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카고 한인사회의 법적 버팀목이 되다
전쟁의 사선에서 법정까지… 동포 위해 바친 삶
추방 위기 한인 지키며 이민사회 정착의 길 열어
시카고한인회 창립과 한인회관 건립에 앞장
[편집자주] 본지는 시카고 한인사회의 토대를 일군 1세대 원로들의 삶과 발자취를 기록하는 연재 기획 ‘시카고 한인 개척자들’을 이어가고 있다. 열 번째 인물은 시카고 한인사회의 산증인이자 미주 최초 한인 1세 변호사인 심기영 전 시카고 한인회장이다.
심기영 회장은 6·25전쟁에 참전해 미군과 함께 장진호 전투와 흥남 철수 작전 등 수많은 전장을 누볐다. 1953년 미국 유학길에 올라 노스웨스턴대학교 로스쿨을 졸업한 뒤, 1963년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며 한인 법조인의 새로운 길을 열었다. 초창기 한인 이민자들의 추방과 체류 문제를 비롯해 사업·부동산·민사 문제를 폭넓게 도우며 동포사회의 법적 버팀목이 됐다. 제4대·5대·13대 시카고한인회장을 역임하고 한인회관 건립에도 앞장섰으며, 시카고한인변호사협회와 세계한인변호사협회 초대 회장을 맡아 한인 법조인들의 연대와 후배 세대의 길을 넓혔다. 전쟁의 사선에서 법정까지, 평생 동포들의 삶과 권익을 지키는 데 힘써온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 본다.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아침, 서울 용산경찰서 뒤편 집 근처로 탱크 행렬이 지나갔다. 교복 차림의 열아홉 청년 심기영은 굉음을 내며 달리는 탱크를 보는 순간 전쟁이 시작됐음을 직감했다.
짐을 꾸릴 시간도, 가족에게 작별을 고할 여유도 없었다. 그는 주머니에 돈 몇 푼만 챙긴 채 국군 패잔병과 경찰들을 따라 집을 나섰다. 마포나루를 건너 철길을 따라 수원과 대전, 대구를 거쳐 부산까지 내려가는 기약 없는 피란길이었다.
심 회장은 “그때는 가진 것도, 아는 사람도 없었고 앞일을 계획할 수도 없었다”며 “그저 살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남쪽으로 내려갔다”고 회상했다. 독일 유학을 꿈꾸며 미래를 그리던 청년에게 전쟁은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아침, 서울 용산경찰서 뒤편 집 근처로 탱크 행렬이 지나갔다. 교복 차림의 열아홉 청년 심기영은 굉음을 내며 달리는 탱크를 보는 순간 전쟁이 시작됐음을 직감했다.
짐을 꾸릴 시간도, 가족에게 작별을 고할 여유도 없었다. 그는 주머니에 돈 몇 푼만 챙긴 채 국군 패잔병과 경찰들을 따라 집을 나섰다. 마포나루를 건너 철길을 따라 수원과 대전, 대구를 거쳐 부산까지 내려가는 기약 없는 피란길이었다.
심 회장은 “그때는 가진 것도, 아는 사람도 없었고 앞일을 계획할 수도 없었다”며 “그저 살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남쪽으로 내려갔다”고 회상했다. 독일 유학을 꿈꾸던 평범한 학생의 삶은 그렇게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전쟁이 바꾼 운명
1931년 평안북도 구성에서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할아버지가 광산업을, 아버지가 정미소를 운영해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어린 시절에는 할머니의 뜻에 따라 1년 동안 서당에 다니며 천자문과 명심보감 등을 익혔다. 또래보다 한 해 늦게 소학교에 입학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심 회장은 “할머니께서는 신식 교육만으로는 사람의 근본을 세우기에 부족하다며 나를 먼저 서당으로 보내셨다”며 “어릴 때는 뜻도 모른 채 천자문과 명심보감을 외웠는데, 훗날 전쟁터에서 중공군 포로와 필담을 나누며 정보를 파악할 때 그 배움이 결정적인 도움이 됐다”고 돌아봤다.
소학교를 마친 그는 어린 나이에 홀로 서울로 올라와 경복중학교 입학시험을 치렀다. 합격 후에는 명륜동에서 하숙하며 학업을 이어갔다. 일제 치하에서 차별을 딛고 앞으로 나아가려면 결국 공부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절박함이 일찍부터 그의 마음에 자리 잡았다.
