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창 박종윤 회장] 90년의 거목, 스스로를 ‘아름다운 빚쟁이’라 부르는 노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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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추지 않는 엔진, 구순의 청년 기업가 (주)세창 박종윤 회장.

세창 박종윤 회장이 쏘아 올린 ‘초아(超我)의 봉사’

늦가을 차가운 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하던 11월 21일, 대전 롯데백화점 3층 ㈜ 세창 회장 사무실에서 마주한 그는, 고목(古木)이 아니라, 뜨거운 불꽃을 품은 용광로 같았다. 올해로 구순(90세). 남들은 인생을 정리하며 안락의자에 앉아 쉴 나이라고 말하지만, 박종윤 (주)세창 회장은 달랐다. 그의 눈빛은 청년보다 형형했고, 목소리에는 90년 세월의 풍파를 이겨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저음이지만 단단하게 울렸다. “나만큼 지역 사회의 도움을 많이 받은 사람이 없다”며 스스로를 ‘빚쟁이’라 낮추는 그 겸손함 뒤에는, 맨손으로 기업을 일구고 평생을 봉사에 바친 거인의 당당한 아우라가 서려 있었다.

멈추지 않는 엔진, 구순의 청년 기업가

박종윤 회장은 1935년생, 올해로 만 90세다. 그에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은 상투적인 표현이 아니라고 매일 증명해 보이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현역이다. (주)세창의 회장으로서 매일 아침 출근하고, 직접 결재 서류를 검토하며, 간부 회의를 주재한다. 가족들은 이제 그만 쉬셔도 된다며 말리지만, 그는 “네가 말려도 난 계속한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하며 매일 아침 신발 끈을 동여맨다.

그의 일상은 규칙적이고도 치열하다. 지금도 출퇴근하며 차 안에서 경영 구상을 다듬는다. 그는 이동 동선조차 회사와 집으로 단순화되어 있다. 이는 오로지 기업 경영과 봉사라는 두 가지 축에만 집중하겠다는 그의 의지다. 평생 휴가 한 번 없이 성실하게 살아온 그에게 ‘은퇴’란 단어는 사전에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90년이라는 세월 동안 멈추지 않고 돌아가는 이 거대한 엔진의 동력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자신을 믿고 따르는 직원들과 그가 짊어진 사회적 책임에 대한 무거움을 즐기는 ‘리더의 숙명’ 때문일 것이다.

대전 롯데백화점 3층 ㈜세창 사무실에서 박종윤 회장(사진 왼쪽)과 본지 특파원이 인터뷰를 하고 있다.

신용(信用)이라는 이름의 자본, 맨손으로 쌓은 세창의 신화

박 회장의 기업가 정신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키워드는 바로 ‘신용’이다. 그는 대전에서 “신용을 가장 잘 인정받은 사람”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하다. 1970년대 말, 한국 자동차 산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던 시기였지만, 엔진의 핵심 부품인 베어링만큼은 독일과 일본에 의존해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대기업조차 수익성을 이유로 국산화를 꺼리던 그때, 박 회장은 무모해 보이는 도전을 감행했다.

그는 직접 현대·기아차를 찾아가고, 미국의 대형 베어링 기업 ‘헤드럴모굴’로부터 30%의 투자를 이끌어냈으며, 일본 기업과도 50:50 합작을 성사시켰다. 당시 그가 가진 것은 기술에 대한 확신과 사람을 설득하는 진정성뿐이었다. 놀랍게도 당시 지역금융기관은 담보도, 보증도 없이 오로지 박종윤이라는 사람의 신용 하나만 보고 80억 원이라는 거금을 대출해 주었다. 이는 오늘날의 스타트업 신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그야말로 전설 같은 이야기다.

또한, 지금의 대전 롯데백화점 건물을 짓게 된 배경도 극적이다. 원래 특수금속 공장이 있던 자리에 둔산 개발로 인해 공장을 이전해야 하는 상황이 오자, 그는 백화점 유치를 결심했다. 당시 삼성도 실패했던 백화점 설립을 그는 “나 혼자 싸워서” 상공회의소와 지역 소매업계의 반대를 뚫고 성사시켰다. 롯데 측은 처음엔 관심조차 없었으나 박 회장이 판을 깔고 유치한 것이다. 롯데로부터 보증금을 받아 건물을 올렸고, 백화점 건물 자체는 세창의 소유로 남겼다. 이 모든 과정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 그의 뚝심과 그를 믿어준 지역 사회의 신뢰가 빚어낸 합작품이었다.

