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이 김의 영화 세상] 너를 잃은 후(Rabbit Ho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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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이 김 영화 칼럼니스트/시카고

 

해를 넘기기 전에 집안 정리를 한다. 불필요한 것들을 버리고 또 버리는 데도 여전히 뭐가 많다. 그 중 애물단지가 책이다.  버릴 책을 골라내는 게 힘들다. 정리하다가 박완서 작가의  “한 말씀만 하소서”를 다시 읽었다.  스물여섯살 생때같은 외아들을  잃고 고통과 절망 속에 써내려간 어미의 처절한 절규.  자식을 먼저 보낸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을 생각했다.

 

‘베카’와 ‘호위’ 부부는 거의 완벽하게 행복했다. 8개월 전까지.

네 살 아들 ‘대니’가  개를 쫒아가다 집 앞에서 차에 치어 죽었다. 영화는 아들이 죽은 후 부부가 살아가는 일상을 보여준다.

엄청난 상실과 비극을 겪고도 주어지는 매일의 삶은 살아가야 한다.

호위는 벤츠를 타고 아침마다 출근하고, 베카는 정원에 꽃을 심고 청소와  빨래를 한다.  겉으로는 평범하고 정상적인 부부의 모습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내면은 고통과 슬픔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다.

베카는 집안 곳곳에 생생하게 남아있는 아들의 흔적과 기억을 견디기 힘들다.

어떻게든 상황을 바꿔보려고 애쓰는 남편에게도 상냥할 수가 없다. 남편이 자신을 만지는 것도 싫다. 호위는 자식을 잃은 부부들의 모임에 나가자고 아내를 설득한다. 마지못해 참석한 베카는 다른 부부들이 자신들의 비극을 하나님의 선한 뜻이라거나, 죽은 아이가 지금은 좋은 곳에서 평안할 거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 심하게 반발한다.

베카는 모임을 거부하지만  위로가 절실한 호위는 혼자서도 계속 참석한다.

베카의 동생이 남자랑 놀아나다가 덜컥 임신을 한다. 책임감 없고 남자 좋아하고 아직도 엄마한테 얹혀서 사는 여동생의 임신에 베카의 심정이 복잡하다.

베카는 아들 대니의 옷들을 세탁해서 가져 간다. 동생의 애인은 무능력한 남자이다. 아직도 새 것같은 대니의 옷들을 동생한테 주면서 아기에게 입히라고 한다.  동생은 죽은 조카의 옷은 싫다고 거절한다. 상처받은 베카는 아들의 옷 전부를 구호품 통에 버린다. 방과 벽, 냉장고 문에 붙어있던 대니의 그림과 공작들도 전부 치운다. 이 일로 남편과 심하게 싸운다. 남편은 밤마다 휴대전화에 녹화된 아들의 비디오를 보면서 슬퍼한다. 베카는 동네를 운전하다가 대니를 친 고등학생 ‘제이슨’을 만난다.

다람쥐를 쫒는 개, 개를 쫒아 길에 뛰어든 꼬마, 그리고 그 아이를 친 열여덟살 남자 아이.  모든 상황이 완벽하게 예정되어 있었다.

제이슨은 베카에게 그 날 자기가 제한 속도보다 조금 더 스피드를 냈을지도 모른다고  고백한다. 회한과 자책이 가득한 제이슨의 눈을 보면서 베카는 괜찮다고 말한다. 베카는 제이슨이 읽은 책을 빌려다 보고, 제이슨이 그리는 만화책에 흥미를 가진다. 그 날부터 두 사람은 가끔씩 공원에서 만난다. 베카는 직접 만든 케익을 갖다주고 제이슨은 맛있게 먹는다. 제이슨이 그린 만화책에 나오는 또 다른 우주와 그 곳에 사는 사람들 얘기도 나눈다. 둘 사이에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신기한 우정이 싹튼다.

베카는 집을 내놓고 이사를 가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아들이 죽은 후 처음으로 집

 

뜰에서 바베큐 파티를 한다. 친구가족들과 엄마, 여동생, 여동생의 남자까지 초대한다.

 

영화 제목인 ‘Rabbit Hole’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앨리스가 원더랜드로 들어가는 입구이고 제이슨이 그린 만화책의 제목이다. 제이슨은 자신의 죄책감을 만화책의 내용 속에서 용서받고  희망을 가지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영화 내내 주인공 부부의 비통과 절망이 실감나게 다가온다. 갑자기 닥친 비극에서도 일상의 삶이 계속된다는 게 형벌이면서 축복인 것 같다.

화장기 없는 ‘니콜 키드먼’의 베카는 소름끼치도록 훌륭하다.

아들이 죽었는데도 여전히 돌아가는 세상에 대해 신에게 대들고 울부짖는 박완서 작가가 한국의 어머니라면, 베카는 절제된 슬픔으로  자식잃은 어미의 처절함을

보여준다. 그래도 희망을 잃지 않는다.  어머니는 위대한 존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