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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April 10,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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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 한인 개척자들 ⑥] ‘화평의 리더’ 이근무 전 세계한인무역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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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무 회장이 4월 3일 본보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사진 윤연주 기자>

한국과 미국 농업을 잇는 가교 ‘농업무역인’
▶무역·봉사·교육 잇는 실천의 리더십
▶신뢰와 원칙으로 일궈낸 50년의 기록

[편집자 주]
본지는 시카고 한인 이민사를 일궈온 주역들의 삶과 발자취를 기록하는 연재 기획 ‘시카고 한인 개척자들’을 이어가고 있다. 여섯 번째로는 시카고 무역인협회 회장, 세계한인무역협회(World-OKTA) 회장, 한미농촌연구회 회장, 시카고 한인회관 건립위원 및 한인회 이사, 한미장학재단 이사, 미중서부 통합한국학교 이사장, 시카고한인서로돕기센터 이사장 등을 두루 맡아온 이근무 회장이다.
1972년 시카고에 첫발을 디딘 한 청년이 어떻게 미 중서부 한인 경제계와 동포사회의 굵직한 버팀목으로 자리 잡았는지, 그리고 그가 평생 붙들어온 ‘한민족 디아스포라’의 정체성과 봉사의 철학은 무엇이었는지 그의 삶을 따라가 본다.

이근무 회장 <사진 윤연주 기자>

시카고 한인사회의 초창기를 지탱한 인물들을 거론할 때, 이근무 회장은 늘 앞에 나서기보다 뒤에서 공동체의 기초를 다진 인물로 기억된다. 한인회관 건립부터 무역인 조직, 교육과 장학, 차세대 교육과 정체성 문제에 이르기까지 그의 손길은 시카고 한인사의 도처에 깊게 스며 있다. 그러나 그 단단한 삶의 바탕에는 한국 현대사의 비극 한복판을 관통해온 한 소년의 시간이 놓여 있다.

이 회장의 뿌리는 깊고도 단단하다. 조선 제2대 왕 정종의 아들 덕천군의 후손인 그는 어린 시절부터 집안에서 ‘배달민족’이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 선비의 곧은 기개와 무관의 책임감, 그리고 나라를 생각하는 민족의식은 그와 가족의 삶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 있었다.

2021년 ‘제15회 세계한인의 날’ 기념 유공 포상에서 재외동포 사회 발전과 모국 과의 유대 강화에 기여한 공로로 이근무 회장이 국민포장을 수상했다. 사진 오른쪽 포장증과 훈장.

그의 어린 시절은 6·25전쟁이라는 시대의 비극을 정면으로 겪어야 했던 시간이었다. 피난길에 올랐던 가족은 한강다리가 끊기는 바람에 서울로 되돌아와야 했고, 그 와중에 부친은 집 앞에서 공산군에 의해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다. 이 회장은 그날을 떠올리며 “아버님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제 삶의 가장 큰 상실이었다”고 회고했다.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비극이었으나, 그 기억은 이후 그의 삶을 관통하는 책임감과 절제의 밑바탕이 되었다.

홀로 남겨진 일곱 남매를 일으켜 세운 것은 어머니 박명순 여사였다. 진주 출신인 어머니는 당시 보기 드문 신여성이자 간호사였고, 대한간호협회 부회장을 지낼 정도로 전문성과 리더십을 갖춘 인물이었다. 남편을 잃은 뒤에도 무너지지 않고 일곱 자녀를 품어낸 어머니는 누구보다 강인한 생활인이었다. 이 회장은 “아버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인생의 스승이 없었다는 점이 늘 아쉬웠지만, 그 빈자리를 어머니의 헌신이 채워주었다”고 말했다. 그의 삶을 지탱한 첫 번째 기둥은 바로 어머니였다.

