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카고 여성 리더와의 만남②] 허정자 수필가 “삶을 간호하고, 글로 치유하다”

128
허정자 수필가 <사진 윤연주 기자>

“삶을 돌보고, 마음을 어루만지는 일이 제게 주어진 길이었어요.”

반세기 넘는 세월 동안 시카고에 뿌리내리며 간호사이자 문인, 그리고 예술인으로 삶을 일궈온 이가 있다. 바로 허정자 수필가다. 그는 최근 본보와의 인터뷰를 통해 이민자로서의 깊은 삶의 여정을 담담히 풀어놓았다.

허 수필가는 1967년 학생비자로 미국에 처음 발을 디뎠다. 그는 간호학 연수를 위해 미국에 머물며, 선진 의료 시스템과 문화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회상했다. 연수를 마치고 귀국했지만, 결혼 후 남편의 유학을 따라 다시 미국에 돌아오며 본격적인 이민 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그는 시카고에서 33년간 소아과 간호사로 근무하며 수많은 아이들과 가족을 돌봤다. 생명을 살리는 일에 늘 최선을 다했지만, 때로는 어린 생명을 떠나보내야 했던 안타까운 기억도 함께 남아 있다. 허 수필가는 “부모 없이 홀로 입원한 아이들을 위해 플레이 테라피스트로서 정서적 돌봄까지 함께 했다”며 간호 이상의 역할을 감당했던 시간을 회고했다.

두 아들을 키우며 밤샘 근무를 이어가던 시절, 그는 아이들의 학교 행사나 견학에 빠지지 않았던 ‘엄마 간호사’이기도 했다. 허 수필가는 “그땐 힘들었지만, 돌아보면 가장 소중한 추억”이라며 웃어 보였다.

은퇴 후에도 그는 시카고한인간호사협회 회장으로 활동하며 의료 봉사에 앞장섰다. 특히 세계선교대회에서 2천여 명의 선교사들을 위한 건강검진과 치료 활동을 펼쳤다. 그는 “전문 인력의 연대가 만들어낸 의미 있는 봉사”였다고 말했다.

그는 간호사의 삶을 넘어 ‘문학’을 통해 또 다른 길을 열었다. 2004년 수필 전문지 ‘수필시대‘를 통해 등단한 그는, 2016년 ‘나의 수의‘라는 작품으로 서울문예창작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그는 “고교 시절 국어 선생님의 격려가 제 안에 남아 문학의 불씨로 되살아났다“며 “글쓰기는 자기 성찰과 회복의 시간이자, 또 하나의 간호였다”고 덧붙였다.

허 수필가는 시카고문인협회 회장을 맡으며 지역 문단의 성장을 이끌기도 했다. 그는 “문인회는 조용하지만 깊이 있는 소통의 장이었다”며 ”서로의 글을 나누고 토론하는 문인회의 분위기 속에서 배려와 우정이 싹텄다”고 말했다.

예술에 대한 애정도 각별했다. 어린 시절 발레를 배웠던 그는, 미국 정착 후 한국 전통무용과 다시 인연을 맺었다. 특히 살풀이춤에 매료되어 한국무용단 이사장으로도 활동했다. 그는 “전통 예술은 이민자 정체성을 지켜주는 힘이자, 한국 문화를 주류사회에 알리는 소중한 통로”라고 강조했다.

이민생활 5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는 글을 쓰고, 공동체 활동을 멈추지 않는다. 그 원동력에 대해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바로 시작”이라는 짧지만 단단한 철학을 전했다.

그는 이민의 길을 먼저 걸어온 이로서 “이 땅에서 무탈하게 살아올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덕분”이라며 “후배들도 말씀에 순종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길 바란다”고 조언했다.

<전혜윤 기자>

[시카고 한인사회 선도언론 시카고 한국일보]
1038SMilwaukeeAveWheeling,IL60090
제보:224.283.82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