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원 목사(시카고언약장로교회 담임)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선포를 위해 출정하는 제자들을 교육하셨다. “어느 곳에서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거기서 나갈 때에 발 아래 먼지를 떨어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막 6:11, 마 10:4, 눅 9:5, 행 13:51, 18:6 참고). 보통 우리는 밖에서 집으로 들어갈 때 신에 달라붙어 집안을 더럽힐 수 있는 흙을 털어낸다. 그런데 그 반대로 누군가의 집에서 밖으로 나오면서 오히려 먼지를 터는 이 일은 무엇일까?
고대의 유대인 랍비들은 이방인들이 사는 지역을 방문하고 이스라엘로 돌아올 때 그곳에서 묻은 흙과 먼지를 다 털어냄으로써 거룩한 땅에 부정함을 들여오지 않으려는 의지를 보였다고 한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지시한 행위 또한 이런 맥락에서 자타(自他)가 모두 인지할 수 있는 문화적 공유를 전제하고 있다. 앞으로 내가 이동하는 땅과 지금 떠나는 그곳 사이에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단절과 불연속성의 ‘선 긋기’다.
하나님 나라의 은혜를 전달할 사명을 받아 축복하기 원하는 최고의 선의(善意)로 나아갔는데 그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하며 축복의 메시지 전달자를 야박한 거절로 모욕하고 배척했을 때 그것은 단지 사람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하시는 하나님을 문전박대 함이다. 하나님의 복을 발로 차버린 것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스스로 심판을 영접한 셈이 된다. 은혜를 거절하면 당연히 은혜 부재(不在)의 저주와 심판을 선택한 것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증거’라고 하는 것이다. 제자는 할 일을 다했다. 이제 그들은 하나님 손에 넘겨진다.
동시에 이것은 이 중차대한 사명을 계속 감당해야 하는 제자들을 지켜 보호하는 돌봄이기도 하다. 이런 행위는, 선의를 모욕으로 되돌려준 사람들에게 분노의 ‘뒤끝’을 보이는 옹졸한 ‘침 뱉기’처럼 보일 수도 있다. 노여움이 ‘먼지를 터는’ 마음의 동기라면 정말 그렇게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이때 발에서 털어내야 할 것은 오히려 그렇게 노여워 앙갚음할 수 있는 치졸한 감정의 먼지다. 내가 이 말씀을, 거부와 홀대가 불러일으키는 증오의 부정적 정서를 뒤끝으로 남기지 말고 깨끗이 털어버리라는 영혼 보호의 명령으로 생각하여 순종하려는 이유다.
실제로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저주하는 사람들에게 저주로 되받지 말고 오히려 축복하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명하셨다(눅 6:28, 롬 12:14). 그러니 발에서 먼지를 털어내라는 말씀을 침 뱉는 저주의 장려로 취급할 수 없다. 오히려 그렇게 저주하고 싶은 옹졸한 적개심을 싹 제거함으로써 영혼을 맑고 깨끗하게 지키라는 명령으로 받는 것이 옳지 않을까? 사랑의 중요한 특성 중의 하나가 ‘자기가 당했던 악한 일을 계속 생각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고전 13:15). 상대의 악행으로 내 마음에 새겨진 원한은 나를 병들게 만들어 더 큰 악을 재생산한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마음에 묻어 있는 이 정서적 상흔(傷痕)을 싹 잊어버리는 ‘신경 끄기의 기술’이 발의 먼지 털기가 아닐까! 이 말씀에 순종한답시고 정말 미운 사람에게 발의 먼지를 털면 안 된다. 대신, 조용히 내 마음의 앙금을 털어내고 갈 길을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