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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esday, April 7,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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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 한인 개척자들] 5. 김윤태 시카고한인문화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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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태 시카고한인문화원 이사장이 지난 3월 26일 본보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사진 윤연주 기자>

의사에서 법조인으로… ‘끝없는 도전’
▶세대를 잇는 문화의 반석을 다지다

[편집자주] 본보는 시카고 한인사회의 기틀을 닦은 개척자들의 발자취를 기록하는 ‘시카고 한인 개척자들’ 연재를 통해 공동체의 뿌리를 되짚어보고자 한다. 그 다섯 번째 순서로 시카고한인문화원 김윤태 이사장이 걸어온 여정을 소개한다.
김 이사장은 30년 넘게 방사선 종양학 전문의로 헌신한 뒤, 환갑이 넘은 나이에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며 멈추지 않는 도전의 삶을 실천해 왔다. 또 시카고한인문화원 회장을 여러 차례 연임하며 조직의 내실을 다지고, 차세대를 위한 문화적 토양을 일구는 데 앞장서 왔다. 이번 기사에서는 김 이사장의 80여 년 삶을 따라가며 시카고 한인사회의 문화적 성장과 그가 공동체를 위해 쌓아온 발자취를 돌아본다.

덕수초등학교 5학년 시절, 남대문도서관 정원에서 찍은 기념사진.

김윤태 이사장의 어린 시절은 격동의 시대 한가운데 있었다. 1944년 서울 서대문구에서 태어난 그는 해방 전후를 지나 한국전쟁을 겪으며 성장했다. 삼남삼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난 그는 집안의 기대와 관심 속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구한말에 태어나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의 전신)를 졸업한 뒤 공직에 몸담았던 인물이다. 완고하면서도 성실했던 아버지의 삶의 태도는 자연스럽게 자녀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전쟁의 기억은 어린 김윤태에게도 또렷하게 남아 있다. 부산으로 피난을 갔던 시절, 누나와 함께 목욕탕에 갔다가 길을 잃었던 일은 지금도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비슷한 모양의 집들이 늘어선 낯선 골목에서 방향을 잃은 어린 소년은 순간 ‘이러다 거지가 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을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거지가 되려면 깡통이 있어야 하는데, 그걸 살 돈이 없더라”며 웃어 보였다. 다행히 누나를 곧 찾으면서 어린 시절의 해프닝으로 남았다.

◇의학과 법 사이에서 꿈을 키우던 소년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 다시 서울로 돌아온 그는 평범하면서도 활기찬 학창 시절을 보냈다. 김 이사장은 “공부에만 매달리는 학생이라기보다, 방과 후면 곧장 밖으로 나가 친구들과 어울리며 수영하고 자전거를 타는 등 활동적인 시간을 더 즐겼다”고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서울고등학교 1학년 시절의 김윤태 이사장.

하지만 그런 자유로운 일상 속에서도 학업을 소홀히 하지는 않았다. 그는 당시를 “열심히 했다”는 짧은 말로 정리했지만,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진학했다는 사실은 그의 성실함을 잘 보여준다.

의사의 길을 선택하게 된 데에는 가족의 영향이 컸다. 형제들 가운데 의사와 약사로 의료계에 종사하는 이들이 있었고, 집안에는 해부학 교재와 인체 모형이 자연스럽게 놓여 있었다. 그는 “집에서 늘 그런 것들을 보며 자라다 보니 의대가 익숙한 선택지였다”고 말했다.

동시에 마음 한편에는 법에 대한 관심도 자리하고 있었다. 대학 시절 가장 가까운 친구가 법대를 다녔던 덕분에, 틈틈이 법대 강의를 찾아 들을 정도로 법이라는 학문에 흥미를 느꼈다. 그러나 그는 먼저 의사의 길을 걸었고, 법에 대한 오랜 관심은 훗날 다시 이어지게 된다.

서울의대 시절, 의료 혜택이 닿지 않는 무의촌을 찾아 진료 봉사 중인 모습.