◇ 고난 속에서 배운 ‘기초’와 ‘준비’의 가치

청소년기 역시 순탄치 않았다. 중학생 시절 결핵성 관절염 진단을 받아 다리 절단 위기에 처할 만큼 큰 고비를 겪었다. 그러나 간호사였던 어머니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고, 오랜 치료와 재활, 산을 오르내리는 수련 끝에 그는 기적처럼 다시 일어섰다. 이 시기의 경험은 훗날 그가 강조해온 ‘기초’와 ‘준비’의 중요성으로 이어졌다. 그는 스스로를 “기초가 부족했기에 오히려 더 기본을 닦으려 노력했던 사람”으로 돌아봤다.

대학 입시에 한 차례 실패한 뒤 그는 철학과 미학 서적을 파고들며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결국 그를 다시 현실로 이끈 것은 ‘남에게 기대지 않고 스스로 일구는 삶’에 대한 의지였다. 비록 잠시 멈춰 선 시간이었지만, 그 고뇌의 시기는 인생의 가치관을 세우고 내면을 단단히 다지는 밑거름이 됐다.
그렇게 그는 건국대 축산학과에 진학했고, 누구보다 성실하게 학업에 정진했다. 전공을 넘어 관련 분야까지 폭넓게 익히며 전국 농과대학 심포지엄 최우수상과 문교부 장관상, 건국대 총장상 등을 받았고, 한국 축산을 이끌 촉망받는 인재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근본과 기초, 기본을 중시하는 자신의 성향이 결국 농축산업의 길로 이어졌다고 돌아봤다. 이 회장은 “사람의 삶도, 사회도, 먹고사는 일도 결국 가장 기본적인 토대 위에 서야 한다고 믿었다”고 설명했다.

2023년 시카고한인제일연합감리교회 창립 100주년을 기념해 연방정부가 의회 의사록과 축하 선언문을 증정했다. 이 기록은 연방의회에 보존된다.

◇ 덴마크 유학 ‘농업무역인’의 사명 발견

대학 3학년 때 시작된 군 생활은 그의 삶을 한층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전방에서 인내와 성실을 익힌 그는 일반병으로 입대해 하사까지 진급하며 원칙과 책임의 무게를 몸소 체험했다. 그는 훗날 그 시절을 떠올리며 “군대 생활을 하면서 인내심을 많이 배운 것 같다”고 말했다. 이 경험은 이후 어떤 자리에서도 원칙과 책임을 중시하는 삶의 태도로 이어졌다.

제대 후 학업에 복귀한 그는 은사의 권유로 양계장과 농축산 관련 현장에 들어가 실무를 익혔다. 방학마다 현장 경험을 쌓아온 그는 복학 전후로 어려움을 겪던 회사들에 투입돼 생산과 판매, 운영 전반을 도우며 실력을 인정받았다. 특히 젊은 나이에 영업과 기획 업무까지 맡아 원칙 중심의 경영 감각을 익혔고, 친분이나 청탁에 흔들리지 않는 태도로 조직을 바로 세우는 데 힘을 보탰다. 그는 당시를 돌아보며 “가능하면 폭넓게 공부하고, 현장에서 직접 부딪히며 배우려고 했다”고 말했다. 단순히 학문만 하는 학생이 아니라 현장과 경영을 함께 체득한 실무형 인재로 성장했다.

그 실력을 바탕으로 이 회장은 1970년 덴마크 정부 장학생으로 선발돼 덴마크 마림농업대학에서 선진 농업 시스템을 익혔다. 당시 덴마크는 유럽에서도 선진 농업국가로 꼽혔고, 그는 현지 연수와 실습을 통해 한국 농업의 미래를 더 넓은 시야에서 바라보게 됐다. 단순히 학업을 이어가는 차원을 넘어, 한국 농업이 어떻게 세계와 연결될 수 있는가를 고민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그는 “그때부터 한국 농업을 더 넓게 봐야겠다고 생각하게 됐다”고 회고했다.

당시 그는 본국에서도 안정된 진로가 보장된 엘리트였으나, 시야는 더 넓은 세계로 향해 있었다. 먼저 시카고에 정착한 형 이근유 씨의 권유도 있었지만, 해외에서 한국 농업의 가능성을 넓혀보고 싶다는 뜻이 더 컸다. 결국 그는 이미 닦아놓은 기반을 뒤로하고 미국행을 택했다.

