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고운 최치원선생의 발자취를 찾아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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림관헌 칼럼니스트

병드신 아버지도 뵙고 싶고 황소가 토벌되고, <황소죽인 것을 하례 들이는 표(表)>도 올리었으나, 황실과 그를 거둔 장군 고변이 난세에 흔들리는 것을 도울 수 없는 자신의 한계를 느끼며, 귀국을 허락받는데, 희종황제는 국서를 지닌 사신의 신분을, 고변은 200관의 돈과 행장을, 진사시험 동기인 친구 고운(顧雲)은 <12세에 배타고 바다건너와 글로서 중원을 흔들고 18세에 과거장에 들어 단번에 급제했네.>라며 최고의 찬시(讚詩)로 그를 환송하였다. 신라에서 보낸 사신 신분인 사촌동생 최서원의 안내로 금의환향 길에 오르지만, 산신(山神)은 <오늘 부모님 뵈려 고향에 가려합니다. . . .가만히 명하여 파도신이 팔짱을 끼게 하소서. 편안이 물에 떠서 순식간에 군자국(君子國)에 돌아가는 것은 오직 산신께서 바람을 어떻게 불게 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최재욱 계원필경 인용문에서>하며 제사를 지냈음에도 가라안지 않는 풍랑으로 884년 가을 신라방포구에 도착하여 파도가 잔잔해지길 기다리다 예정보다 6개월이나 늦게, 885년 신라에 도착하였다. 지금은 비행기로 한 시간이 안 걸리고 군산-석도의 카 페리는 일주일에 세 번을 왕래하니 세상은 확 바뀌었는데, 아직도 한 중 관계는 예나 지금이나 막막하고, 고운이 대국(최치원은 신라, 계림사람임으로 당당하게 부르며, 당을 대국 또는 상국이라 부름)에서 모국을 보듯이 큰 나라 미국에서 한 때 세계 12위 경제대국이던 조국을 보는 마음은, 오래 전에 홍성 밖, 오소산자락에서 본 고운의 필적인 <인백기천>의 석각을 볼 때처럼, 필자가 살아온 타향살이를 오버랩 해서, 서러운 마음이 가슴을 적신다. 나는 지금 당나라와 신라, 대한민국과 미국을 비견하면서 나라마다 격(格)이 다르듯이 나라와 나라사이에도 숙명 같은 관계를 보고, 중공군의 침입과 흥남철수 시 구조된 피난민의 아들, 대통령 문재인의 독선에 서릿발 같은 한기를 본다.

필자가 <세계 속 자랑스런 한국을 위하여>라는 책자에서 한국계 미국시민으로서 세계최빈국에서 선진국으로 발 돋음 한 모국을 위하여 부르던 사모곡은, 고운선생이 동인(東人)으로서 서학(西學)을 통섭하고, 황소를 꾸짖던 쾌거를 빗대 설수는 없지만, 많은 애국, 애족하는 재미동포들과 함께한 조국과 미국사이에서 양국의 관계발전에 도움을 주려는 몸부림이었다. 고운은 그 당시 로마와 함께 세계 최대의 강국인 당나라 동도(낙양)와 서도(장안)에 동학의 슬기를 남김없이 자랑하며, 황제와 당의 식자들에게 찬사를 받았고, 신라사람들의 자부심과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귀국했었다. 신라 49대 헌강왕11년(885AD), 당 희종의 친서를 들고 영구귀국 한 최 치원선생은 햇수로 18년(만 17년)을 당나라에 살다가 돌아와 그곳에서 받은 직책에 버금가는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감의 직책과 왕을 직대(直對) 할 수 있는 자금어대>를 단번에 하사받았다. 헌강왕은 “선왕께서 이 절을 지으실 때 당초에 큰 서원을 밝히셨는데 김 순행과 그대의 약부(若父/아버지)견일이 이 일에 종사했다. 그러니 그대는 마땅히 비명(碑銘)을 지라며 대승복사 비명을 짓도록 했는데” 이는 후대 유학자들로부터 최치원이 불가(佛家)의 비명을 많이 짓고, 고승들과 친교를 맺었다고 비난하는 것이 얼마나 피상적인가 알 수 있다. 아마도 왕명으로 지은 이 <대승복사 비명>이 귀국 후 그의 첫 작품일 것이고, 삼국사기 진흥왕 37년 조 난낭비서도 아마 헌강왕의 부탁으로 견일이 모시던 경문왕, 18세에 국선(國仙)이 된 화랑-헌강왕의 부친인 경문왕을 위한 것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완성된 난낭비도 헌강왕이 돌아 간 후에 세워졌을 것이고 국선이면 곧 풍월(風月)주일 것인바 헌강왕이 부탁하고 그의 아버지인 경문왕에 대한 비명이 난낭비일 가능성은 크다고 보겠다. 언젠가 난낭비가 발견될 수도 있고, 다중증거법에 의하여 확인될 수도 있어 단언은 불가하나 국선이 왕이 된 경우도 드물 것이고, 그만한 훌륭한 국선도 많지 않을 터, 현재까지 난낭이 국선화랑의 보통명사일지 모른다는 학설은 최 치원이 스스로 작성한 비문이 있다는 증거가 없고, 모두 왕명이나 누구의 간곡한 요청에 의하여 붓을 든 것을 보면 난낭비도 아마 헌강왕의 왕명으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제일 크다고 할 것이다. 지금 필자는 최치원선생이 귀국 후 남긴 발자취를 더듬어 보면서 난낭비서문의 주인공을 찾아보고 현묘(玄妙)지도, 풍류(風流), 풍월(風月)주, 선사(仙史), 81자 천부경(天符經)과의 관계 등에 대한 내력을 찾아 나선 것인데 아직은 감감하다. 독자들과 함께 더 나가보겠지만 이를 발견하는데 도움이 될 정보의 단초를 보내주신다면 누구든 감사할 것이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