◇ 인내의 연속, 의사의 길

그는 서울대 의대 시절을 “지옥 같은 시간”으로 기억했다. 방대한 공부량 앞에서 잠은 사치에 가까웠다. 그는 당시 학생 100명 중 2명만 맡는 도서위원으로 활동했고, 시험 기간이면 도서관 책상 위에서 쪽잠을 자며 공부를 이어갔다. “두 시간만 자고 깨워달라고 서로 부탁하고, 한 시간 뒤에 일어나 다시 책을 펴는 식이었다”는 그의 말처럼, 의대 시절은 한계를 견뎌내는 시간의 연속이었다.

고단함 속에서도 청춘의 숨 쉴 틈은 있었다. “잠 좀 실컷 자보는 게 소원”이던 시절이었지만, 시험이 끝나는 날이면 곧장 학교 앞 다방으로 향해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며 해방감을 달래기도 했다. 팽팽한 긴장과 짧은 휴식이 교차하던 그 시절의 기억은 80세가 넘은 지금도 또렷하다.

서울대 의대 졸업식 날,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부모님과 함께 기쁨을 나누고 있다.

1969년 의대를 졸업한 그는 곧바로 공군 군의관으로 복무를 시작했다. 진해와 사천 비행학교를 거쳐 그가 배치된 곳은 전북 부안의 레이더 기지 ‘의상봉’이었다. 병력 350명에 가족들까지 포함한 수백 명을 단 한 명의 군의관이 책임져야 하는 환경이었다.

이제 막 의대를 졸업하고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젊은 의사에게 주어진 책임의 무게는 상당했다. 그는 “홀로 부대를 책임져야 했지만, 유일한 의료인으로서 어떻게든 그 자리를 지키며 버텨내야 했다”고 돌아봤다. 3년의 복무 기간은 단순한 병역 의무를 넘어, 의료인으로서 실전 감각과 책임감을 다지는 시간이었다.

공군 군의관 복무 당시 훈련 모습.

1972년 군의관 복무를 마친 김 이사장은 인생의 방향을 바꿀 또 하나의 결단을 내렸다. 당시 미국은 베트남전의 여파로 의료 인력이 부족했고, 외국인 의사들에게도 기회의 문이 열려 있었다. 그는 미국 의사 자격시험인 ECFMG를 통과한 뒤 그해 곧바로 시카고행 비행기에 올랐다. 어린 시절 품었던 호기심과 청년 시절 쌓아온 성실함은 이제 미국이라는 새로운 무대에서 다시 시험대에 오르게 됐다.

◇ 미국 정착, 생과 사의 경계에 서다

1972년 미국에 도착했다고 해서 곧바로 의사로서의 삶이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다시 시험을 치르고 훈련받아야 하는 또 다른 출발선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시카고의 그랜트 병원에서 인턴 생활을 시작하며 미국 의료 현장에 첫발을 내디뎠다.

낯선 환경에서 가장 크게 다가온 것은 의학이 아니라 언어와 문화였다. 근무 첫날 만난 산부인과 환자는 영어가 아닌 스페인어로 “아구아(agua)”를 외쳤다. 그는 순간적으로 그것이 물을 뜻한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대응했다. 그는 “미국에 와서 처음 들은 말이 영어가 아니라 스페인어였다”며 “그 기억은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고 웃으며 회상했다.

30여 년간 방사선 종양학 전문의로 환자들을 돌보며 현장을 지켰던 시절.

이민 초기의 문화 충격은 병원 밖에서도 이어졌다. 한국에서는 계절이 바뀌면 비슷한 옷차림을 하는 것이 자연스러웠지만, 미국에서는 한겨울에도 반팔 차림으로 다니는 사람과 두꺼운 외투를 입은 사람이 공존했다. 그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기보다 각자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자유로움이 인상적이었다”고 돌아봤다. 낯설었지만, 동시에 새로운 사회를 이해하는 첫 단서이기도 했다.

