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믿음으로 구원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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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국 박사(횃불재단 트리니티 목회학 박사 프로그램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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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산상수훈을 통하여 믿음과 구원에 관하여 살펴보자. 마태복음 5:3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했고, 10절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고 했다. 3절과 10절 모두 같은 말을 한다. 즉, 3절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주어지는 상은 “천국이다.” 10절도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에게 주어지는 상도 역시 천국임을 밝힌다. 본문과 같은 형태의 구조는 글의 처음과 마지막에 본문이 전달하고 싶은 내용의 핵심이 있다. 본문은 천국, 즉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말씀이다. 그러므로 3절과 10절이 본문의 중심 사상이고 4절에서 9절은 처음과 마지막 절이 언급한 중심 개념에 관한 부가 설명을 한다. 이런 형태의 구조를 문학 용어로 ‘INCLUSIO’(삽입)라고 한다.
이런 시각으로 마태복음 5:3을 살펴보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심령이 가난한 자가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뜻이다. 앞에서 언급한 구원의 순서와 관련하여 볼 때, “심령이 가난한 자”란 구원받은 자의 증거를 가리킨다. 구원의 증거는 예수 믿는 믿음이라고 했다. 심령이 가난한 것도 구원이 증거이므로 논리적 귀결에 의하면 믿음은 “심령이 가난하다”는 뜻이다. 심령이 가난하다, 즉, 마음이 가난하다. 무슨 의미인가? 이는 물론 돈이 없는 가난한 자를 일컫는 말이 아니다. 그렇다고 용기가 없는 자를 뜻하지도 않는다. 마음속에 물질이나, 명예욕, 권력에 대한 욕심을 가지지 말고 불교의 승려처럼 마음을 텅 비우라는 뜻도 아니다. 이 말은 ‘자신의 영적 공허함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즉, 자기 영혼의 무능함 또는 마음의 무능함, 마음의 공허함을 인정한다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뜻이다. 자기는 자기 죄로 인하여 영적으로 죽은 시체와 같으므로 이 사망의 음침한 곳에서 자기를 구원할 힘이 자기에게 전혀 없음을 아는 것이다. 이를 아는 자가 마음이 가난한 자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겸손할 수밖에 없다. 심령이 부자인 자는 자기 영혼이 능력으로 가득 차 있다고 생각한다. 자기 힘으로 자기를 구원할 수 있고, 절대자에게 가까이 갈 수 있다고 착각한다. 예수를 믿지 않는 세상의 다른 모든 종교인은 모두 이 범주에 속한다. 이들은 자기 영혼이 부자라고 생각한다. 가난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들 스스로 구원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모두 자기 영혼이 얼마나 공허한지, 얼마나 무능력한지 알지 못한다. 자기가 얼마나 비참한 죄인인지 깨닫지 못한다. 심령이 부자인 자는 모두 교만하다. 이들에게는 천국이 허락되지 않는다. 신학적으로 볼 때 이런 사람은 구원받았다는 증거가 없다. 이런 사람은 구원의 확신을 가져서는 안 된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마치 누가복음 18:13에 등장하는 세리와 같다. 성전 한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비참한 마음으로, 처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자비를 구한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오직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만 천국이 허락된다. 믿음이 있는 자에게 나타나는 가장 근본적인 현상은 자신의 무능력함, 즉 자신의 전적 타락을 인정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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