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라다”···코로나도 막지 못한 영국판 강남역 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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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갓길에 무참히 살해된 30대 여성 사라 에버라드의 죽음을 추모하는 영국 시민들이 13일 런던 남부 클래펌 공원에서 집회를 갖고 있다.<로이터>

경찰관에 살해된 사라 에버라드 추모
집회 불허에도 수백명 모여 당국 성토

영국판 ‘강남역 시위’가 열렸다. 법원이 감염병을 이유로 집회를 불허했지만 여성들은 개의치 않았다. 2016년 한국사회가 그랬던 것처럼 시위대는 반복되는 여성 상대 범죄를 끝내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봤다.

수백명의 영국 여성들은 13일 저녁 런던 남부 클래펌 공원에서 사흘 전 숨진 채 발견된 여성 사라 에버라드(33)를 추모하는 집회를 진행했다. 법원이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방역 수칙을 내세워 집회 허가를 내주지 않았지만, 이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에버라드의 행적이 마지막으로 확인된 오후 9시30분에는 참석자들이 추모의 의미를 담아 휴대폰 불빛을 일제히 밝혔다. 해산 과정에서 경찰과 몸싸움을 하다 시위대 1명이 체포되기도 했다.

에버라드는 3일 친구 집을 방문하고 돌아가는 길에 실종됐다. 실종 일주일이 지난 10일 켄트주 숲 속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에버라드가 마지막으로 포착됐던 클래펌에서 약 80㎞ 떨어진 곳이다. 클래펌 인근은 가로등이 밝고 유동인구도 많은 곳이라 시민들의 충격은 더욱 컸다. 용의자는 현직 경찰관인 웨인 쿠전스(48)로 밝혀졌으며, 현재 납치 및 살인 혐의로 기소된 상태다. 두 사람의 관계나 범행 동기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정부 지침을 어기고 거리로 나와야 할 만큼 여성들의 분노는 컸다. 한 여성 시위대는 영국 일간 가디언에 “여성을 타깃으로 삼은 범죄는 우리에게 코로나19만큼 위험하다”고 참가 이유를 밝혔다. 실제 최근 설문조사에서 런던 여성의 97%는 귀갓길에 위협을 느낀 적이 있다고 답했다.

시위대는 범행 자체가 아니라 여성이 쉽게 범죄의 표적이 될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를 비판한다. 집회 현장 곳곳에선 ‘내가 사라다(I am Sarah)’라는 문구가 적힌 피켓이 눈에 띄었다. 누구든 여성이라면 같은 피해를 겪을 수 있다는 뜻이다. 2016년 5월 20대 여성이 조현병을 앓던 가해자가 휘두른 흉기에 무참히 살해 당한 뒤 불붙은 강남역 시위와 비슷하다. 그 때도 ‘오늘도 우연히 살아남았다’는 구호가 시위 현장을 뒤덮었다. 뉴욕타임스는 “에버라드가 런던 여성들이 겪는 일상적 위험을 상징하는 인물이 됐다”고 진단했다.

범죄를 피해 여성 탓으로 돌리는 경찰의 그릇된 행태는 성난 시위대를 더욱 자극했다. 일부 경찰관은 항의하는 여성들을 향해 ‘안전을 위해선 여성은 밤에 외출하지 마라’ ‘여성은 혼자 외출하면 안된다’ 등의 발언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경찰은 방역 지침을 준수하지 않은 불법 집회임을 들어 엄정 수사 입장을 밝혔다. 사디크 칸 런던 시장 역시 “클래펌 집회는 명백한 방역 수칙 위반”이라며 경찰을 두둔했다.<박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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