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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February 13,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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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은의 명화여행] 홀로코스트를 다룬 첫 독일 현대 미술작가 ‘안젤름 키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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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젤름 키퍼

Anselm Kiefer
1945년 출생, 현재 80세

안젤름 키퍼는 독일 출생의 화가이자 조각가로, 독일의 신표현주의를 대표하는 현대미술 작가다. 신표현주의는 회화의 순수성을 추구해 온 모더니즘에 대한 반발로 등장한 미술 사조로, 현대 예술이 어디에 서 있으며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지를 관객에게 극명하게 보여주고자 했다.

키퍼는 대학에서 법학과 프랑스어를 전공했으나 회화에 더 큰 흥미를 느껴 1966년부터 1972년까지 뒤셀도르프에서 미술을 공부했다. 그는 “너무나 독일적인 작가”로 평가받는다. 우리는 무엇을 기억할 수 있는가, 혹은 무엇을 기억해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며, 요셉 보이스 이후 최고의 독일 작가라는 평가와 함께 1980년대 세계 미술계의 거목으로 자리매김했다.

키퍼는 1969년, 자신이 유럽 곳곳에서 나치식 경례를 하는 장면을 촬영한 자화상 연작 ‘지배(Occupations)’를 발표해 서구 미술계에 큰 충격을 안겼다. 그는 금기를 깨고 제2차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를 정면으로 다룬 최초의 독일 현대미술 작가였다. 신화와 종교, 역사에 대한 성찰에서 출발한 그의 작품 세계는 세계와 우주 안에 홀로 서 있는 존재의 고독과 절망을 통해 희망을 가늠하는 주제로 확장돼 왔다. 현대사를 화폭에 담은 보기 드문 작가인 키퍼를 두고 미술 비평가 로버트 휴즈는 “그의 세대에서 미국과 유럽을 통틀어 가장 위대한 화가”라고 평가했다.

근대 미술가 중에는 의외로 법학을 전공했거나 법학 공부 중 미술가로 전향한 이들이 적지 않다. 인상파 화가 세잔과 드가는 법학을 공부했으며, 최초의 추상화가로 불리는 칸딘스키는 법학 박사 학위를 받고 법학 교수로 임명되었으나, 법학과 과학만으로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할 수 없다고 판단해 이를 포기하고 뒤늦게 미술을 전공해 성공했다.

키퍼는 한 인터뷰에서 “예술이 아니었다면 나는 살지 못했을 것이다. 예술은 내 궁금증에 대한 대답이 아니라, 대답에 대한 환상을 준다”고 말한 바 있다.

1970년대 유럽 미술계를 매혹시켰던 미니멀리즘과 개념미술 대신, 키퍼는 전통적인 회화의 길을 선택했다. 그는 철저하게 자기 민족의 정체성을 탐구하면서도 나치 독일의 오류와 폭력의 역사에서 비켜서지 않았다. 신화와 미술, 사회와 미술, 그리고 자기 자신과 미술의 관계를 고민하며, 자연을 새롭게 해석하고 그 과정에서의 사유를 화면 위에 여과 없이 드러내는 대담한 시도를 이어갔다. 그가 다룬 주제는 고대부터 나치 통치기에 이르기까지 독일과 유대인의 역사를 아우르며 강한 반향을 일으켰다. 독일의 신화와 지도자, 문학과 구약성경, 연금술과 카발라(유대교 신비주의), 그리고 20세기 독일 문화의 핵심 화두였던 바그너의 오페라 등은 그의 주요한 창작 원천이 되었다.

키퍼는 원색을 즐겨 사용하는 다른 신표현주의 화가들과 달리 검은색과 갈색을 주조로 삼아 절제와 참회의 분위기를 강조했다. 그의 작품 속에는 황량한 겨울 풍경과 신고전주의적 건축물의 웅장한 실내 공간이 기념비적이면서도 폐허처럼 묘사된다. 그는 모래와 짚뿐 아니라 아크릴 물감, 유리, 도자기 조각, 납, 각종 금속 재료를 사용해 캔버스의 물리적 실재감을 드러내고, 작품에 은유적이고 연금술적인 의미를 부여했다. 거대한 화폭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에서는 영웅적인 이미지 대신 개인적이고 어둡고 시적인 암울함이 짙게 깔려 있다. 작품 속 대지는 역사의 상처를 흉터처럼 간직하고 있으며, 낡은 건물들은 나치 시대 독일 문화유산의 폐허를 상징한다.

키퍼는 1992년 프랑스 바르작에 정착한 이후 약 26년에 걸쳐 35만㎡ 규모의 거대한 영지를 조성했다. 그는 수십 채의 건축물과 설치미술 작품을 세워 바르작 영지를 하나의 거대한 예술 공간으로 창조했다. 현재 이곳은 들판 전체가 하나의 작품과도 같다. 구겐하임 미술관이 키퍼의 바르작 작업실을 맡았으며, 향후 이곳은 키퍼의 작품을 영구 보존하고 연구하는 ‘키퍼 미술관’으로 조성될 전망이다.

암울한 시대를 앞서 예견한 작가 안젤름 키퍼의 작품은 오늘날의 현실과도 깊이 맞닿아 있다. 그의 작품은 독일의 어두운 과거사를 여과 없이 드러내며 가해자와 희생자, 죽음과 슬픔을 애도하고 관람자로 하여금 숙연함을 느끼게 한다. 키퍼에게 “내 존재는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질문은 평생 가장 중요한 화두였다. 그가 남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는 일은 이제 각자의 몫으로 남아 있다.

홍성은 작가
시카고 한인 미술협회 회장
미술 심리치료 전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