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ssily Kandinsky 1866-1944
러시아 출생. 독일 귀족 출신인 아버지와 러시아 소수민족 타타르계 출신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부유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어린 시절 부모의 이혼으로 인해 예술을 사랑하는 이모에 의해 대신 양육됐다. 이때 본 아름다운 러시아 성과 지역 민속 예술에 대한 시각적 경험은 그의 초기 작품에 많이 반영됐다.
청기사파의 창시자인 칸딘스키는 모스크바 대학에서 법률과 경제학을 공부했으나, 모네의 작품(특히 건초더미 시리즈)을 보고 감동을 받은 것을 계기로 독일로 건너가 30세에 화가가 됐다. 칸딘스키는 현대 추상의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미술사에 혁명을 일으켰으며, 20세기 가장 중요한 이론가 중 한 명으로 예술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존경받고 있다.
독일에서 공부한 후 러시아 혁명 직후 모스크바로 돌아왔지만, 예술 이론이 맞지 않아 다시 독일 뮌헨으로 돌아와 바우하우스에서 교수직을 맡았다. 나치에 의해 바우하우스가 폐쇄된 이후 대부분의 유럽 화가들이 미국으로 망명했지만, 칸딘스키는 1939년 프랑스로 가 프랑스 국적을 취득하고, 그곳에서 작업하다 1944년 파리 근교에서 생을 마감했다.
독일의 바우하우스(건축의 집)는 나치에 의해 폐교되기까지 14년간 새로움을 추구하는 교육 이념과 커리큘럼으로 현대 모더니즘의 시작을 알리고 예술의 흐름을 바꾼 중요한 기관이었다. 조각, 회화, 순수 미술, 공예, 실용 예술을 통합하여 예술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을 탐구하고 인재를 양성하는 종합 공예 예술 교육기관이었다. 칸딘스키는 그의 친구이자 정신적 스승인 파울 클레와 함께 바우하우스에서 교수직을 맡으며 예술적 교감을 끊임없이 나누었고, 회화와 디자인 분야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추상화란 눈으로 볼 수 있는 형상이 아니라, 화가가 눈으로 본 것을 마음으로 승화시켜 표현한 것이다. 그래야만 화가는 자신의 풍부한 감성을 표현할 수 있고, 관객 또한 그 안에 담긴 깊은 의미를 전달받을 수 있다. 생전에 칸딘스키는 “어떠한 사물을 보았을 때 느끼는 강렬한 감정을 화폭에 담아야 좋은 그림이 된다”고 말했다. 그래서 칸딘스키의 작품을 ‘뜨거운 추상’이라고 한다. 반대로 몬드리안은 뜨거운 감성보다는 이성적 표현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몬드리안의 추상은 ‘차가운 추상’이라고 불린다.
칸딘스키는 정신적이고 심리적인 추상 미술을 점, 선, 면 등 순수한 회화의 요소만으로 표현했다. 작품의 제목에도 ‘구성’, ‘음향’, ‘즉흥’ 등이 많다. 그는 음악이 그림이 될 수도, 그림이 음악이 될 수도 있다고 믿었다.
“색은 영혼에 떨림을 줌으로써, 영혼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힘이다.”
“색채는 건반, 눈은 공이, 영혼은 현이 있는 피아노이다. 예술가는 영혼의 울림을 만들어내기 위해 건반 하나하나를 누르는 손이다.”
“예술가는 인생의 행운아가 아니다. 그는 종종 자신의 십자가가 되기도 한다. 고통스러운 일을 완수해야 하는 것이다. 자신의 행위와 감정과 사상, 이 모든 것이 섬세하여 손으로 만질 수는 없지만, 확고한 소재를 형성하고, 그로부터 작품이 탄생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예술가가 자유로운 것은 인생에서가 아니라, 오직 예술에서이다.”
칸딘스키는 관객이 작품을 이해해주기보다는 음악처럼 선율을 느끼기를 원했다.
홍성은 작가
시카고 한인 미술협회 회장
미술 심리치료 전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