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ul Gauguin <1848-1903>
폴 고갱은 프랑스 출생으로, 세잔·고흐와 더불어 후기 인상파를 대표하는 화가이다.
그의 그림에는 열대의 강렬한 에너지가 넘친다. 타히티의 이국적인 풍경, 짙은 원색의 대비, 야자수·꽃·밀림, 바나나와 망고 같은 열대과일들, 그리고 「Ia Orana Maria(이아 오라나 마리아: 아베 마리아)」 같은 폴리네시아어 제목들이 그의 세계를 구성한다. 모두 뜨거운 태양빛 아래에서 피어난 고갱만의 격정적 창조물이다.
고흐가 일본 목판화에서 영감을 받았다면, 고갱에게 진정한 스승은 세잔이었다. 그의 그림에는 세잔 특유의 붓질, 색채, 분석적인 화면 분할이 녹아 있다.
1848년 파리 몽마르트에서 태어난 고갱은 한 살 때 가족과 함께 페루로 이주했다. 외가가 있는 이곳은 스페인 귀족이었던 그의 외조부가 정착했던 곳이기도 하다.
공화주의자였던 아버지는 루이 나폴레옹 정권을 피해 망명했으나, 마젤란 해협을 지나는 중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5년 후 가족은 프랑스로 돌아왔고, 어머니는 생계를 위해 삯바느질을 해야 했다.
1865년, 고갱은 상선의 견습 도선사로 전 세계를 항해했다. 하지만 1871년 인도에 머물던 중 어머니가 사망하고, 이듬해 선원 생활을 접고 파리로 돌아와 증권거래소에서 일하게 된다.
1873년에는 덴마크 출신의 지적이고 아름다운 여성 메테 소피와 결혼한다. 세계를 동경하던 몽상가와 현실적인 여성의 만남이었다.

증권 중개인으로서 성공한 고갱은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수집하며 그림에도 몰두했고, 살롱전에 입선하기도 했다.
특히 피사로를 만나면서 인상주의에 깊이 빠졌고, 1880년 제5회 인상파전에 참여하며 본격적인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는 세잔의 <나이프가 있는 정물>을 아껴 소장했는데, 생활이 어려워지자 아내가 다른 그림은 팔았지만 이 그림만큼은 남겨두고 싶어 할 정도였다.
그러던 중 1882년 프랑스 주식시장이 붕괴되며 그의 생계도 흔들린다. 결국 그는 전업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피사로와 상담한다.
자신이 화가로 성공할 수 있을 거라 확신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그는 결국 가족을 덴마크로 보내고, 화가로서 자유로운 삶을 선택한다. 가장과 아버지로서의 삶을 포기한 것이다.
이후 고흐와 함께한 아를에서의 두 달간의 동거도 고흐의 자해 사건으로 인해 끝이 난다.
고갱은 문명에 대한 염증과 예술에 대한 순수한 열망을 안고 파리를 떠나 남태평양의 타히티로 향한다. 그는 타히티의 자연과 삶 속에서 새로운 화풍을 모색하고, 이를 통해 경제적 어려움도 극복하고자 했다.
처음 정착한 마타이에아의 밀림 속 대나무 오두막에서 그는 원주민 소녀 테후라를 모델 삼아 타히티의 삶을 그리기 시작한다.
서구 중심의 회화에서 벗어나, 단순하고 본능적인 자유로 가득한 그림들을 남겼다.
특히 건강하고 따뜻한 모성의 이미지를 담은 여성들을 자주 그렸는데, 이는 어머니를 비교적 일찍 여읜 그의 개인사와도 연결된다.

타히티에서의 마지막 8년은 자유로우면서도 외롭고 고통스러웠다. 제국의 유산인 매독과 가난, 문명과의 단절 속에서도 그는 예술로 마지막 불꽃을 태웠고, 결국 1903년 55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그는 원시 자연 속에서 몸을 불사른, 혜성처럼 살다 간 자유인이었다.
1919년 발표된 서머셋 몸(William Somerset Maugham)의 장편소설 『달과 6펜스』는 폴 고갱의 타히티 섬에서의 생활에서 힌트를 얻어 소설화한 작품이다.
발표하자마자 “참된 진실과 예술적 가치를 추구했던 천재적인 화가의 일생을 그린 뛰어난 작품”이라는 평가를 얻었다.
제목에서의 ‘달’은 만져볼 수 없는 비범한 것, 즉 예술에 대한 주인공의 광적인 열의를 나타낸 것이고, ‘6펜스’는 주인공이 과감하게 던져버린 흔하고 값어치 없는 세속적인 욕망이다.
혜성 같은 자유는 예술가의 영원한 로망이다. 고갱의 타히티행도 아마도 이런 것이었으리라…

홍성은 작가
시카고 한인 미술협회 회장
미술 심리치료 전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