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의 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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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무웅(자유기고가/시카고)

노년이 되면 딱 두가지 중에 하나에 해당이 된단다.  죽는 그날까지 존경받는 사람과 푸대접을 받는 사람이란다. 그렇담 누가 존경을 받을까?.  자기 자신의 가치를 잘 지켜내는 사람이 존경을 받게 된단다. 몇년 사이에 한국엔 사회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사회학(社會學)은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와 왜 그렇게 사는지를 사회와 연관지어서 설명하는 학문이다.  인간이 사회적으로 옳게 살아가는 방법을 연구하는 학문이라 칭하고 싶다.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평등이라는 말은 쉽게 한다. 그러나 어디에도 진실된 평등은 없는 듯하다.  가장 평등해야  할 종교 속에도 평등은 없다. 전에 뉴스를 통해서 본 바로는 100여명이 넘는 불교 종단 지도자의 모임이 있었다. 모두가 좋은 차는 물론이려니와, 90% 이상이 과체중이였다. 잘 먹고 살고 있다는 증표 같았다.  말로는 무소유라고 하나 인간이 살아갈려면 뭔가는 소유하고 있어야 한다. 예수는 “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라고 했는데, 대형 교회 담 너머에 사는 독거노인이 죽어도 모르고 있다. 정말로 이웃을 사랑 할까 ?

영국의 작가 조지 오웰이 1945년에 발표를 한,  풍자 소설인 “ 동물 농장 “ 이란 것이 있다. 전체적인 내용은 존스 농장에 살던 동물들이 가혹한 생활에 못이겨 주인을 내쫒고, 그들이 직접 농장을 운영하지만, 끝내 혁명을 주도했던 권력층의 독선으로 부패하고 만다는 이야기 이다. 혁명을 한 돼지들이 권력을 장악한 후에 인간을 닮아 가는 해학적인 소설이다. 지금의 많은 종교지도자들은 이 소설에 나오는 돼지 군상과 비슷하다. 너무 많은 것들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유라는 표현을 하면, 많은 사람들은 법정스님이 쓴 수필집의 제목인 무소유와 결부를 시킨다. 유명한 스님이 쓴 거라 하며 무소유는 아무것도 갖지 않는 걸로들 착각을 한다.  여기서 무소유란 것은 누구나 더 많이, 더 크게, 더 호화롭게,  더 높게,  무엇이던지 더 많이 소유하기를 원하는데 이는 불행한 사람의 근원이 된다는 뜻이 있는 것이다. 무조건적으로 안 갖는 무소유의 의미가 아니란 말이다.  정말 필요한가? 꼭 필요한가? 참으로 꼭 필요한가? 하고 세번 물은 다음에 갖으라는 말이 무소유의 의미로 받아 들여야 한다.

우리가 사는 인간 사회에서 취향에 따른 소유로 사람을 구분 짓는 방법이 있다. 자기 자신이 다른 사람과 다름을 은연중에 나타낸다. 같아 보이는데 삶의 양식이  자세히 보면 틀린다. 불란서 말로 아비투스 (Habitus) 를 번역 해 보면 취향, 습관, 행동양식 이라고 할 수가 있다. 같은 듯한데 다름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 아비투스라고 이해를 해 보자. 보이지 않는 계급사회라고나 할까. 허름한 옷차림은 다른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들이 신은 운동화는 다르다. 그들이 신은 것은 천불이 넘는 거다. 백불이면 사서 신을 운동화 이지만 그들은 다르다. 그들만이 그걸 안다.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로렉스 시계라는게 있다. 그걸 소유한 사람들은 부자들이 라고 막연한 사회 통념이 있다. 그런데 이 시계는 굳이 등수로 치면 5등 정도가 될까 말까이다. 로렉스 시계 보다 더 좋은 것은 일반인들은 이름조차 모른다.  소유로서 계급 사회를 만들어 다름이 있음을 나타낸다.

좀더 다른 말로 해 보면 취향이 다름에서 오는 신분의 격차를 인정하는 게 있다. 1970년대 부터 생긴 한국의 골프는 누가 뭐라해도 사회적으로 신분이 높은 사람들의 운동이었다. 그런데 미국 이민이 쿼터제로 바뀌면서 많은 한국 사람들이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 와서 보니 골프는 신분 높은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그냥 대중적인 스포츠였던 것이다. 머릿속에 남아 있는 신분 상승의 기회를 골프로 잡아 보려는 심리가 한인 이민사회에 대중화 되다시피 되었다.  골프란 예의 범절이 다른 운동에 비하여 현저하게 차별이 되는 운동이다.  기초개념은 배우지 않고 공을 쳐서 멀리 보내는 것만 신경을 쓰다 보니, 골프가 갖고 있는 수 많은 룰, 기본적인 공중 도덕과 매너는 처음부터 알지를 못했다. 인간들이란 원래가 완벽하다고 느꼈지만, 결과는 하나 둘 쯤은 부족함이 나타난다. 레닌의 사회주의는 모든 경제적 가치를 국가의 사유로 인정했다. 이게 바로  공유제(共有制)란 것인데, 이것이 공산주의가 된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원론적으로 표현을 하면 공유와 사유는 구별되어지는 것이지만, 이것이 다른 계급화 되어가는 사회로 굴러가면서 공유제가 실패를 한 것이다. 자본주의 국가에서의 평등이란 소유한 것으로 구분지어 지는 또다른 계급 사회가 형성되어 있다. 그러나 지금은 남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계급 사회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만족하는 계급 사회로 발전되어 간다는 것이 전과는 조금 다름이 있다. 자신이 생각을 해서 좋은 것이라면, 그게 행복이다라고 말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