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적 석학 조장희 교수 인터뷰
본 특파원이 고려대학교 초청 강의로 서울 안암동 고려대학교 캠퍼스를 찾았던 지난 8월 6일, 처음 조장희 교수를 만났다. 그날의 강렬했던 첫 만남을 시작으로, 이후 몇 차례의 전화와 문자를 통한 인터뷰가 더 이어진 뒤에야 비로소 그의 깊고 거대한 삶의 궤적을 담아낼 수 있었다. 노벨상에 가장 근접한 한국인 과학자. CT, MRI, PET라는 현대 영상의학의 삼총사를 모두 개발한 세계 유일의 인물. 89세의 나이에도 여전히 현역으로 뇌라는 미지의 우주를 탐험하고 있는 석학과의 만남은 시작부터 경외심 그 자체였다. 그의 연구실은 한평생을 바친 연구 역사가 고스란히 담긴 박물관과도 같았다. 사진 속 기기들이 지금도 전 세계 병원에서 인류의 생명을 구하고 있음을 생각하니 그의 존재가 더욱 거대하게 다가왔다. 벽면에 걸린 흑백 사진 속, 환하게 웃고 있는 젊은 과학자의 총명한 눈빛이 세월을 넘어 그의 얼굴에 그대로 포개졌다. 인자한 미소로 기자를 맞는 그에게서 시대를 개척한 거인의 향기가 났다.
호기심 많던 라디오 소년, 운명의 나사를 조립하다
세계적인 과학자의 어린 시절은 어땠을까. 그는 웃으며 말했다. “원래 ‘공부’ 과가 아니었어요. 초등학교 때는 미군 부대에서 얻은 배터리를 남대문시장에 가지고 가서 라디오 부품으로 맞바꾸는 게 저한테 훨씬 중요한 일이었죠.” 밤새 라디오를 조립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지만, “심각하게 과학자가 되어야겠다고 꿈꾼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아요. 그저 에디슨 같은 사람이 되면 참 좋겠구나 정도의 생각만 했지요.”
운명은 소년에게 순탄한 길을 허락하지 않았다. 중학교 2학년,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학업은 중단됐다. 피난지에서 장사를 하며 3년의 공백이 흘렀다. 다시 서울로 돌아와 장사를 하던 어느 날, 교복 입은 동기생의 모습이 그의 인생을 흔들었다. “며칠 동안 머릿속에 그 장면만 떠올라서 결국은 학교에 찾아갔어요.” 머뭇거리는 그를 알아본 1학년 때 담임선생님과의 재회는 극적이었다. “만약 그때 선생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제 인생에 더 이상의 공부는 없었을지도 몰라요.”
3년의 공백을 딛고 고등학교 2학년으로 복학했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처음 본 시험은 거의 꼴찌였고, 수학은 빵점도 맞아봤어요.” 그러나 1년 만에 중간 성적까지 따라잡았고, 모두의 만류에도 서울대학교에 원서를 내밀었다. “사람에 따라 좀 더 대담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 있잖아요? 제 성격이 그랬던 거 같아요. 결과가 좋았으니까 미화되는 측면도 있고요.”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그는 과감하게 도전했고, 운명은 그의 편에 서주었다.
산(山)이 가르쳐준 도전, 절벽 끝에서 길을 찾다
서울대 통신공학과에 입학했지만, 그의 청춘을 뜨겁게 달군 것은 전공 공부가 아닌 ‘산’이었다. “무언가에 한 번 빠지면 헤어 나오지 못하는 성격인데다가, 죽기 살기로 바위 타고 그런 게 저한테 딱 맞았어요.” 그는 전문 산악인을 꿈꿀 정도로 산에 미쳐 있었다. “도전할 목표가 생기면 힘이 마구 솟구친다고나 할까요?”
