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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day, March 16,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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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이로운) 0과 1의 설계자, 부조리의 심장에 ‘청구서’를 던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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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운 작가 (50)

벤처 1세대에서 신춘문예 당선으로, 소설가 이로운이 말하는 인간의 결

늦겨울 고창에서 피어난 문학의 향기

2026년 2월 28일, 한국 문학의 거룩한 성지이자 미당 서정주 시인의 숨결이 서린 전북 고창군 미당시문학관 대강당은 차가운 늦겨울 바람을 뚫고 모인 문인들의 뜨거운 열기로 술렁였다. 1991년 창간되어 35년간 한국 문단의 새로운 지평을 탐구해온 종합문예지 <포스트모던>의 통권 54호 출간 기념식과 ‘2026 신춘문예 시상식’이 동시에 거행된 이날, 장내는 인문학적 성찰과 새로운 문학적 담론을 향한 기대감으로 가득 찼다. 제주에서 강원까지 전국 각지에서 달려온 100여 명의 문단 원로와 관계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진행된 이번 행사는, 특히 인공지능이 문학의 영역을 위협하는 시대에 인간만이 길어 올릴 수 있는 ‘현장의 언어’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무대였다.

이날 모든 화제의 정점에는 중편소설 부문 당선자 이로운(본명 이형구) 작가가 서 있었다. 남복희 박사와 김들풀 주간의 사회 속에 그가 단상에 올라 상패를 손에 쥔 순간, 객석에서는 정적이 흐르다 이내 거대한 박수가 터져 나왔다. 대한민국 벤처 창업 1세대의 신화이자 디지털TV와 IPTV 기술의 혁신을 주도했던 엔지니어 출신 전략가가, 돌연 펜을 들어 우리 시대의 부조리를 정조준한 ‘청구서’를 내밀며 소설가로 화려하게 등단했기 때문이다. 0과 1의 설계도를 그리던 손으로 병원비 청구서를 든 이들의 떨림을 기록하기까지, 그의 지난 20여 년 세월이 문학이라는 거대한 강물로 합쳐지는 그 장엄한 순간은 AI 시대에 진정한 작가 탄생의 울림이 무엇인지를 온몸으로 증명하고 있었다.

향교 마루의 소년, 천 년의 문장을 품다

이로운의 문학적 원형은 1976년 충남 부여, 고려와 조선을 관통하며 천 년의 학맥을 이어온 한산이씨 가문의 엄격한 가풍 속에서 시작된다. 목은 이색 선생의 27대손으로 태어난 그에게 문장이란 단순히 종이 위에 쓰인 글자가 아니라, 대대로 내려온 삶의 철학이자 숨결 그 자체였다. 80년대라는 격변의 시대상 속에서도 지역의 터를 닦아온 그의 집안은 한학의 전통을 고집스럽게 지켜냈고, 이는 소년 이로운을 평범한 아이들과는 다른 길로 이끌었다.

일곱 살, 또래들이 골목을 누빌 때 그는 향교의 서늘한 마루에 앉아 사서(四書)와 명심보감을 마주했다. 빳빳한 종이 위 한자를 한 자 한 자 짚어가며 문장의 속뜻을 곱씹던 그 시간은 단순한 학습이 아닌, 언어가 가진 준엄한 무게를 온몸으로 받아내는 수행이었다. 중학교 입학 전까지 이어진 이 지독하고도 정교한 ‘문장 훈련’은 소년의 내면에 깊은 옹이를 남겼고, 훗날 그가 차가운 0과 1의 논리가 지배하는 엔지니어의 세계와 냉혹한 비즈니스 현장을 누비면서도 인간의 결을 끝까지 놓지 않게 한 단단한 씨앗이 되었다. 결국 그의 소설 속에 흐르는 묵직한 서사와 날 선 통찰은, 수십 년 전 부여의 향교 마루에서 이미 그 싹을 틔우고 있었던 셈이다.

2026년 포스트모던 신춘문예 소설부문 당선작가 이로운 (본명 이형구) 이 수상을 하고 있다

벤처 1세대의 혁신, 기술의 정점에서 인간을 보다

엔지니어로서 이로운의 이력은 그야말로 문단에서 찾아보기 힘든 독보적이고 화려한 궤적을 그린다. 금오공과대학교에서 컴퓨터공학을, 고려대학교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하며 기술의 근간을 닦은 그는 대학 시절부터 이미 혁신의 아이콘이었다. 전국 최초의 발명 및 창업동아리를 직접 결성해 이끌었으며, 인터넷이 대중화되기도 전인 1999년에 가상농장 게임을 개발해 제1회 대한민국 대학생 벤처창업경진대회 금상을 거머쥐며 혜성처럼 등장했다. 현대전자라는 안정적인 대기업의 길을 뒤로하고 벤처의 거친 야생에 몸을 던진 그는, 중소기업 최초의 ATSC 방식 디지털TV 개발과 세계 최초의 IPTV 일체형 디지털TV 완성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기며 기술 혁신의 최전선을 진두지휘했다. 대전대학교에서 기술경영 박사과정을 수학하며 그는 기술과 경영이라는 두 세계를 관통하는 거시적인 안목까지 갖추게 된다.

