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럽 영공 잇단 침범속 갈등 고조…”러의 ‘확전의 덫’에 말릴 우려”
(서울=연합뉴스) 임화섭 기자 = 러시아가 전투기나 드론 등으로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유럽 회원국들의 영공을 침범하는 도발 사례가 최근 잇따른 가운데, 유럽 측이 이런 침범이 재발하면 전력으로 대처하겠다며 항공기를 격추할 수도 있다고 러시아 측에 비공개로 경고했다.
러시아 측은 만약 나토가 러시아 항공기를 격추시키는 사태가 일어나면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맞받아 경고했다.
26일(현지시간)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영국·프랑스·독일의 외교관들은 모스크바에서 열린 비공개 회의에서 러시아 미그-31 제트전투기 3대가 지난주에 에스토니아 영공을 침범한 사건에 대해 우려를 러시아 측에 전달했다.
긴장된 분위기에서 진행된 대화가 끝난 후 이들은 이 사건이 러시아 지휘관들의 명령에 따른 고의적 전술이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러시아 측 관계자들은 자국 항공기가 에스토니아 영공을 침범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면서 나토를 시험할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또 폴란드에 러시아 드론이 침입한 다른 사건은 실수였다고 말했다.
러시아 타스통신에 따르면 주(駐)프랑스 러시아 대사 알렉세이 메시코프는 25일 프랑스 방송국 RTL 인터뷰에서 “만약 나토가 영공 침범을 핑계로 러시아 항공기를 격추시킨다면,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 그것 말고 일어날 다른 일이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그는 “꽤 많은 항공기들이 우발적으로 또 고의로 우리 영공을 침범한다. 그렇다고 격추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메시코프 대사는 또 유럽이 최근 드론 사건들에 대해 러시아의 관련성을 입증하는 “실체적 증거”를 제시하지 않았다며 “무엇보다, 우리는 누구와도 게임을 하지 않고 있다. 두번째로, 서방측이 우리를 여러 차례 기만했기 때문에 우리는 오로지 명확한 사실만을 믿는다”고 말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민간 인프라에 대한 공격의 강도를 높이고 미국의 우크라이나 지원이 흔들리는 가운데, 이달 들어 잇따라 발생한 러시아군의 동유럽 나토 회원국 영공 침범은 공동 방위를 위한 나토의 결의에 대한 전례없는 시험이 되고 있다고 블룸버그는 평가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측에 러시아가 점령한 모든 영토를 “유럽연합의 지원을 받아” 수복하라고 말했으며, 동맹국들이 전장에 보낼 수 있는 무기를 판매하는 것을 미국의 역할로 규정했다.
모스크바에서 열린 회의에서 유럽 국가들이 러시아 측에 전달한 입장은 이보다는 더 강경한 경고를 담고 있었다.
회의 도중 한 러시아 외교관은 유럽 외교관들에게 최근의 영공 침범 사건들이 러시아가 장악하고 자국 영토로 선포한 크림반도를 우크라이나가 공격하는 데 따른 대응이라고 말했다.
러시아 측은 이런 작전이 나토 지원 없이는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라면서 따라서 러시아는 유럽 국가들이 포함된 대립에 이미 관여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고 말했다.
러시아 측 관계자들은 회의에서 필기를 꼼꼼하게 했으며, 이 점으로 보아 나토의 입장을 상부에 상세하게 전달하라는 지시를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게 유럽 측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한 독일 정부 관계자는 이런 회의가 열렸고 대사들이 러시아 측에 침범이 중단돼야 한다고 말했다는 점을 블룸버그에 확인해 줬다.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는 25일 프랑스, 영국, 폴란드 측과 대응 방안을 조율중이라며 “필요한 모든 조치”를 지지한다고 말했다.
영국과 독일 정부의 공보 담당자들은 당시 회의에 대해 즉각 언급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고 블룸버그는 전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24일 프랑스 24 인터뷰에서 추가 침범에 나토가 어떻게 대응할 것이냐는 질문에 답변을 사양했다.
나토 조약 제4조는 위협이 감지됐을 때 회원국들이 협의를 하도록 하고 있다.
1949년 나토 창립 이래 이 조문이 발동된 것은 9차례밖에 없으며 그 중 2차례가 이번 달에 폴란드와 에스토니아의 영공이 침범됐을 때였다.
덴마크 정부 관계자들은 항공 교통 중단 사태를 연이어 일으키고 있는 드론 활동의 배후에 러시아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나토 조약 제4조 발동을 검토중이다.
다만 러시아 측은 이번에도 관련을 부인하고 있다.
페테르 훔멜고르 덴마크 법무장관은 25일 기자들에게 “분열을 일으키고 우리를 겁먹게 하려는 것”이라며 “하이브리드 공격에 따른 위협은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공격이 갑자기 증가한 것은 모스크바로부터의 적대행위가 서방에 대한 재래식 공격이 아니라 그 근원과 동기를 일부러 모호하게 만든 하이브리드 작전으로 이뤄질 공산이 크다는 일부 안보 관계자들의 견해와 부합한다.
상당수 유럽 지도자들은 단결해서 도발에 즉각 보복할 태세가 되어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러시아의 의도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파악할 수 없는 상태에서 긴장을 고조시킬 수 있는 조치를 섣불리 취하기 어렵고 이 때문에 유럽 국가들간의 단결을 유지하는 것은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러시아 제트기들을 격추시켜버려야 한다고 말한 도널드 투스크 폴란드 총리 등 나토 지도자들을 지지하는 뜻을 밝히면서도 미국이 이를 지원할 것이냐는 질문에는 “경우에 따라 다르다”고 말했다.
보리스 피스토리우스 독일 국방장관은 만약 러시아 항공기에 사격을 가한다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놓은 ‘확전의 덫'(escalation trap)에 나토가 말려들어갈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 등 다른 나토 지도자들은 러시아가 놓은 미끼를 물어서는 안 된다며 신중한 대응을 촉구했다.
딕 스호프 네덜란드 총리는 24일 뉴욕에서 한 인터뷰에서 영공을 침범하는 러시아 항공기의 격추를 지지한다면서 “러시아는 나토 영공에 들어오면 그런 일이 생길 수 있다는 점을 알고 있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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