한국계 최초로 연방 상원의원에 당선된 앤디 김 의원과 함께한 이근무 회장.

◇ 앞치마부터 둘렀던 이민 초기

덴마크에서 선진 농업 시스템을 익힌 이근무 회장은 1972년 처음 미국 땅을 밟았다. 그리고 이듬해 시카고 정착의 길로 본격적으로 들어섰다. 그는 “더 넓은 세상에서 한국과 미국 농업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해보고 싶었다”고 회고했다. 먼저 정착해 있던 형 이근유 씨의 존재도 그의 선택에 힘을 보탰다.

그러나 미국 이민 초기의 현실은 이상보다 생존에 가까웠다. 전공을 살린 연구실이나 교육 현장이 아니라, 시카고 디번가 일대의 식당이 그의 첫 일터가 됐다. 형 이근유 씨와 함께 이태리 식당 ‘파파 밀라노’를 인수해 식당업에 발을 들였고, 연경루 만다린 식당을 18년간 운영하며 사업 기반을 다져갔다. 그는 “식당 경험은 전혀 없었지만, 모르니까 더 열심히 배울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당시 식당 뒤편에 거처를 정할 만큼 생활의 대부분을 가게에 쏟아부었다. 낮에는 손님 흐름과 재료, 운영 방식을 살피고 밤에는 다른 가게를 찾아다니며 무엇이 잘되는 식당을 만드는지 몸으로 익혔다. 특히 수익이 집중되는 시간대를 분석해 저녁 장사에 힘을 집중했고, 재료값이 오르더라도 음식의 질과 맛은 바꾸지 않았다. 그는 “퀄리티를 바꾸지 않는 것, 그게 제일 중요했다”고 말했다.

이런 원칙은 통했다. 단순한 식당을 넘어 유대인 고객과 지역 전문직 종사자, 교수, 언론인들이 찾는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식당은 자연스럽게 시카고 주류사회와 한인사회를 잇는 사교의 장이 됐다. 그는 “식당 주인이 되면 사람을 많이 만나게 된다“며 “결국 관계가 넓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식당의 성공은 가족의 삶도 바꿔놓았다. 한국에 있던 어머니와 형제들이 차례로 시카고에 오게 됐고, 어머니는 아들들을 돌보러 왔다가 결국 이곳에 머물렀다. 이 회장은 “어머니가 와 계시면서 우리가 큰 힘을 얻었다”고 말했다. 사업의 안정은 그에게 단지 개인적 성공이 아니라, 공동체 봉사의 바탕이 되는 경제적 토대이기도 했다.

2012년 여수세계박람회에 참석한 이 회장이 기념 촬영에 임했다. 앞줄 왼쪽 두 번째.

◇ ‘농업무역인’의 길

식당 운영으로 이민 초기의 기반을 다진 이근무 회장은 1975년부터 본격적으로 농업 무역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가 설립한 무역회사 오버시 머천다이징(Oversea Merchandising Corp.)은 미국 내 곡물 생산과 한국 수출의 흐름을 읽으며, 단순 원료 수출을 넘어 한국에서 곧바로 활용할 수 있는 반가공품 개발에 주력했다. 그는 “한국은 농산물 수입이 반드시 필요한 나라”라며 “원료를 그대로 보내는 것보다 한국에서 바로 활용할 수 있는 반가공품을 만드는 것이 중요했다”고 말했다. 옥수수는 주로 사료용으로, 콩은 두부와 두유, 콩나물 같은 식용 원료로 쓰일 수 있도록 길을 넓혔고, 그 일은 48년 가까이 이어졌다.