인턴 과정을 마친 뒤 그는 노스웨스턴대학교에서 방사선 종양학 레지던트 과정을 시작했다. 이 길을 선택한 데에는 한국에서의 인연에서 비롯됐다. 당시 서울대 은사가 “미국에서 방사선 종양학을 제대로 배우고 돌아와 한국에 해당 분과를 세워달라”고 당부했기 때문이다. 그는 은사의 기대를 안고 수련에 매진했지만, 여러 사정으로 결국 한국 복귀 대신 미국에 남게 됐다.

30여 년간 방사선 종양학 전문의로 살아온 김윤태 이사장은 암 치료의 최전선을 지켜왔다. 방사선 치료는 암세포를 정밀하게 겨누는 고도의 기술인 동시에, 환자의 전신 상태와 삶의 조건까지 함께 살펴야 하는 분야다. 그에게 의사로서의 시간은 단순히 질병과 싸우는 과정이 아니었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선 환자들과 마주하며, 의학의 가능성과 인간의 한계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온 시간이었다.

그는 “끝내 붙잡지 못한 생명 앞에서는 인간의 한계를 받아들여야 하는 순간도 적지 않았다“고 돌아봤다. 그럼에도 “살려낸 환자가 있다는 것, 그것이 의사로서 가장 큰 보람”이라고 말했다.

뉴욕 헤럴드 스퀘어 제임스 고든 베넷 기념비 앞에서의 한때.

◇ 시카고에서 다시 이어진 인연

시카고에 정착해 가는 과정에서 그는 오래전 인연과 다시 마주했다. 서울의대 시절 과외를 하며 알게 된 한 여학생을, 시간이 흐른 뒤 미국에서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의대 시절 처음 맺은 인연은 9년 뒤인 1974년 시카고에서 결혼으로 이어졌다.

두 사람은 재회 이후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 그는 “당시 뉴욕에 있던 그녀를 만나기 위해 두 달 동안 일곱 차례나 뉴욕을 오갔다”며 “밤에 출발해 몇 시간 눈을 붙인 뒤 다시 운전대를 잡는 일정이 반복됐지만, 그 시절의 열정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회상했다.

인생의 든든한 동반자인 아내 권남희 씨(왼쪽)와 함께.

아내 권남희 씨 역시 쉽지 않은 길을 걸었다. 경기여고를 졸업한 뒤 1972년 수도의대(현 고려의대)를 마쳤고, 이후 시카고에서 마취과 의사로 활동하다 은퇴했다. 서로 다른 길을 걸으면서도 한 가정을 이루고 살아온 시간은, 이민자의 삶이 결코 혼자만의 성취로 완성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김 이사장에게 미국에서의 시간은 의사로서 자리를 잡고, 가족과 함께 새로운 삶의 터전을 일구어가는 과정이었다. 그렇게 쌓인 시간은 훗날 그가 또 다른 도전에 나설 수 있는 밑바탕이 됐다.

◇ 62세의 도전, 법대 진학

30년 넘게 의사로 살아온 김윤태 이사장은 은퇴 후 또 한 번 새로운 길에 나섰다. 2006년, 62세의 나이에 시카고 존 마샬 법대(현 UIC 로스쿨)에 진학해 변호사 시험에 도전했다. 이미 안정된 삶을 뒤로하고 다시 학생이 된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법학에 대한 관심이 남아 있었다. 그는 “법이 사회를 움직이는 틀이라는 점이 늘 궁금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의대 시절부터 법에 관심이 있었다. 그는 “친구가 법대를 다니는 모습을 보며 강의를 들으러 가기도 했고, 법이라는 학문이 사회 구조를 이루는 기반이라는 점에 매력을 느꼈다”고 귀띔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보다 현실적인 선택으로 의사의 길을 택했다. 그 선택에 후회는 없었지만, 법에 대한 관심은 오랜 시간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결국 은퇴를 앞둔 시점에서 그는 그 관심을 다시 꺼내 들었다.