겨울에는 스키에 빠져 전국대회에서 은메달까지 목에 걸었다.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공부를 못하다보니 핑계 삼아 등산과 스키에 목을 맸던 것 같습니다.”라고 겸손하게 말했지만, 그 시절의 경험은 그의 인생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알게 모르게 도움이 되었으리라 믿어요. 연구를 할 때도 새로운 모험 앞에 서면 도전 욕구가 샘솟고, 남이 하기 싫어하는 일도 하고 싶고 그랬으니까요.” 깎아지른 절벽과 누구도 밟지 않은 설원을 헤쳐 나갔던 경험은, 세계 학계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그만의 길을 열어가는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스웨덴의 한 스승, ‘살아있는 연구’에 눈을 뜨게 하다
군 복무를 마치고 돌아오자 더 이상 함께 산에 오를 친구들이 없었다. 자연스럽게 다시 책을 잡았고, 파고들수록 공부의 재미에 빠져들었다. 석사 졸업을 앞두고 우연히 발견한 해외 연수자 선발 공고는 그의 인생에 또 한 번의 극적인 전환점이 된다. 마감일에 부랴부랴 원서를 받으러 갔지만 이미 시험 시작 시간은 15분이나 지나 있었다. 허탈하게 돌아서는 그에게 시험 감독관이 “어차피 왔으니 시험이나 보고 가라”며 필기도구까지 빌려준 작은 인심이, 그를 스웨덴 웁살라 대학으로 이끌었다.
그곳에서 만난 지도교수 카이 시그반(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의 제자인 투베 교수는 ‘살아있는 연구’가 무엇인지를 온몸으로 보여주었다. 실험 데이터를 들고 간 조장희 박사에게, 투베 교수는 그 자리에서 직접 계산을 해보이며 이론값과 실험값의 차이를 날카롭게 지적했다. “한국에서는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었어요. 모든 것을 훤히 알고 있으면서 꼼꼼히 체크까지 하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죠. 적당히 하면 안 되겠구나, 결심했어요.” 그날 이후 그의 연구 자세는 180도 달라졌다. 주말도 휴일도 없이 연구실을 지켰고, 저녁 빵 살 시간을 놓쳐 굶기 일쑤였다. 그의 우직한 성실함을 눈여겨본 투베 교수 덕분에 그는 1년의 연수를 마치고 박사과정까지 밟을 수 있게 되었다.

‘까짓것 한번 해보자!’, 경솔함이 피워낸 위대한 혁신
박사 학위 후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UCLA 부교수로 재직하던 1972년, 운명적인 제안을 받는다. 당시 영국에서 막 개발된 CT는 원리조차 베일에 싸인 최첨단 기술이었다. 교수회의에서 학과장이 “우리 대학에서 CT의 비밀을 벗겨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을 때, 아무도 선뜻 나서지 않았다. 그때, 그의 도전정신이 또다시 발동했다. “아무도 나서지 않기에 ‘까짓것 하면 되지’ 싶어서 깊게 생각해보지도 않고 하겠다고 큰 소리를 쳐버렸죠.”
연구실로 돌아온 그는 곧바로 후회했다. 연구비도 없이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와서 돌이켜 생각하면, 그때 저의 경솔함에 박수를 보내고 싶어요. 너무 신중하면 새로운 연구를 시작하기가 오히려 어렵죠.”라고 말한다. 그는 컴퓨터 시뮬레이션 기법을 이용해 CT의 수학적 비밀을 풀기로 결심하고 학생들과 밤낮없이 연구에 매달렸다. 석 달 만에 마침내 두개골 부분의 시뮬레이션 영상을 얻는 데 성공했고, 이는 세계 학계와 산업계를 뒤흔든 대성공이었다.
CT 연구의 성공은 세계 최초 Ring PET 개발로 이어졌다. PET는 방사선을 이용해 인체의 기능적 변화까지 촬영하는 장비로, CT와 수학적 배경이 같다는 점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개발에 한창 몰두하던 중, 워싱턴 대학에서도 비슷한 장치를 개발하고 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연구와 개발은 세계 처음이 아니면 바로 그 다음날이라도 빛을 못 보거든요.” 승부욕까지 발동한 그의 팀은 주말도 밤도 반납하고 연구에 매달렸고, 마침내 세계 최초의 Ring PET를 완성했다. 완성되던 날, 그는 뢴트겐이 자신의 몸을 실험했듯 기꺼이 PET 안으로 가장 먼저 들어갔다. 화면에 떠오른 자신의 심장 사진을 보았을 때의 감격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순간으로 남았다.
정직, 그 바보 같은 우직함이 최후의 승리를 이끈다
혁신적인 연구 성과에도 불구하고 그의 길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뛰어난 실적에도 불구하고 UCLA에서는 크게 환영하지 않았다. 그는 타협을 모르고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에는 ‘아니다’라고 확실하게 말하는 성격 탓에 교수 사회의 역학 관계에 적응하지 못했다. “비굴하게 사는 것보다는 손해 보더라도 당당하게 사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절망적인 상황이었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뭐가 잘 안 되면 더 좋은 일이 생기려고 안 되는구나,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죠.” 그의 긍정적인 믿음처럼, 그는 곧 컬럼비아 대학의 정교수로 스카우트되었다. 학부 성적이 나빠 지원조차 못 했던 대학에 15년 만에 정교수로 입성한 것이다.
