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이 김의 영화 세상] 가는 세월 ( Son of the Bride 20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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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이 김<영화 칼럼니스트/시카고>

10월 중순.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시험 문제 다 못 푼 학생처럼 마음이 조급해진다.

인생에 관한 모든 문제가 다 녹아있는 아르헨티나 영화를 소개한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라파엘’은 어린시절 ‘조로’놀이를 좋아했다. 보자기를 어깨에 두르고 마스크를 쓴 채 장난감 칼을 들고 신나게 뛰어 다녔다. 조로처럼 용감하고 세상에 두려울 게 없었다. 놀고 들어오면 엄마가 맛있는 버터 쿠키를 만들어 주었다. 이제 42살의 라파엘은 삶의 한가운데서 고전한다.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식당은 아르헨티나의 경기가 나빠지면서 매출이 떨어지고 종업원 임금 주는 것과 식재료 사들이기도 힘에 부친다. 대형 프랜차이즈 회사는 경영난에 부딪힌 라파엘에게 식당을 팔라고 종용한다. 하지만 부모가 일생을 바친 전통있는 식당을 자기 대에서 넘길 수는 없다. 이혼한 전처는 라파엘이 외동딸과 충분한 시간을 안 보낸다고 불평한다. 젊고 예쁜 애인 ‘나티’는 라파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데도 라파엘은 나티에게 미래를 약속하지 않는다. 치매로 요양원에 있는 어머니를  자주 찾아보지 않는 것도 마음이 편치 않다. 라파엘의 아버지는 아내를 끔찍이 사랑한다. 자기를 알아보지도 못하는 아내지만 매일 찾아가서 눈을 맞추고 얘기를 한다.  아버지의 간청에 라파엘은 일 년 만에 어머니를 만난다. 어머니는 불안한 아이처럼 칭얼대다가 어느 순간 라파엘을 알아보고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 다시 깊은 망각속으로 들어간다. 아버지는 더 늦기 전에 어머니의 평생 소원이던 성당에서의 결혼식을 올리고 싶다. 라파엘은 반대한다. 치매인 어머니가 아버지와의 혼인 예식 절차를 다 따라할 수 없을 것이 분명하다. 남편과 아들도 못 알아보는 데 이제와서 결혼식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지만 아버지는 단호하다. 아주 잠깐이라도 아내가 자신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을 알고 행복하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라파엘은 신부님을 만나서 예식 절차를 상의한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하나님 앞에서 부부 서약을 할때 신부가 자신의 의지로 대답을 해야만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릴수 없다. 치매인 어머니가 주례자의 질문에 제대로 대답할 리가 없다. 아버지는 낙담하고 라파엘은 머리가 아프다.  라파엘이 갑자기 심장 발작을 일으키고 병원에 입원한다. 나티는 곁에서 정성껏 간호한다. 죽음의 문턱에서 벗어난 라파엘은 살면서 만나는 문제들이 힘들고 지겹다.

그때 라파엘의 어린 시절 친구 ‘후안 카를로스’가 20년 만에 나타난다. 무명배우인 ‘후안’은 차사고로 아내와 딸을 한꺼번에 잃었다. 극심한 비극을 겪었음에도 후안은 삶에 대한 기대와 사람에 대한 애정을 포기하지 않는다. 후안의 따뜻하고 수다스러운 오지랖은 라파엘 주변에 파문을 일으킨다. 골치아픈 현실에서 자꾸 도피하려는 라파엘에게 실망한 나티가 이별을 선포하자 라파엘은 그녀를 사랑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라파엘은 인생의 문제들과 마주하기로 결심하고 식당을 매각해서 빚을 정리한다. 그리고 후안을 신부님으로 위장시키고 양로원에서 부모의 결혼식을 거행한다. 어머니는 영문을 모른 채 꽃다발을 들고 즐거워 한다. 예식은 번개처럼 진행되고 부부 서약 순간에 어머니가 투정을 부린다. 라파엘이 설득하느라 진땀을 빼는 데, 순간 어머니가 아버지를 알아보고 미소지으며 말한다. 나는 이 사람을 사랑해요. 결혼식이 끝나고 전처와 딸, 나티와 후안, 하객들은  라파엘이 새로 인수한 작은 식당에 모여서 축하 파티를 연다.

라파엘은 위기의 남자다. 42세에 삶을 돌아보니 무엇하나 제대로 이룬 것이 없다.

식당은 힘들고 결혼에 실패하고 좋은 아빠도 못되고 좋은 아들은 더더욱 아니다. 새로운 사랑도 불안하다. 하지만 늙고 병든 아내를 위해 노력하는 아버지나 슬픔을 딛고 씩씩하게 살아가는 후안을 보면서 변한다. 어차피 인생은 문제투성이고 살아가면서 하나씩 해결할 수밖에. 살면서 문제가 없는 게 진짜 큰 문제인지도 모른다. 영화속 인물들은 어리숙하고 웃기고 인간적이다. 특히 삶의 무게에 짓눌려 바둥거리는 라파엘은 공감과 한심함, 연민을 불러 일으킨다. 라파엘의 늙은 부모는 백발과 주름진 얼굴만으로도 인내하며 삶을 견뎌낸 자들의 우아함과 존재감이 넘친다. 어설프게 예식을 진행하던 신부님역 후안이, 어머니가 잠깐 정신이 돌아와 아들의 어렸을 적 친구를 알아보고 “얘야, 버터 쿠키 줄까?” 라고 말하자 눈물을 참느라 애쓰는 장면은 영화의 백미이다.  우리와 우리 이웃들의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