그는 “좋은 학교에 들어가 실력을 갖춰야만 내 길을 열 수 있다고 생각했다”며 “서울에 올라와 하숙하며 공부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전쟁은 그를 교실이 아닌 피란길로 내몰았다. 가족과 헤어진 채 부산까지 내려온 심 회장 앞에는 또 하나의 선택이 놓였다. 일본으로 피신해 전쟁을 피할 것인지, 아니면 조국에 남아 싸울 것인지였다.
그는 결국 군 입대를 택했다. 심 회장은 “일본으로 가면 목숨을 지킬 수도 있었지만, 그때 떠나면 조국을 버리고 도망가는 것 같았다”며 “그래서 군대에 들어가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육군사관학교 입대를 시도했으나 당시 모집이 중단돼 뜻을 이루지 못했고, 이후 일반 훈련소에 자원입대했다.
◇ 서당에서 익힌 한문, 전장의 생명줄이 되다
전쟁 속에서 그의 운명을 다시 바꾼 것은 어린 시절부터 익힌 언어였다. 서당에서 배운 한문과 경복중학교에서 다진 영어 실력을 인정받아 미 육군 3사단 대대본부 작전정보과에 배속됐다.
그의 주요 임무는 포로 심문과 정보 전달, 작전 보조였다. 중공군 포로가 붙잡혀 오면 한문으로 글을 주고받으며 부대 위치와 병력 등 작전에 필요한 정보를 파악해 미군 측에 전달했다. 할머니의 손에 이끌려 뜻도 모르고 외웠던 천자문이 수많은 병사의 생사와 작전에 연결되는 순간이었다.
그는 낙동강 전투와 원산 상륙작전, 장진호 전투, 철원 전투, 흥남 철수 작전 등 수많은 격전지에서 미군과 함께 사선을 넘나들었다. 심 회장은 “중공군 포로가 잡혀오면 한문으로 필담을 나누며 작전에 필요한 핵심 정보를 파악해 미군 측에 전달했다”고 설명했다.
그중에서도 전장의 최전선에서 겪은 흥남 철수 작전의 기억은 평생 지워지지 않았다. 당시 중공군의 대공세로 함흥과 흥남 일대를 제외한 함경도 전역이 적의 수중에 넘어갔고, 원산마저 점령되면서 육로가 완전히 막혔다. 병력과 피란민이 남쪽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은 바다뿐이었다.
심 회장은 “1950년 흥남 철수 때는 피란민 5만 명을 먼저 배 화물칸에 태우고, 군인들은 12월의 매서운 추위 속에서 침낭 하나에 의지한 채 갑판 위에서 잠을 청했다”고 회상했다.
자신도 가족의 생사를 알지 못한 채 피란민들이 배에 오르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그렇게 부산에 도착한 그는 부두에서 기적처럼 부모와 어린 동생들을 다시 만났다. 피란길에 오른 부모가 아들의 행방을 수소문한 끝에 부두까지 찾아왔다.
심 회장은 “피란 온 부모님이 수소문해 부두로 나와 계셨다”며 “그제야 비로소 가족의 생사를 확인할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 300달러를 들고 화물선에 오르다
가까스로 사선을 넘어 무사히 남쪽으로 내려와 군 복무를 마쳤지만, 전쟁의 상흔 속에서도 배움에 대한 갈증은 식지 않았다.
특히 작전정보과에서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미군 장교와의 인연은 그에게 새로운 인생의 길을 열어주었다. 심 회장의 성실함을 눈여겨본 미군 장교의 도움으로 아이오와주 듀북 대학교(University of Dubuque)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할 기회를 얻었다.
당시 미국 유학 시험의 경쟁은 치열했다. 미국 대사관에서 실시한 영어 시험에서는 영문 잡지 기사를 읽고 내용을 요약해야 했다. 마침 2차 세계대전 당시 부상당한 미군의 이야기를 다룬 기사가 문제로 나왔다. 미군과 함께 복무하며 군사 용어와 부대 조직에 익숙했던 심 회장에게는 친숙한 주제였다.
