탱크·폭탄 그리는 우크라 어린이···심각한 트라우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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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란 열차 차창 밖으로 작별 인사하는 우크라 어린이<로이터>

“극심한 공포, 외부 자극에도 무반응”···아동 정신건강 위태
정착 못하는 불안한 피란 생활, 갑작스러운 가족의 부재에 충격

러시아의 침공에 전쟁의 참상을 직접 겪는 우크라이나 어린이의 정신 건강이 위태롭다는 지적이 나왔다.

15일 영국 일간 가디언은 서부 도시 르비우에서 피란길에 나선 어린이들을 만나 이들의 정신 건강을 살핀 의료진의 우려를 전했다.

보도에 따르면 개전 사흘째였던 지난달 26일 르비우 기차역에 피란민이 쏟아지자 우크라이나군은 도시 내 정신과 의사들에 이들의 정신 건강을 돌보기 위한 현장 진료소를 꾸려달라고 요청했다.

남성은 대부분 총동원령에 응해 징집된 탓에 르비우 기차역에 도착하는 인파 다수는 여성과 아동이었다.

당시 현장에 투입됐던 의료진은 가디언에 수천명의 아동이 심각한 트라우마 증세를 호소했다고 밝혔다.

정신과 의사 오레스트 수발로 박사는 “키이우(키예프), 하르키우(하리코프)에서 온 사람 중에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는 증상을 보였던 이들이 있었다”면서 “어른뿐 아니라 다수 아동이 극심한 공포에 빠졌다”라고 말했다.

의사 빅토르 발란딘 박사는 “긴장증 증세를 보인 아이들을 봤다. (표정이) 얼어있고, 외부 자극에 반응하지 않았다”며 “많은 아이가 말을 하지 않았고 일부는 손이나 손가락을 움직이지도 못했다”고 말했다.

긴장증이란 온몸의 운동 기능이 극도로 억제돼 움직이지 않는 상태가 되는 증상이다.

정신과 의사들은 총동원령으로 징집돼 갑자기 떨어지게 된 아버지의 부재가 아이의 정신 건강이 충격을 받았다고 진단했다.

발란딘 박사는 “(아버지가 없어도) 어머니의 감정 상태가 안정됐다면 자녀도 안정될 확률이 높다”면서도 “그러나 10대 청소년은 그렇지 않다. 이미 상황이 어떤지 아는 나이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10대 때 자연스럽게 자아를 형성하게 되는데 일상에 너무 큰 변화가 생기면 이런 과정에 차질이 생긴다”고 우려했다.

이런 우려에 의료적 지원과 별도로 아동 정신 건강을 챙기기 위한 르비우 시민사회의 움직임도 잇따랐다.

르비우의 프란코 박물관 관장 보흐단 티크홀로츠는 매일 1천명가량 아동을 불러 모아 심리상담사, 음악인, 교사 등과 함께 음악·그림 교실 등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다.

전란 중에도 아동에 놀 공간을 마련해주면서 조금이라도 평시의 감각을 찾게 해주기 위해서다.

르비우의 서점 주인 카테리나 수크호렙스카도 서점에서 아동을 위한 그림 교실을 열었다.

그는 “아이들이 폭탄, 탱크를 그린다. 이런 것들을 눈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라면서 “그렇지만 평화와 승리를 염원하는 등 희망도 아이들의 그림에 나온다”고 말했다.

현재 상대적으로 안전한 르비우 외 타지역의 아동은 이런 프로그램이나 의료적 지원을 받지 못하는 처지라고 가디언은 지적했다.

이런 아동과 그 가족은 전란 속에 정주하지 못하고 계속 이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수발로 박사는 정신 문제를 겪는 아이들이 르비우에 머물지 않고 금방 폴란드를 비롯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탓에 충분히 진료할 시간을 마련하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그는 “아이들이 (지금과 다른) 안정적 환경에서 살 수 있다면 이런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회복력이 생긴다”라며 “우크라이나 역사와 국민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라고 기대했다.

가디언은 개전 이후 학교, 장난감, 놀이 등을 포기하고 피란길에 따라나서야 했던 어린이가 수백만에 달한다고 전했다.

우크라이나 당국에 따르면 이 가운데 90명가량이 전란 중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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