56년의 외길, 로타리 클럽과 ‘초아의 봉사’

박종윤 회장의 인생에서 기업 경영만큼,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바로 ‘로타리(Rotary)’ 활동이다. 그는 1969년 뉴대전클럽 창립회원으로 시작해 56년간 로타리안으로 살아왔다. 반세기가 넘는 시간이다. 그는 “내가 태어나 가장 잘한 일은 로타리에서 봉사한 일”이라고 주저 없이 말한다.

단순히 회원으로 이름만 올린 것이 아니다. 3680지구 총재, 한국로타리 장학문화재단 이사장 등을 역임하며 한국로타리의 역사를 함께 써 내려왔다. 그에게 로타리의 모토인 ‘초아의 봉사(Service Above Self)’는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삶의 방식 그 자체였다. 그는 로타리를 통해 “봉사란 단순히 돈을 기부하는 것이 아니라, 눈 기증, 장기 기증처럼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나누는 삶”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특히 국제로타리 활동을 통해 얻은 글로벌 마인드는 그의 기업 경영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일본 2840지구, 필리핀 3860지구 등 해외 로타리와의 교류는 그에게 국제적 감각과 비즈니스 네트워크를 동시에 선물했다. 봉사를 통해 맺은 우정이 비즈니스의 신뢰로 이어지고, 다시 그 수익이 봉사로 환원되는 선순환 구조. 이것이 바로 박종윤 회장이 보여주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정석이다. 최근 3680지구에서 ‘지구 초아의 봉사상’을 수상한 것은 그 긴 세월에 대한 당연하고도 값진 훈장일 것이다.

대능장학문화재단, 동문을 넘어 지역의 품으로

1998년, 대전고등학교 총동창회장으로 취임한 박 회장은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우리끼리만 잘 먹고 잘사는 동창회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진정 지역의 주인으로 인정받으려면, 지역의 어려운 이들을 도와야 한다.” 기존의 장학재단이 동문 후배들만을 위한 것이었다면, 그가 설립한 ‘대능장학문화재단’은 그 수혜의 폭을 지역 사회 전체로 넓힌 혁신적인 모델이었다.

재단 명칭에 ‘문화’를 넣은 것도 장학사업뿐만 아니라 문화예술과 YWCA 등 지역 시민사회 단체를 지원하겠다는 그의 의지가 담긴 것이다. 처음에는 선배에게 이사장을 맡겼으나 운영이 지지부진하자, 자신이 직접 이사장을 맡아 12년간 재단을 이끌며 기틀을 다졌다. 현재까지 모은 기금만 약 35억 원에 달하며, 박 회장 개인적으로도 10억 원 출연 약속을 지키기 위해 9억 5000만원은 이미 기탁하고 나머지를 채워가는 중이다.

그의 철학은 확고하다. “진정한 주인 의식은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책임을 다하는 것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대능장학문화재단을 통해 배출된 수많은 장학생이 이제는 사회 곳곳에서 리더로 성장하는 모습을 볼 때, 그는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 이는 학연과 지연이라는 좁은 울타리를 넘어, 지역 공동체 전체를 아우르는 ‘큰 어른’으로서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준다.

역사의 빚을 갚다, 3.8 민주의거와 피아노의 선율

박종윤 회장은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된 대전의 3.8 민주의거 세대는 아니다. 하지만 그는 역사의 현장에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정신을 계승하고 후원하는 데 누구보다 앞장서고 있다. 그는 “후배들이 보여온 3.8 민주의거에 역사가 기억할 수 있도록 꾸준한 활동과 민주화 정신을 높이 평가한다”며, 자신이 직접 겪지 않은 역사라도 올바른 가치라면 지키고 키워나가야 한다는 신념을 보여주었다.

최근 그가 3.8민주의거 기념회관에 피아노를 기증한 사연은 자못 감동적이다. 맹자의 ‘종(鐘)’ 이야기, 즉 ‘좋은 일을 후세가 계속 이어가길 바라는 상징’이라는 말에 깊이 공감하여 기증을 수락했다는 것이다. 그는 피아노 소리가 기념회관에 울려 퍼질 때마다, 후대들이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했던 선배들의 뜻을 기억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이는 2018년 3.8 민주의거가 국가 기념일로 지정된 것과 맥을 같이 한다. 박 회장에게 민주주의란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누군가의 희생을 잊지 않고 기억해 주는 ‘기억의 연대’다. 자신이 직접 피를 흘리지는 않았지만, 피 흘린 이들을 위해 피아노를 선물하는 그의 모습에서, 우리는 역사를 대하는 진정한 원로의 품격을 느낄 수 있다.