사업을 오래 이어갈 수 있었던 비결에 대해 그는 “열정과 신뢰, 성실함”을 꼽았다. “돈을 많이 버는 것보다 망하지 않는 사업을 목표로 삼고, 분수에 넘치는 일은 하지 않으려고 늘 조심했다”는 말에는 그의 경영 철학이 담겨 있다. 눈앞의 이익보다 오래 버티는 힘, 한 번 쌓은 신뢰를 끝까지 지키는 일, 그것이 그가 평생 붙든 사업의 원칙이었다. 그는 “전문성을 지키며 한 길을 걸어온 것이 지금까지 이어진 이유”라고 말했다.

반기문 UN 사무총장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및 한국정원 기념사업 행사. 왼쪽 첫 번째 이근무 회장.

이 같은 원칙과 전문성은 자연스럽게 한인 경제인 사회 안에서의 역할로 이어졌다. 그는 시카고 무역인협회장과 세계한인무역협회(OKTA) 10대 회장을 맡으며 활동 반경을 넓혀갔다. 세계한인무역협회 회장 시절에도 그의 방식은 분명했다. 그는 “사람들이 다 배경이 다르니까 그냥 회의만 해서는 하나가 안 된다”며 ”같이 지내며 서로를 알아야 한다고 봤다”고 말했다. 서로 다른 나라와 환경에서 자란 한인 경제인들을 하나로 묶기 위해 함께 먹고 자며 공통의 목표를 확인하는 연수 방식을 도입했고, 그 과정에서 조직의 결속력도 높아졌다. 그에게 ‘한상’은 단지 경제인의 네트워크가 아니라, 해외에 흩어진 한민족이 서로를 확인하는 또 하나의 공동체였다.

◇ 한인회관에 새긴 5년의 헌신

사업이 자리를 잡고 그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시카고 한인사회 전체로 향했다. 1974년 시카고 한인사회봉사회를 시작으로 동포사회와 가까워졌고, 한인 최초 변호사인 심기영 회장과의 인연은 한인회 활동으로 이어졌다. 그는 “한인회 정치에는 뜻이 없었지만, 필요한 일이 있으면 뒤에서 힘을 보태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뒤에서 공동체를 떠받치려 했던 그의 역할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 대목이 바로 한인회관 건립이었다.

2019년 한국 국회에서 열린 3·1절 기념 행사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당시 시카고 한인사회는 변변한 공동 공간 하나 없는 형편이었다. 동포들이 모일 장소도, 공동체의 구심점이 될 상징도 부족했다. 그는 1976년부터 한인회관 건립위원회 재무를 맡아 본격적으로 모금과 재정 관리를 책임졌다. 그는 “동포들이 한 푼 두 푼 모아준 돈이었기에 더 무겁게 느껴졌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는 5년 가까이 생업과 병행하며 모금 활동에 뛰어들었고, 그 과정에서 심기영 회장은 자동차가 전복되는 사고까지 겪었다. 그러나 멈추지 않았다. 체크북을 직접 관리하며 재정의 투명성을 지키려 했고, 수많은 오해와 시비 속에서도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그 결과 약 28만 달러를 모았고, 그 가운데 24만여 달러로 한인회관을 마련했다. 남은 자금 역시 관리위원회로 넘기며 정리했다. 그는 “그 돈은 동포사회의 돈이었기에 더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시카고 한인회관의 탄생은 단순히 건물 하나를 세운 일이 아니었다. 흩어져 있던 이민자들이 ‘우리 힘으로 우리 공간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사건이었다.

2004년 백두산 천지를 방문했다.

이 회장은 이후에도 여러 단체에서 회장과 이사장직을 맡았지만, 스스로를 앞세우는 방식은 끝내 택하지 않았다. “혼자 오래 붙들고 있으면 조직이 약해진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래서 늘 단임제를 강조했고, 다음 사람에게 자리를 넘겨주는 것을 당연한 책임으로 여겼다. 식당을 일굴 때도, 무역 사업을 키울 때도, 공동체의 회관을 세울 때도, 그가 끝까지 붙든 것은 결국 ‘신뢰’와 ‘원칙’이었다.

2001년 5월, 북한을 방문한 이근무 회장이 북한 미술의 거장 고 정창모 화백과 만수대창작사에서 만남을 가졌다.