그러나 이후 공공의 현장에서 지역혁신생태계를 일구는 설계자이자 실행가로 무게중심을 옮기면서, 그의 시선은 차가운 하드웨어 너머의 뜨거운 사람에게로 향하기 시작했다. 0과 1로 이루어진 명쾌하고 논리적인 설계도 뒤편에는, 국가 정책의 거대한 수레바퀴 아래서 설명되지 않는 개인의 고통과 제도의 틈새에서 소리 없이 무너져가는 이들의 야윈 등이 늘 서성이고 있었다. 기술의 정점에서 그가 마주한 것은 시스템의 완벽함이 아니라, 그 시스템이 미처 품지 못한 사람들의 쓸쓸하고도 단단한 그림자였다. 엔지니어의 정밀한 시선과 전략가의 냉철한 시야를 동시에 지닌 그에게 이 풍경들은 언젠가 반드시 문장으로 풀어내야만 하는 ‘오랜 숙제’처럼 가슴 속에 켜켜이 쌓여갔다.

20년 현장의 숙제, 떨리는 손으로 마주한 ‘청구서’

그가 소설이라는 날 선 무기를 들게 된 결정적 순간은 화려한 기술의 현장이 아닌, 지극히 평범하고도 시린 어느 병원 로비에서 찾아왔다. 병원 관리자의 차갑고 고압적인 시선 아래, 병원비 청구서를 받아 든 한 사람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항의 한마디 할 수 없는 힘없는 개인과, 그 항의를 들을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는 거대 시스템 사이에서 관계는 처음부터 위태롭게 기울어져 있었다. 이로운 작가는 “종이 한 장이 손에서 떨어질까 봐 두 손으로 꼭 부여잡고 중압감을 견디던 그 뒷모습이 오래도록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았다”고 회상한다. 그 떨림을 외면하지 않고 기록하겠다는 다짐이 소설 <청구서>의 위대한 첫 문장이 되었다.

이 강렬한 목격담은 그가 지난 20여 년간 공공의 현장에서 치열하게 쌓아온 경험과 맞물리며 폭발했다. 한국전파진흥협회, 대전테크노파크, 세종창조경제혁신센터, 한국수자원공사 등을 거치며 혁신을 설계하던 전략가로서 그는 수많은 제도의 틈새를 목격했다. 국가 디지털 전환 정책을 기획하는 거시적 안목 뒤편에는, 누군가가 저질러 놓은 잘못을 떠안은 채 책임이라는 짐에 짓눌려 신음하는 선량한 동료들이 있었다. 조직을 떠나거나 심지어 극단적인 선택을 해야 했던 이들의 아픔을 곁에서 지켜보며, 그는 이것이 단순한 개인의 불운이 아닌 시대의 부조리임을 직감했다. 갑작스럽게 하달된 요청자료에 쫒기듯 밤샘으로 대처해야만 하는 일터에서 쪽잠조차 허락지 않는 좁은 책상에 엎드린 채 울음을 삼키던 이름 모를 이들의 삶은 그에게 문장으로 갚아야 할 ‘오랜 숙제’로 남았다. 결국 소설 <청구서>는 현장에서 길어 올린 비명 섞인 언어들이 층층이 쌓여 터져 나온, 이 시대가 반드시 받아 들어야 할 묵직한 답변서인 셈이다.

기득권이라는 성벽을 허무는 결단

당선작 <청구서>는 단순히 시스템의 표면적인 문제를 고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인간 내면의 숭고한 결단을 심도 있게 다룬다. 이야기의 심장부에는 20년 동안 공들여 쌓아 올린 기득권이라는 견고한 성벽을 스스로 허물어뜨린 김환곤 교수가 존재한다. 그는 환자들이 까맣게 몰랐던 어두운 진실을 세상 밖으로 꺼내놓으며, 모든 명예와 안정을 뒤로한 채 “오히려 이제야 진짜 의사가 된 기분”이라며 홀가분한 미소를 짓는다. 이러한 김 교수의 모습은 작가가 독자들에게 전하고자 했던 진정한 ‘인간의 상’을 대변한다.

이 강렬한 서사는 이로운 작가가 지난 20년 가까운 세월을 공공 분야에 투신하며 겪었던 치열한 내적 투쟁의 결과물이다. 그는 지역에서 자생적인 혁신생태계를 일구며 누구보다 뜨거운 소명의식으로 오체투지하듯 헌신했다. 그러나 그 헌신만큼이나 거대한 조직적 부조리와 감당하기 힘든 삶의 무게에 부딪혀야 했다. “공공 부문의 부조리를 문학에 담아내는 것이 과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라는 무거운 질문 앞에서 그는 몇 번이고 펜을 멈추었다. 하지만 소설이 당장 세상을 바꾸지는 못하더라도, 세상이 바뀌어야 한다고 소리 높여 말하는 것 자체가 문학의 몫이라는 확신에 이르렀다. 빗방울 하나는 미약하지만 그들이 모여 거대한 강을 이루듯, 작가는 자신의 경험과 동기화된 김환곤의 결단을 통해 우리 시대가 잃어버린 ‘진실의 가치’를 묵직하게 되묻는다.