그의 삶을 관통하는 또 하나의 키워드는 ‘정직’이다. 그는 스웨덴 동료 교수의 일화를 통해 정직의 중요성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학회 등록비를 아끼기 위해 교수를 박사 후 과정으로 등록하라고 권했던 자신을 의아하게 쳐다보던 동료의 눈빛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저는 나름대로는 정직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했어도, 이익을 볼 수 있다면 작은 거짓말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하는 게 몸에 밴 사람이었던 거죠.” 그는 뇌과학적으로도 거짓말을 하면 뇌가 불필요한 에너지를 쓰게 된다며, 정직이 결국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가장 효율적인 길이라고 강조한다. “바보같이 우직한 사람이 결국은 이긴다는 게 제 평생 느낀 겁니다.” 남의 기계를 고쳐주느라 정작 자신의 연구는 뒷전이었던 학생을 그는 기억하고 기회가 왔을 때 추천했다. 당장의 이익을 따지는 약은 사람보다, 묵묵히 자신의 자리에서 필요한 역할을 해내는 ‘바보 같은’ 사람이 사회에서 진정으로 성공한 사람이라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KAIST의 스타 연구실, 후학을 향한 뜨거운 애정
컬럼비아 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그는 KAIST 교수를 겸직하며 20년간 태평양을 오갔다. 컬럼비아 대학의 10분의 1밖에 되지 않는 월급이었지만, 한국 학생들의 뜨거운 열정이 그를 고국으로 이끌었다. “카이스트 학생들은 주말도 기꺼이 반납하고, 국제 학술대회가 다음 주에 있으니 함께 준비하자고 하면 밤샘도 흔쾌히 했어요.” 그의 연구실은 3교대로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았고, ‘스타 연구실’이라 불릴 정도로 학생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그는 제자들과 함께 연구하고 토론하는 것을 진정한 기쁨으로 여겼다. “좋아서 하는 거고, 또 열심히 해서 학회 가서 떳떳하게 발표해야지, 뭐 이런 동기가 생기면 밤새는 게 그다지 어렵지 않아요.” 그의 지도 아래 수많은 인재들이 성장했고, 그가 KAIST에서 일군 MRI 연구는 한국 영상의학 기술 발전의 초석이 되었다.
89세 현역의 꿈, K-뇌과학의 미래를 그리다
여든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그는 여전히 ‘현역’이다. 나이가 들면 뇌 기능이 쇠퇴한다는 통념에 대해 그는 단호하게 반박한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 게 아니라 쓰지 않으니까 쇠퇴하는 거예요. 학문은 다릅니다.” 그는 지금도 고려대학교 뇌과학융합센터를 이끌며 21세기 인류의 가장 큰 도전 과제인 뇌의 비밀을 풀기 위해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인터뷰 내내 그는 자신의 업적을 내세우기보다 한국의 미래를 더 걱정하고 희망을 이야기했다. “21세기에 미지의 뇌연구가 중요합니다. 이를 위해 뇌연구 및 뇌영상 연구를 한국이 리드했으면 합니다.” 그는 K-방산, K-반도체처럼 이제 한국이 영상진단장비 분야에서도 세계를 선도할 역량이 충분하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의 마지막 꿈은 후배들이 자신을 뛰어넘어 한국에서 노벨상을 받는 것이다. “과거에는 인프라가 부족했지만 이제는 세계적으로 앞선 연구를 할 때가 되었다고 봅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연구실을 나서는 길, 그의 마지막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그것은 한 위대한 과학자의 개인적인 소망을 넘어, 우리 모두를 향한 격려와 희망의 메시지였다. 라디오를 조립하던 호기심 많은 소년이 인류의 뇌를 들여다보는 거인이 되기까지, 그의 삶은 ‘도전’과 ‘우직함’이라는 두 단어로 요약된다. 그의 평생에 걸친 숭고한 도전이 이제 K-의료기계의 세계화라는 더 큰 꿈으로 영글고 있다. 미지의 세계를 향한 그의 위대한 여정에, 이제는 우리가 뜨거운 응원과 지원으로 함께 답할 차례다. 그의 꿈이 현실이 되는 날, 우리는 대한민국이 낳은 또 다른 거인들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이가희 시카고한국일보 한국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