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편견과 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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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무웅(자유기고가/글렌뷰)

어린시절에 듣고 배운 것은 쉽사리 우리의 뇌리에서 없어지지를 않는다. 1950년 전후에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부터, 21세기에 속한 어린이에 이르기 까지, 한국의 전래 동화(傳來童話) 하나 둘 쯤은 듣고 자랐다. 그 중에 제일 기억에 남은 것은 장화홍련전과 콩쥐 팥쥐일 것이다.  또한 서양 문화가 들어 오면서 알게 된 것이 신데렐라다. 이야기의 공통점은 계모라는 인물이 나오며,  주인공인 소녀를 가혹하게 다루는 이야기 이다. 결과는 해피엔딩이 되는 것이지만. 우리의 기억에 남은 것은 계모는 나쁜 사람이라는 의미만 남은 것 같다. 이 이야기를 듣고 자란 세대는 자연히 계모는 나쁜 사람이다라는 편견을 갖게 된듯 하다. 편견(偏見)은 공정하지 못하고, 한 쪽으로 치우친 생각을 의미한다. 또한 편견은 단순하고 일반화된 생각이기도 하다.  편견(prejudice)은 어떤 집단의 구성원에 대한 태도를 말한다  다른 집단을 적대시하며, 다른 집단의 결점만 눈여겨 보며 거대포장하여 악(惡) 선전을 한다.

한국 사회를 예를 들면 계모로 부터 학대 받는 아이들은 전체의 4%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친 부모로부터 학대받고 있는 아이들은 76%나 된다고 한다. 물론 이것이 절대적인 통계 기준은 아니다. 계모로 부터 학대 받는다는 편견. 이러한 편견은 오만(傲慢)한 편견이다. 조금 유식하고, 지식이 있다는 자들이 갖는 편견과 오만 함은 우리 주변에서 자주 보게 되는 것들 중에 하나이다. 편견이란 것은 인생관과 가치관을 왜곡시켜서 삶의 방향을 다르게 만들기도 한다. 자기의 생각이 편견인 줄도 모르고 타인에게 따르라고 강요하는 오만한 사람들을 자주 보게 된다.

사람이 살아 가면서 모든 인간은 한 일에 대한 후회와 하지않은 일에 대한 후회라는 두가지 후회를 한다. 그러나 후회는 오래 가지 않고 곧 잊게 된다. 하지 않은 일에 대한 후회는 쉽게 정당화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이럴 경우 정당화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주 지독한 편견이 된다.  한국인들이 생각하고 있는 정치적인 편견과 미국인들이 갖고 있는 흑백 인종적인 차별에 대한 편견은 쉽게 가라 앉을 수 없다. 이 두가지가 오만에 가득찬 편견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잘 다듬어지지 않은 편견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손해를 보거나, 마음의 상처를 받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이를 보다 못해 한마디 한 사람이 있다. 영국의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 Francis Bacon )이란 분은 “편견을 세탁해야 한다“ 라는 말도 서슴없이 했다. 그 이유는 어느 집단에 대한 반감과 증오심을 토대로 한,  말도 안되고, 이해키도 어려운 관행이라는 미명으로 편견을 쓰기 때문이다. 편견은 계몽을 해서 고쳐야 된다고 주장을 한 사람은 칸트(Immanuel Kant)이다. 편견의 출발은 전통, 습관, 관습, 교육에서 부터 출발로 이해를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편견에 젖은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 생각하는 힘이 부족한 사람으로 봐야 한다. 이런 걸 가지고 못난이들의 편견이라 칭하고 싶다.

이민사회에 뿌리 내린 종교를 보면 알 수가 있다. 물론 이것이 한국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항상 편견에 사로 잡혀 무리지어 또아리를 틀고 종교 생활을 한다. 그 흔한 분규는 모두가 편견에서 나온 오만함의 결정체이다. 배워서 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이 자기의 오만함이 정당하다고 믿고들 산다. 진리가 무엇인지 모르고들 있다. 오랜 종교 생활에서 얻은게 없는 사람들의 소행일 뿐이다.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갖는 유연함을 가져야  한다.

UN의  NGO 국제의장인 키란 빌리라는 분은 교회에서 분규를 일으키는 사람들은 모두가 자기를 정당화 하기 위하여 종교를 이용하고 있다고 했다. 전쟁도 마찬가지다. 오랜 역사를 보면, 모두가 신을 위하거나, 신의 계시라고 한다. 자기의 생각이나 주장을 신은 알거라는 오만한 생각이 가장 큰 편견에 사로잡힌 것이다. 공통된 가치관을 갖고 있다면, 오직 사랑과 평화만 있을 것이다.  거짓의 거룩으로 신을 욕 보이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