생명을 살리는 기부, 충남대병원과 의료 아너 소사이어티

그의 나눔은 교육과 역사를 넘어 생명을 살리는 의료 분야로까지 확장되었다. 그는 충남대학교병원 의료 아너 소사이어티(MHS) 위원장을 8년 넘게 맡으며 54명의 기부자와 함께 70억 원의 기금을 모으는 기적을 일궈냈다. 그 스스로도 13억 5천만 원 이상을 기부했으며, 목표인 20억 원을 채우기 위해 지금도 노력 중이다.

그가 대전의 병원에 이토록 큰돈을 기부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서울 병원이 무조건 좋을 것이라는 편견을 깨고, 대전의 위상을 높이고 싶어서”이다. 그는 기부금이 병원의 발전뿐만 아니라 돈이 없어 치료받지 못하는 어려운 환자들을 위해 쓰이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의 기부는 단순한 자선이 아니라, 지역 의료 자립을 위한 ‘마중물’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건강한 지역 사회가 되려면 병원이 바로 서야 한다는 그의 지론은, 고령화 시대에 우리가 새겨들어야 할 중요한 메시지다.

가장 든든한 파트너이자 동반자, 아내

인터뷰 도중 박 회장의 목소리가 가장 부드러워진 순간은 바로 아내 이야기를 할 때였다. 의사였던 아내는 보건소 근무를 그만둔 뒤, 남편의 사업 파트너로서 평생을 함께해 왔다. 현재 세창의 부회장 직함을 가지고 있는 아내는,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매일 롯데리아 매장으로 출근해 회계를 점검한다.

그는 “세종에 있는 큰 공장의 대표이사를 아내에게 맡겼었다”며 아내의 경영 능력을 높이 샀다. 남편이 앞에서 길을 뚫으면, 아내는 뒤에서 꼼꼼하게 살림을 챙기는 환상의 복식조였던 셈이다. 박 회장이 “나 혼자 한 일은 없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배경에는, 묵묵히 곁을 지켜준 아내의 내조와 헌신이 깊게 깔려 있다.

아름다운 빚쟁이의 고백, “받은 은혜는 끝까지 갚는다”

인터뷰 말미, 박 회장은 자신이 왜 평생을 베풀며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근원적인 답을 내놓았다. “나는 사회에 빚을 진 사람이다. 그 빚을 조금이라도 갚아야 한다.”. 그는 약혼식 비용이 없을 정도로 가난했던 아내를 위해 고종사촌 오빠가 대신 비용을 내주었던 고마움을 평생 잊지 않고 산다고 했다. 그 작은 은혜를 잊지 않고, 지금도 처 사촌오빠를 만날 때마다 술 한 병이라도 사들고 가 예를 다했다는 그의 일화는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그는 기업을 키우는 과정에서도 전 충청은행( 현재는 하나은행 ) 송희빈 행장 등 수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았음을 명확히 기억하고 실명까지 거론했다. 100% 신용대출과 지역 기관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지금의 세창은 없었을 것이라고 그는 단언한다. “나 혼자 잘나서 성공한 것이 아니다. 대전이, 그리고 지역 사회가 나를 키워줬다”. 이 철저한 자기 객관화와 겸손이야말로 박종윤 회장을 진정한 ‘어른’으로 만드는 힘이다. 그는 봉사할 때마다 마음이 편안하고 행복하다고 했다. 그에게 봉사는 희생이 아니라, 자신을 지탱해 주는 삶의 에너지이자 치유 과정인 것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박종윤 회장이 말한 ‘빚’이라는 단어가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세상 모든 성공한 사람들이 그처럼 생각한다면 세상은 얼마나 더 따뜻해질까. 그는 자신이 받은 도움을 잊지 않고, 그것을 몇 배로 불려 다시 세상에 돌려주고 있었다. 그것은 갚아도 갚아도 줄지 않는 ‘사랑의 빚’이자, 후배들에게 물려줄 위대한 ‘유산’이었다. 90세의 나이에도 “아직 갚을 빚이 남았다”며 신발 끈을 조여 매는 그가 있기에, 우리의 겨울은 춥지 않다.

박종윤 회장이 쏘아 올린 ‘초아의 봉사’라는 공은 이제 우리의 손에 넘어왔다. 그가 기증한 피아노가 3.8 기념관에서 아름다운 선율을 만들어내듯, 우리의 삶도 누군가에게 울림을 주는 노래가 되기를 소망한다. 구순의 청년, 박종윤 회장의 건강과 그의 아름다운 채무 이행이 오래도록 계속되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한다.

<이가희 시카고한국일보 한국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