그의 도전 뒤에는 든든한 조력자이자 선배인 가족들이 있었다. 두 딸은 이미 변호사로 활동 중이었고, 사위들 역시 로펌의 파트너로 재직 중인 법조인들이었다. 김 이사장이 환갑을 넘긴 나이에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면서, 가족 안에는 다섯 명의 변호사가 자리하게 됐다. 그는 “가족 중 내가 제일 마지막으로 변호사가 됐다”며 웃음을 지었다.

법대 생활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는 “공부하는 과정 자체는 가장 재미있었지만, 변호사 시험 준비가 가장 힘들었다”고 회상했다. 법은 하나의 정답이 정해진 학문이 아니라, 상황과 해석에 따라 결론이 달라질 수 있는 영역이었다. 같은 사건도 관점에 따라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점에서, 그는 의학과는 전혀 다른 세계를 경험했다. 그는 “의학이 환자에게 최선의 치료를 적용하는 일이라면, 법은 주어진 조건 속에서 의뢰인을 위해 가장 설득력 있는 논리를 만들어가는 과정에 가까웠다”고 설명했다.

그는 환갑을 넘긴 나이에도 당당히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며 저력을 입증해 냈다. 하지만 그는 이 자격을 개인의 이익이나 커리어를 위해 쓰기보다, 인생의 남은 시간을 한층 더 가치 있는 곳에 쏟기로 결심했다. 개인의 성취를 넘어 공동체에 기여하는 삶, 그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자신이 뿌리 내린 한인 사회로 향했다.

62세의 나이에 도전한 존 마샬 로스쿨 졸업식 날, 가족들과 함께한 김윤태 이사장.

◇ 공동체의 백년대계, ‘비스코홀’ 건립

그의 한인 커뮤니티 활동은 1980년대 후반 봉사회(복지회) 이사장을 맡으면서 시작됐다. 이후 한미장학재단 중서부 회장으로 활동하며 장학 사업에도 힘을 보탰다. 변호사 자격 취득 이후에는 그 관심과 역할이 더욱 뚜렷하게 공동체를 향했고, 그 중심에는 시카고한인문화원이 있었다.

2014년부터 시카고한인문화원과 깊은 인연을 맺은 그는 회장을 여러 차례 연임하며 조직의 내실을 다지는 데 주력했다. 행정 체계를 정비하고 이사회를 확충하는 한편, 재정 기반을 안정시키며 문화원이 자생할 수 있는 토대를 다져갔다.

2023년 비스코홀 착공식

그간의 성과 가운데 그가 가장 기억에 남는 일로 꼽는 것은 비스코홀(Bisco Hall) 건립이다. 시카고 교외 윌링에 자리한 비스코홀은 400석 규모의 다목적 문화공간으로, 총 420만 달러가 투입된 시카고 한인사회의 대표적 문화 프로젝트다.

비스코홀 건립은 처음부터 공동체의 힘으로 시작됐다. 프로젝트의 출발점에는 비스코(Bisco)사의 서병인 대표와 비스코 자선재단(Bisco Charitable Foundation) 회장인 서민숙 여사가 있었다. 두 사람은 비스코홀 건립 기금으로 150만 달러를 흔쾌히 약정하며 프로젝트의 물꼬를 텄다.

이를 바탕으로 추가 모금이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국중석 부이사장, 조원경 이사, 강정희 이사장, 강영희 명예회장 등이 각각 10만 달러씩을 약정했고, 이후 여러 이사 및 기부자들이 뜻을 모아 거액을 기탁했다. 김 이사장은 “이 같은 연대와 참여가 프로젝트를 앞으로 밀어가는 큰 힘이 됐다”고 돌아봤다.

재원 마련 과정에서는 외부 지원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도 이어졌다. 국립인문재단(NEH)의 4대 1 매칭 그랜트 60만 달러와 재외동포재단(현 재외동포청) 15만 달러 지원을 받는 과정에서는 최기화 전 사무총장과 장기남 명예회장도 큰 역할을 했다. 수많은 이들의 수고와 헌신이 더해지며 비스코홀은 조금씩 현실이 돼갔다.