심 회장은 “운이 참 좋았다”고 회상했지만, 준비된 자만이 잡을 수 있는 기회였다. 500여 명 가운데 20명 안에 들며 시험을 통과한 그는 1953년 8월, 300달러를 손에 쥐고 화물선에 올라 태평양을 건넜다.
◇미주 한인 1세 첫 변호사 탄생
미국 생활은 도착 직후부터 생존의 연속이었다. 다행히 학교 측이 등록금을 나중에 벌어서 갚을 수 있도록 배려하고 파트타임 일자리까지 알선해 준 덕분에, 그는 도착 이틀 만에 기숙사 공사 현장에서 학업과 일을 병행할 수 있었다.
심 회장은 “당시 수업 후, 시간당 1달러 15센트를 받으며 주 2회 기숙사를 보수하는 일부터 시작했다”며 “방학 때도 쉬지 않고 건축 현장으로 달려가 벽돌을 나르며 학비를 마련했다”고 회상했다. 공부와 노동이 따로일 수 없던 시간이었다.
졸업식 날에는 잊지 못할 설움도 겪었다. 밀린 학비 200달러 때문에 학교가 졸업장을 바로 내주지 않은 것이다.
심 회장은 “학사모를 쓰고 졸업식을 마친 뒤 봉투를 열어보니 졸업장 대신 콜라 상자를 잘라놓은 골판지가 들어 있어 큰 충격을 받았다”며 “나중에 학비를 내고 졸업장을 받았지만, 지금도 잊히지 않는 순간”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그 굴욕을 멈춤의 이유로 삼지 않았다. 오히려 더 높은 문을 향해 나아갔다.
학부를 마친 심 회장은 1956년 노스웨스턴대학교 로스쿨에 진학했다. 그는 재학 중에도 식당 일과 페인트칠, 유리창 닦기, 잔디 깎기 등 온갖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으며 학업에 매진했고, 1960년 마침내 로스쿨을 졸업했다.
그러나 로스쿨 졸업이 곧바로 변호사의 길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당시 일리노이주는 시민권자에 한해서만 변호사 시험 응시를 허용하고 있었다. 심 회장 역시 먼저 영주권 문제를 해결해야 했고, 그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1965년 이민법 개정 전까지 아시아계 이민 쿼터는 극히 제한적이었고, 외국 출신 법학 전공자가 영주권을 받는 일은 특히 어려웠다.
심 회장은 “과학기술 분야와 달리 법률가는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기 전까지는 쓸모를 인정받기 어려웠다”며 “영주권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마음고생이 컸다”고 돌아봤다.
우여곡절 끝에 영주권을 얻었지만, 시민권을 취득하기 전에는 여전히 변호사 시험장 문턱을 넘을 수 없었다. 꼼짝없이 시간이 흐르길 기다려야 할 처지였지만, 이때 그의 지도교수가 나섰다. 제자의 남다른 재능과 노력을 아낀 교수는 일리노이주 대법원에 직접 요청해 시민권을 얻기 전이라도 시험에 응시할 수 있게끔 특별 허가를 끌어냈다.
이러한 헌신적인 도움과 노력 덕에 심 회장은 1963년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며 자신의 사무실을 열 수 있었고, 같은 해 시민권까지 취득했다. 사선을 넘나들던 전쟁의 상흔과 눈물겨웠던 유학 생활의 고단함을 이겨내고, 마침내 미주 한인 1세 최초의 변호사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동포들의 든든한 방패가 되다
변호사 자격을 얻었다고 해서 생활이 곧바로 안정된 것은 아니었다. 당시 시카고의 한인 인구는 많지 않았고, 마땅한 광고 수단도 없어 생계를 이어가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그러나 바로 그 시기에 심 회장은 자신이 왜 이 길에 서 있어야 하는지를 깨달았다. 미국에 막 정착하기 시작한 한인들이 체류 문제와 이민국 단속 앞에서 너무도 무방비 상태였기 때문이다.
전쟁터에서 작전에 필요한 정보를 파악하고 병사들의 생명을 지켰던 그는 이번에는 법과 제도로 동포들의 삶을 지키고자 했다. 추방 위기에 몰린 한인들을 돕는 일은 그에게 단순한 법률 업무가 아니라 조국과 동포를 향한 책임의 연장이었다.
