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한국을 사랑한 선교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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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문 목사(시카고 나눔교회 담임)

앨리스R. 아펜젤러

평생에 여성 교육에 남달리 관심을 가지고 헌신한 앨리스 아펜 젤러는(Alice R. Appenzeller) 서울 정동에서 태어났다. 최초의 백인이었던 엘리스는 아버지 아펜젤러스(Henry Gerhart Appenzeller)가 세운 벧엘 예배당에서 세례를 받고 어린 시절을 서울에서 보냈다. 학업을 위해 동생, 어머니와 미국으로 건너가 펜실베이니아 주 랭커스터에서 여학교를 마친 후 코네티컷 주 웰슬리 대학과 콜럼비아대학, 보스톤 대학교에서 학,석,박사 학위를 받고 1914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이화학당의 제6대 당장으로 취임하고 3년 후인 1925년 대학과 및 예과를 이화여자 전문학교로 개칭하고 이화여자 고등학교와 분리 했으며 자신은 이화 전문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1935년 현재의 이화 여자대학교 위치로 학교를 이전 하였다. 그녀는 아버지 아펜젤러 목사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교육선교에 누구 보다도 앞장서는 교육에 열정이 있었다. 아버지 아펜젤러 (Henry Gerhart Appenzeller) 목사가 한국 교육에 끼친 영향은 대단했다. 우선 한국 최초의 근대식 교육 기관으로서 배재 학당을 설립 했으며 1888년 감리교 정동 교회를 세웠다. 한국 개신교의 어머니 교회와 같이 교회의 창설자 겸 목사로 재임 중에 1902년 7월 12일  45세라는 한창 일할 나이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그의 죽음은 목포에서 열릴 예정 이었던 성경 번역자 회의에 참석하러 인천서 배타고 가다가 배가 충돌하는 바람에 목포 앞 바다에서 익사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성경을 번역 하다가 순사한 것이다. 허니 아펜젤러 목사는 단순한 목회자 또는 교육자가 아니라 어학자이었다. 그는 한국교회 사상 최초의 성경번역 위원중의 한 사람이었으며, 찬송가 편집위원 중의 한사람 이기도 했다. 이런 아버지 밑에서 어린시절 조선말을 배우고 조선의 관습과 음식에 익숙하여 자신의 고향을 조선으로 여겼다. 고등 교육을 위해 15년정도 조선을 떠났지만 돌아와서는 적응하는 문제가 전혀 없었다. 앨리스 아펜젤러는 아버지 뒤를 이어 조선땅에서 선교사로 교육자로 이화학당에서 학생을 가르치며 여성 고등교육의 필요성을 느끼며 여자대학 설립을 위하여 기금마련에 큰역할을 하여 남자학교 연희 전문학교와 어깨를 나란히 할수있는 이화여자 전문학교로 인가를 받았다.  학생들에게 사회봉사 활동과 농촌계몽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시켜 한국 여성과 사회를 위한 나눔과 봉사의 정신을 실천하게 하였다. 앨리스 아펜젤러스는 한국 여성에게 기회가 주어 진다면 어느나라 여성 못지않게 지성과 매력, 품성을 지닌 기독교 여성이 될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녀는 열린 마음으로 모든 사람을 대하였고 많은 사람들의 말에 항상 귀를 기울렸다. 김성은 교수에 의하면 앨리스에 대한 평가에서 “한국 여성의 지위와 생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미래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한국여성 고등교육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 교육의 양적·질적 성장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면서 “한국여성이 국내에서도 고등 전문교육을 제대로 받을 수 있도록 교육기회, 환경, 내용을 제공함으로써 의식과 실력을 갖춘 한국여성 지식인이 배출될 수 있었다”고 전했다. 앨리스는 우수한 학생들을 선발하여 유학을 보내고 학업을 마치고 돌아오면 핵심 일꾼으로 봉사하게 했다. 그녀는 미일 관계가 악화 되면서 일제는 한국에 있는 선교사들의 철수를 강요하여 1940년 본국인 미국으로 떠나게 된다. 그녀는 하와이에 가서도 일제를 피해 이주해온 한인들과 함께 살면서 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쳤다. 한국이 해방 되면서 다시 한국에 가서 마지막 사역을 이화여대 대학교 강당에서 설교도중 뇌일혈로 쓰러져 향년 66년 일기로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다. 앨리스 묘비에 새겨진 글귀대로 그녀는 사랑의 실천자요 나눔의 삶을 행동으로 보여준 분이다. 우리 한국인 마음에 영원히 기억 될것이다.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노라” (Not to ministered unto but to minis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