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원의 正言直說] 시카고는 너무 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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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HL

본보 편집국장

 

올해로 시카고에 산지 26년째다. 가족과 함께 뉴욕으로 이민 와 1년 남짓 살다 아무 연고도 없는 시카고에 혼자 떨어져 산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26년이나 됐다. 30~40년 이상 사신 시카고 올드타이머 선배님들 앞에서 ‘번데기 주름’ 잡는 격이라 죄송하지만, 웬만큼 살다보니 시카고 한인사회만의 특징이 눈에 들어온다. 뉴욕과 샌프란시스코에 잠깐 산 경험도 있다보니 시카고 한인사회와 LA, 뉴욕 등 다른 대도시권의 한인사회와는 확연히 다른 점이 있음을 느끼게 된다. 뉴욕은 전세계적인 대도시인 만큼 한인사회도 굉장히 복잡하고 활동적이고, LA는 미국내 최대 한인사회인 탓인지 비즈니스 등 모든 면에서 스케일도 크고 트렌드도 매우 빠르게 변하며 모국인 한국과의 간극(間隙)도 거의 없는 것 같다. 누군가 LA는 한국의 웬만한 중소도시 같다는 지적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이 두 지역에 비하면 시카고의 한인사회는 상대적으로 규모도 작고, 활동적이지도 않을뿐더러 특정 이슈에 대한 반응도 상당히 느린 것 같다. 물론 한인들의 성향이 보수적이고 젊잖으며 깔끔하다는 장점도 있다. 하지만 모든 면에서 반응이 느리다는 것은 시카고가 어느 때부턴가 한인수도 정체되고 비즈니스도 잘 안되는 등 다른 대도시에 비해 점점 매력이 없어지고 있다는 지적을 받게 되는 주요인의 하나가 아닌가 싶다.

한국에서 충격적인 사건, 사고나 중요한 정치적 사안이 발생했을 경우, 특히 시카고의 반응에 놀랄 때가 적지 않다. 일례로 지난 10월 중순 박근혜 대통령이 오바마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등을 위해 미국을 방문했을 때와 지난 22일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이 전해졌을 때만해도 시카고 한인사회의 반응은 뉴욕과 LA 등에 비해 너무 적거나 미미했다. 박 대통령의 방미 당시 LA와 뉴욕, 워싱턴DC 등에서는 한인사회 대표단체들이 앞다투어 언론에 환영광고를 하고 성명을 발표하는 등 발빠르게 움직였다. 모국의 대통령이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미국을 방문한 사실은 불문곡직(不問曲直)하고 반길 일이다. 그러니 모국을 사랑하는 동포사회에서 없는 돈을 써가며 환영광고를 내는 등 나름 목소리를 낸 것이다. 그런데, 시카고는 어땠는가. ‘박 대통령이  워싱턴을 방문하는데 왜 시카고에서 환영광고를 내야 하는가?’ 또는 ‘예산이 없어서…’라는 반응이 대다수였다. 그렇다면 워싱턴이 아닌 LA와 뉴욕에서는 왜 환영일색의 목소리를 냈는가? 뭔가를 바라고 했다는 건가? 아니라고 본다. 그냥 우리가 나고 자란 모국의 대통령이기에 순수한 마음에서 십시일반(독지가가 부담했는지도 모르지만) 보태서 광고도 내고 한 것이리라 믿는다.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서거만해도 그렇다. 타지역에서는 곧바로 한인회 등 한인사회 여러 단체들이 분향소를 설치하고 추모광고를 내는 등 애도의 분위기를 보였다. 시카고도 부랴부랴 분향소를 설치하고 뒤늦게나마 추모광고를 내겠다는 단체들이 생겨났으나 타지역에 비해서는 역시 느렸다. 타지역 한인들만이 모두가 YS를 존경하고 그의 업적을 기리는 마음이 유난해서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겠는가? YS도 한시절을 풍미한 유명 정치인으로서 공과(功過)가 분명히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것을 떠나 한때 모국의 대통령을 지낸 인물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한데 대해 한국인으로서 애도를 표하는 마음이 자발적으로 먼저 움직였기 때문이다.

다른 건 몰라도 미국땅에 살면서 모국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없는 한인은 1명도 없을 것이다. 앞으로는 모국과 관련된 이슈라면 그것이 경사이든, 슬픈 일이든 타지역 보다, 아니 타지역 만큼이라도 비슷한 반응을 보이는 시카고 한인사회(특히 단체들)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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