그의 관심은 경제와 단체 운영에만 머물지 않았다. 한인 2세 교육과 정체성 문제에도 꾸준히 힘을 쏟았다. 시카고 통합한국학교 이사장으로 활동하며, 장학사업과 차세대 교육에도 깊이 관여했다. 그는 “미래 세대를 위한 교육과 한민족 정체성 함양이 중요하다”며 ”선배 세대가 그 길을 닦아야 후배 세대가 이어갈 수 있다”고 강조했다. 공동체가 오래가기 위해서는 경제적 성공만으로는 부족하고, 결국 교육과 정체성이 함께 가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독도 문제와 재외동포 정체성 문제에도 그는 꾸준히 목소리를 냈다. 독도수호국제연대 활동에 참여하며,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독도 아카데미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또 해외 한민족이 자신들의 역사와 위치를 잊지 않고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 아래 여러 민족·교류 단체 활동에도 힘을 보탰다. 그가 평생 강조해온 ‘한민족 디아스포라’라는 말에는, 해외에 살더라도 뿌리를 잃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기독 실업인과 전문인 모임인 CBMC(Christian Business Men’s Connection) 시카고 회원들과 함께한 이근무 회장. 첫줄 왼쪽 세 번째.

◇ “좋은 친구로 기억되길”

은퇴 후에도 그는 공동체 곁을 완전히 떠나지 않았다. 여러 봉사와 교육, 교류 활동 속에서 여전히 시카고 한인사회의 현재를 지켜보고 있다. 그가 말하는 삶의 정체성은 분명했다. 한민족 디아스포라, 농업무역인, 그리고 신앙인. 그는 그 세 가지를 삶의 중심축으로 삼아 여기까지 걸어왔다고 했다.

인생을 돌아보며 그가 특히 강조한 가치는 ‘화평’과 ‘절제’였다. 그는 평소 깊이 존경해온 인물로 도산 안창호를 꼽았다. 이 회장은 “도산 선생은 자기를 낮추고 양보하며 화평을 이루는 분이었다”며 “나 또한 그렇게 살기 위해 노력해왔다”고 말했다. 이 같은 말에는 평생 앞에 나서기보다 뒤에서 공동체를 떠받쳐온 그의 삶의 태도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2016년 3월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제48회 국가조찬기도회에서 기도하는 이근무 회장.

그는 또 “혼자 오래 붙들고 있으면 조직이 약해진다”고 강조하며 단임제와 세대교체의 중요성을 거듭 밝혔다. 공동체의 자리를 다음 사람에게 넘겨주는 일 역시 지도자가 져야 할 책임으로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그의 리더십은 ‘앞장서는 리더’보다 ‘이어주는 리더’에 가까웠다.

후배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을 묻자 그는 두 단어를 꺼냈다. “준비(Preparation)와 집중(concentration)“이었다.
그는 “세상 살면서 모든 걸 준비하고 집중해야 한다”며 “기초 없이 살면 오래가지 못한다”고 말했다. 또 도산 안창호의 ‘일기일능’ 정신을 언급하며, 누구나 자기 분야에서 능숙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자기 일을 제대로 할 수 있어야 어디서든 당당하게 설 수 있다”는 말은 그가 평생 붙들어온 삶의 원칙이기도 했다.

조태헌 작곡·이근무 작사의 재외동포가.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지 묻자, 그는 “좋은 친구로 기억되기를 바란다”며 “열심히 살았던 사람으로 남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답했다.

전쟁과 상실, 이민과 사업의 시간을 지나온 그는 무역인으로, 공동체의 실무자로 긴 세월을 걸어왔다. 시카고 한인사회의 기초를 다지고 공동체의 방향을 붙들어온 그의 삶은 개인의 성공담을 넘어 한 세대의 개척사에 가깝다. 그가 남긴 진정한 유산은 화려한 직함이 아니라, 그가 평생을 통해 증명해 온 신뢰와 책임, 그리고 화평의 태도다.

<윤연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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