김 이사장은 “초기 비스코 재단의 기부를 시작으로 여러 기관의 지원, 이사진과 후원자들의 헌신이 함께 모여 완성된 결과”라며 공을 공동체에 돌렸다. 특히 마지막 마무리 과정에서 강정희 전 이사장이 부족한 수십만 달러를 보태고, 금전적·물리적으로 큰 수고를 감당하며 프로젝트 완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많은 분의 헌신과 노력이 아니었다면 이 프로젝트는 완성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여러 사람의 뜻과 힘이 모여 세워진 비스코홀은 2024년 9월 공식 개관하며 시카고 한인사회의 대표적 문화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이와 함께 김 이사장은 문화원의 역할도 새롭게 정립하고자 했다. 단순한 모임 공간을 넘어, 한국 문화를 주류 사회에 알리고 다음 세대와 연결하는 거점이 돼야 한다는 문제의식이었다. 김 이사장은 “비스코홀 개관은 이 프로젝트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었다”며 “이 공간이 앞으로 시카고 한인사회의 소중한 문화 자산으로 자리 잡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러나 외형적 성장 뒤에는 더 큰 과제도 남아 있었다. 김 이사장은 문화원의 지속 가능성을 가장 중요한 문제로 보고 있다. “우리가 닦아놓은 이 기반을 50년, 100년 뒤에도 이어갈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은 그에게 걱정을 넘어, 지금 이 자리를 맡은 사람으로서의 책임과 맞닿아 있다.

김 이사장이 내놓은 해답은 ‘차세대’였다. 그는 “다음 세대가 자연스럽게 참여하고 이어갈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2024년 비스코홀 개관식

◇ 세대를 잇는 가교, ‘성실’의 기록

김윤태 이사장은 지금 자신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다음 세대가 자연스럽게 이어받을 수 있는 기반을 만드는 일이라고 보고 있다. 단순히 조직을 유지하는 차원을 넘어, 재정적 안정이라는 토대 위에 사람과 시스템이 조화를 이루는 ‘지속 가능한 문화원’을 만드는 것이 그의 남은 과제다. 그는 “다음 세대가 스스로 참여하고 주도적으로 운영을 이끌 수 있는 구조가 갖춰져야 한다”며 ”이를 위해 전시, 공연, 교육 프로그램을 꾸준히 확대해 젊은 세대의 문턱을 낮추는 데 주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문화원은 최근 젊은 세대의 참여가 크게 늘었고, 현재는 기존 세대와 비슷한 비율을 이루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한 한인 차세대들이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뜨거운 자부심을 가져주길 당부했다. 그는 ”문화원은 단지 어르신들이 모이는 공간이 아니라, 우리네 삶과 예술이 역동적으로 살아 숨 쉬는 장소”라며 “젊은 세대가 그 주인으로서 당당히 참여해 주길 바란다”는 소망을 전했다.

치열한 삶의 궤적을 그려온 그가 인생의 후반전에서 마주한 행복은 의외로 담백하다. 가족의 건강을 살피고 바둑과 예술을 가까이하며 보내는 소박한 일상은, 오랜 세월 분주하게 달려온 끝에 찾아온 평온한 균형이다. 스스로에 대해서는 “부족함이 많았다”며 고개를 숙이지만, 바쁜 와중에도 자녀들과 함께 세상을 여행하며 쌓았던 추억만큼은 인생에서 가장 잘한 선택으로 꼽으며 미소 지었다.

인터뷰의 마지막, 훗날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지 묻는 말에 그는 나직이 답했다.
“그저, 열심히 노력한 사람으로 기억되면 충분합니다.”

그의 삶은 묵묵히 쌓아 올린 시간의 축적으로 설명된다. 80년 세월을 쉼 없이 다져온 그 단단한 반석 위에서, 이제 시카고 한인 사회의 미래는 다음 세대의 열정으로 채워질 채비를 마쳤다. 개척자가 평생에 걸쳐 닦아 놓은 그 길은, 이제 새로운 세대를 향한 희망의 통로가 되어 이어지고 있다.

<윤연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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