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은의 명화 여행]순수와 환상의 화가, 앙리 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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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nri Rousseau 1844-1910

루소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성인들을 위한 판타지 같다. 고되고 바쁜 삶 속에서 어릴 적 순수함과 판타지를 잃어버린 우리 모두에게 보내는 깨우침과 희망의 메시지다. 루소의 그림을 두고 당시 비평가들은 이렇게 말했다. “웃고 싶으면 이자의 그림을 놓치지 말고 구경하라.”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당시대의 비평가와 관객들의 눈에 그는 한낱 익숙하지 않은 그림을 그리는 아마추어로만 보였을 뿐이다.

그러나 『위비 왕』을 쓴 알프레드 자리(프랑스의 극작가 겸 시인)는 루소 작품에 담긴 에너지를 처음으로 간파하여 그의 천재성을 인정했다. “루소야말로 규칙이나 상식을 초월해 새로운 창작의 지평을 연 대가이다.” 사실과 환상을 교차시킨 독특한 루소의 작품들은 그가 살아 있는 동안 대부분의 사람들로부터 조소를 받았지만, 그의 사후 초현실주의 미학의 길을 열었고, 원시주의 미학을 개척한 선구자로 추앙받고 있다. 그의 작품에는 순진무구한 정신에 의해서 포착한 소박한 영상이 참신한 조형 질서에 따라 감동적으로 나타나 있어, 현대의 원시적 예술의 아버지라 불릴 수 있는 하나의 전형을 엿볼 수 있다. 1905년경부터 피사로, 피카소, 마티스, 아폴리네르, 칸딘스키, 브라크 등이 루소의 진가를 인정하였다.

앙리 루소는 1844년 프랑스에서 가난한 함석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음악과 데생에 재능을 보였던 그는 관세청의 말단 세관원으로 일하던 중 취미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루소는 주말마다 파리의 식물원, 숲 혹은 공원에 터를 잡고 이국적인 식물과 동물들을 관찰하고 이것들을 스케치북으로 옮겼다. 정식 미술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는 그의 유일한 멘토는 자연 그 자체였다. 프랑스 밖은 고사하고 파리 외곽으로 변변히 나들이 한 번 해본 적 없던 그는 자신이 직접 관찰한 것들과 잡지나 도감에서 본 이국의 이미지들을 결합해 전인미답의 판타지 세계를 창조했다.

그러던 그에게 화가로서 인생의 전환이 되는 계기가 찾아온다. 그의 나이 40세가 되던 1884년, 화가 펠릭스 클레망의 추천으로 루브르 등 유명 미술관에서 고전 대가들의 작품을 모사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었고, 비로소 루소는 아카데미 교육에 대한 콤플렉스를 만회할 수 있게 되었다. 1890년에 그린 <풍경 속의 자화상>을 보면 루소는 머리에 베레모를 썼고, 그의 옷깃에는 시민대학 미술 아카데미 과정을 수료한 파란색 기념 배지를 자랑스럽게 달고 있다.

이에 용기를 얻은 루소는 세관원을 사직하고 본격적인 화가의 길로 들어선다. 그러나 화가의 삶이 생각보다 그리 만만하지는 않아 루소는 생활고에 허덕이게 되고, 급기야 연극 대본을 쓰고 바이올린 레슨까지 나서게 된다. 그는 마흔한 살에 처음으로 살롱전의 문을 두드려봤지만 아마추어 냄새가 풀풀 나는 그의 그림은 거부당했다. 그러나 그는 실망하지 않고 이듬해에는 반(反)살롱전이라고 할 수 있는 앙데팡당전에 출품한다.

앙데팡당전의 도전은 이후 루소가 자신의 작품을 세상에 알릴 수 있는 주 통로가 되었고, 거의 매년 앙데팡당전에 출품했다. 작가로서의 입지는 날이 갈수록 탄탄해졌지만 그의 그림을 사주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의 작품에 대해 비난도 빗발쳤다. 그의 그림에는 명암법, 원근법 같은 회화의 ABC가 전혀 갖춰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색채는 온통 원색으로 가득했고 붓질도 거칠기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게다가 인물들의 포즈는 하나같이 경직돼 있었다.

이런 루소에게 화가 들로네의 어머니 소개로 독일의 화상 빌헬름 우데를 알게 되면서 1910년은 어느 해보다 많은 작품을 그렸다. 그는 그림에 계속 몰두하였으나 몸은 크게 쇠약해져 결국 패혈증으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다. 장례식에는 폴 시냑과 로베르 들로네를 포함해 7명이 참석했다.

루소가 사망한 이듬해 들로네가 루소 작품 47점으로 앙데팡당전에서 추모 전시회를 가졌으며, 1913년에 조각가 브랑쿠시와 자라트가 묘비를 만들고, 아폴리네르가 묘비명을 지었다. 그의 묘비는 1947년 고향으로 옮겨졌다.

그의 묘비명을 보면 절친한 친구 아폴리네르의 안타까운 마음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은 그 내용이다.

“멋진 루소, 우리 모두 자네에게 경의를 표하고 있네. 듣고 있지?
들로네 부부, 무슈 크발시와 나 이렇게 자네 앞에 서 있네.
우리들이 마련한 붓과 캔버스를 천국의 문을 통해 면세로 부쳐 줄게.
아마도 지금쯤 자넨 빛과 회화의 진실 속에서 성스러운 여가를 보내고 있을 테지.
언젠가 별, 사자와 집시를 쳐다보고 있는 나의 초상화를 그렸을 때처럼 말일세.”

루소의 몽환적인 그림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의 무의식 속에 현실을 도피하고 싶었던 심리가 꿈과 현실을 넘나들며 그림으로 표출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갑작스레 패혈증으로 66세에 세상을 떠나기까지, 길지도 않은 그의 인생에서 두 번의 결혼생활을 통해 얻은 두 아내를 비롯해 다섯 명의 아이들까지 먼저 떠나보낸 그에게, 강팍한 세상의 삶의 강을 끊임없이 건너면서 그가 믿게 된 것은 아마도 유토피아적인 그림을 그리면서 행복을 느끼고 위로를 받았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가 ‘삶은 한여름 밤의 꿈’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으리라 믿는다. 21세기에 이르러 세계 많은 미술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으며 영광의 꽃이 피고 있는, 생전에 주목받지 못한 변방의 화가, 앙리 루소의 ‘꿈’ 그림은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피카소, 고흐의 그림과 함께 위상을 드러내고 있다.

홍성은 작가
시카고 한인 미술협회 회장
미술 심리치료 전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