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예술가 조영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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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보명 교수(시카고신학대)

 

조영남처럼 맛깔스럽게 노래를 하는 가수는 없다. 트로트와 가곡에서 찬송가까지 장르를 불문하고 그가 부르는 노래는 언제나 조영남만의 노래가 된다. 그는 예술가적인 끼가 다분해 화가로서 활동도 해왔고, 글 쓰는 실력도 있어서 책도 여러 권 냈다. ‘화투’를 소재로 한 그의 그림은 해학적인 기발한 발상 때문에 화제가 됐었고, 언론과 개인 전시회를 통해 많은 소개가 됐었다. 하지만 그의 작품이 조수의 도움을 많이 받은 것이란 고발이 보도되면서, 그동안 자신이 직접 그림을 그린다는 인상을 언론을 통해 심어온 조영남의 화가 이미지는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결국 그의 작품을 구매한 사람들을 속인 사기죄로 고소된 조영남은 최근 1심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예술을 위한 행위가 소송과 재판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흔치 않지만, 주로 예술의 한계가 문제의 대상이기 때문에 관심을 갖게 된다. 몇 년 전 ‘대왕송’ 소나무 사진을 더 좋은 각도에서 찍기 위해 시야를 가리는 주변 소나무들을 베어내 많은 비난의 대상이 되었던 유명한 사진작가의 사건이 그랬다. 전통적인 사진의 다큐멘터리 작가정신과 환경문제가 충돌한 사건으로 사진의 윤리와 본질을 함께 건드린 사건이었다. 소나무 사진의 사건과 조영남의 사건은 결국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묻게 만드는 사건으로, 당사자들이야 괴롭겠지만, 앞으로 한국 예술의 역사에 상세히 기록될 만한 사건이라 생각된다. 조영남의 대작(代作) 사건에 대해선 그동안 많은 찬반 논란이 있었고, 법정에서도 그 공방이 이어졌다. 조영남의 행위가 사기라는 시각과 업계의 관행이라는 입장이 엇갈렸고, 현대 미술에선 아이디어가 우선이란 논리와 창작은 과정이란 논리가 맞섰다. 도덕적으론 비난을 받아도 법적인 심판의 대상은 아니라는 시각도 있었고, 속여서 팔았으니 법적인 판단이 필요한 범죄라는 견해도 있었다.

현대미술에서 작품의 제작과정을 대부분 직원들에게 맡기는 작가가 있다. 데미안 허스트라는 영국 미술계의 유명한 인물이다. 그에 대한 비판은 지금도 계속 있지만, 그의 작품의 평가나 가격에 영향을 주진 않는다. 이런 행태가 용인되는 이유는 예술과 작가의 의미에 대한 이해가 다르기 때문이다. 현대의 예술은 초월적인 세상과 교감하는 행위일 필요도 없고, 작가의 영혼을 담아낼 필요도 없고, 이념과 저항의 행위일 필요도 없다. 예술에 대한 시대적 공감이 없기 때문에, 예술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질문은 역설적으로 더 중요하게 된다. 20세기 예술은 어떤 의미에서 그 질문을 작품으로 묻고 답하는 과정이었다 말할 수 있다. 최근 예술에 대한 어떤 합의가 있다면 그것은 예술의 정의는 문화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예술에 대한 판단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작품을 만들고, 가르치고, 배우고, 전시하고 매매하는 과정에 연관된 사람들이 구성하는 미술계가 된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의 예술계에선 가치의 판단이 시장을 중심으로 형성될 수밖에 없다.

조영남은 자신의 작품이 팝아트 계열의 현대미술이기 때문에 자신이 제공한 아이디어와 콘셉트로 평가를 받아야 하고, 누구의 손길이 더 닿았느냐는 그 평가에 중요하지 않다고 한다. 이 사건 이후 그의 작품에 대한 시장의 판단은 어떨까? 그가 자신의 작품들을 거둬들였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의 작품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거나 더 높은 가격으로 매매되고 있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그의 작품이 그 정도의 예술에 대한 논란을 불러일으킨 것만으로도 큰 역할을 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화투’를 보면서 그 상투성과 식민성을 예술로 승화시키려 했던 조영남을 떠올리지 않을 수 있을까? 그가 원했던 것은 아니겠지만, 그의 작품은 언젠가 순전한 시장의 논리에 의해서라도 가치를 인정받아 높은 가격에 거래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