고시원 벽 너머의 위로, 혼자가 아니라는 선언

이로운의 소설 <청구서>는 차갑고 날카로운 사회 고발서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그 심장부에는 지독하리만치 따뜻한 위로의 온기가 흐른다. 그는 집필하는 내내 고시원 낡은 벽에 외로운 낙서를 남겼던 이름 모를 누군가를 생각하며 문장을 다듬었다. 요청자료의 마감에 독촉받던 동료는 새벽마다 휴대전화 진동 소리에 가슴을 졸이며 대리운전 호출을 기다리던 옆방의 사내로, 그리고 퇴근 후 포차에 앉아 자신의 무기력한 삶을 토로하며 울던 동료들은 얇은 벽 너머에서 홀로 드라마를 보며 소리 없이 울음을 삼키던 또 다른 이웃의 고단한 삶들로 그의 원고지 곳곳에 투영되어 있다. 작가는 이 소설이 그들에게 가닿기를 간절히 원했다. 혼자 울음을 삼키기에 너무도 많은 방이 존재하는 이 세상에서, 비록 보이지 않더라도 벽 너머에 당신의 아픔에 공명하며 함께 아파해 줄 누군가가 반드시 존재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작가는 자신의 삶을 관통하며 얻은 뼈아픈 깨달음을 우리에게 나지막이 건넨다. “사람이 진정으로 무너지는 순간은 짊어진 고통의 무게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서가 아니라, 그 고통을 단 한 사람에게도 꺼내 보이지 못할 때”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자신의 삶이 처한 곤경과 아픔을 숨기지 않고 세상 밖으로 드러내는 행위야말로, 스스로 무너지지 않기 위해 낼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첫 번째 용기’라고 그는 단언한다. 그는 독자들에게 힘겨운 순간마다 어머니나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밥 먹었어?”라는 일상적인 안부 너머, 마음에 꽁꽁 감춰둔 진실한 속마음을 꺼내 보라고 권한다. “세상은 결코 혼자가 아니다”라는 그의 선언은, 부조리한 현실에 맞서는 가장 강력한 저항이자 가장 낮은 곳에서 피어난 따스한 구원의 메시지다.

AI 시대, 왜 여전히 ‘인간의 언어’인가

인공지능이 방대한 데이터를 학습해 시를 쓰고 소설을 짓는, 이른바 ‘창작의 자동화’가 현실이 된 이 시대에 이로운 작가의 탄생은 그 어느 때보다 특별한 무게를 지닌다. 그는 0과 1의 정교한 논리로 디지털 세계를 설계하고, 세계 최초의 IPTV 일체형 TV를 완성하며 기술 혁신의 최전선을 지휘했던 인물이다. 기술의 효율성과 데이터의 정확성을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고 신봉하던 공학도 이로운이 돌연 ‘가장 아날로그적인’ 문학의 세계로 회귀한 것은 우리 사회에 던지는 역설적인 경고이자 희망이다. 기계가 생성한 수십억 개의 문장은 겉보기엔 매끄럽고 완벽할지 모르나, 삶의 현장에서 온몸으로 부딪치고 상처받으며 길어 올린 ‘흉터가 있는 언어’만큼은 결코 흉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가 다시 펜을 든 것은 데이터로 환산되거나 알고리즘으로 분석되지 않는 인간의 존엄, 그리고 고통의 미세한 질감을 기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인간의 심장’뿐이라는 굳건한 믿음 때문이다. 병원비 청구서를 든 채 힘없이 떨리던 그 무력한 손의 진동은 센서로 측정할 수 있는 물리적 수치가 아니라, 함께 아파하고 공명해야 할 인간적인 슬픔의 파동이다. 이로운의 당선은 단순히 한 신인 작가의 등장을 넘어, 효율과 속도가 지배하는 비정한 세상에서 여전히 ‘문학적 성찰’이야말로 우리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가장 강력하고도 인간적인 혁신의 도구임을 증명하고 있다. 소설이 세상을 직접 바꾸지는 못하더라도 세상이 바뀌어야 한다고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것, 그것이 바로 AI 시대에도 우리가 여전히 인간의 언어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다.

빗방울이 모여 거대한 강이 되기까지

현재 (유)노아벤처스 대표이사이자 (사)도시공동체본부 상임대표로서 여전히 세상을 이롭게 하는 현장을 지키고 있는 그는 이제 ‘이로운’이라는 필명으로 또 다른 행보를 시작한다. “빗방울 하나가 세상을 어찌하지는 못하지만, 그 빗방울들이 모여 흐르면 거대한 강이 된다”는 그의 신념은 우리 문단에 던지는 또 다른 청구서와 같다. 현장의 언어로 세상의 결을 기록하겠다는 이 공학도 소설가의 출사표는, AI가 대체할 수 없는 인간 정신의 고귀한 역전승으로 기록될 것이다.

이가희 시카고한국일보 한국특파원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장
시인/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