희미해지는 백반증까지 앓고 있어서 항상 햇빛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야 했다.
팝 아트로 알려지기 전까지 코를 성형하고 가발을 사용하는 등 자신의 외모를 팝 아트처럼 변모시키기를 좋아하였다.
유명해진 이후에는 피부 관리사를 두었고, 수십 종류의 화장품을 여행가방에 챙겨 다니기도 하였다. 지금도 그의 이름으로 향수와 화장품이 만들어지고 있다.
앤디 워홀은 아래와 같은 말들을 남겼다.
“나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싶다면 그냥 내 회화들과 나의 표면을 보기만 하면 된다.”
“회화는 너무 힘들다. 내가 보여주고 싶은 건 기계적인 것이다.”
“기계는 문제가 적다. 나는 기계가 되고 싶다. 당신은 그렇지 않은가?”
“나는 정말로 미래를 위해서 산다고 할 수 있다.”
“미래에는 모든 사람들이 15분 동안 유명해질 수 있다.”
일상과 예술을 적극적으로 해체시킨 작가 앤디 워홀, 할리우드 대스타 못지않게 엄청난 유명세를 떨친 최고의 예술가 였다.
그가 오늘의 젊은 예술가들이 닮고 싶어 하는 이유는, 대중문화의 흔한 사물들을 과감히 예술로 끌어올려 일상과 예술의 경계를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1961년부터 3년 동안 그는 미술사에 남을 기념비적인 작품들을 연달아 탄생시켰다. 작업실을 ‘팩토리’라 부르며 제품을 찍어내듯 작품을 대량 생산한 것도 이 시기였다.
하지만 1968년, 워홀은 자신이 쓴 극본을 거부당했다는 이유로 분노한 조현병 환자 솔라니스라는 여성에게 총격을 당했다. 두 발은 피했지만 세 번째 총알이 흉부를 관통해 구사일생으로 살아났고, 이후 그의 예리한 면모는 서서히 희미해졌다.
그로부터 수년 뒤, 58세에 담낭 수술을 받은 후 다음 날 페니실린 알레르기 반응이 악화되며 심장 발작으로 생을 마감했다.
앤디 워홀은 현대가 기계화·대량 생산·복제의 시대임을 누구보다 빨리 간파했고, 그 흐름을 과감히 예술로 승화시킨 독창적인 작가였다.
홍성은 작가
시카고 한인 미술협회 회장
미술 심리치료 전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