심 회장은 “당시 고국이 너무 가난해 집을 팔아 미국에 온 동포들이 많았는데, 서류 문제 하나로 강제 귀국을 당하면 본인뿐 아니라 가족 전체가 무너질 수 있었다”며 “이들이 억울하게 쫓겨나지 않도록 방패막이가 되는 것이 조국을 위하는 내 역할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현장에서는 무엇보다 순발력과 끈질긴 집요함이 요구됐다. 단속 소식이 들리면 당사자에게 발 빠르게 알려 대책을 세웠고, 필요한 서류부터 접수해 체포나 추방 절차를 늦추는 등 가능한 방법을 모두 동원했다. 이민국 직원들과 수시로 부딪히면서도 신뢰를 쌓았고, 실낱같은 가능성이라도 보이면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그가 들려준 일화 가운데에는 초창기 이민사회의 현실과 그의 기지가 함께 드러나는 대목도 있다.
한 한국인 전자기술자가 대학을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류 문제에 걸리자, 심 회장은 심사관에게 “토머스 에디슨이 대학을 나왔느냐”고 되물으며 일침을 가했다. 학위보다 실제 기술과 경험이 중요하다는 점을 날카롭게 파고든 것이다. 이 한마디는 결국 심사를 통과하는 계기가 됐다.
심 회장은 “내가 맡은 사건 가운데 쫓겨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고 자부한다”고 말했다. 그것은 단순한 승소 기록이 아니라 동포사회를 지켜야 한다는 절박한 책임감에서 비롯된 자부심이었다.
변호사로서의 활동은 이민법에만 머물지 않았다. 당시 한인사회에는 부동산과 계약, 사업, 일반 민사 문제 등 거의 모든 영역에서 도움을 줄 수 있는 변호사가 필요했다. 심 회장은 특정 분야를 정하지 않고 광범위하게 다루는 ‘일반 법률(General Practice)’을 맡아 공동체의 현실적 요구를 폭넓게 수용했다.
누군가 집을 사고 작은 가게를 시작할 때, 계약서를 작성하거나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심 회장은 곁에서 법적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초창기 이민사회에서 그는 전문직 종사자를 넘어 공동체의 삶과 기반을 지키는 법적 버팀목이었다.
◇ 시카고 한인사회의 주춧돌을 놓다
심 회장의 공동체 활동은 유학생 시절부터 시작됐다. 시카고지방 학생회장을 맡아 직접 등사기를 밀며 한인 소식지를 만들었다. 교민 신문조차 없던 시절, 동포사회와 교회, 학생회 소식을 전하는 소식지는 흩어진 한인들을 연결하는 중요한 통로였다.
이 같은 경험은 1962년 시카고한인회 창립으로 이어졌다. 심 회장은 “한국 사람도 서로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한인 조직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낯선 미국 땅에서 한인회는 단순한 친목 단체가 아니라 정보와 도움, 보호와 연대가 모이는 생존의 울타리였다.
그는 제4대·5대·13대 시카고한인회장을 맡아 공동체의 틀을 다졌다. 한인사회가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전부터 사람을 연결하고 갈등을 조율하며 조직의 기반을 세워나갔다.
한인회관 건립 과정에서도 앞장섰다. 말로만 모금을 독려하지 않고 자신이 먼저 1만 달러를 내놓으며 물꼬를 텄다.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는 동포들을 직접 찾아가 기부를 설득하고, 공동체의 보금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모금 활동 도중 큰 교통사고를 당해 생사의 고비를 겪기도 했지만 그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한인회관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한인사회의 역사와 자존심을 세우는 구심점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지에 동포들의 헌신이 더해지면서 마침내 1981년 8월 링컨 애비뉴에 시카고한인회관이 마련됐다.
심 회장은 한인 법조인들의 연대에도 힘을 쏟았다. 당시 10여 명에 불과했던 한인 변호사들을 모아 1993년 시카고한인변호사협회를 창립하고 초대 회장을 맡았다. 이어 1995년에는 한미국제변호사협회 초대 회장으로 활동하며 한인 법조인들이 정보를 나누고 후배들을 지원할 수 있는 기반을 다졌다.
그는 “여러 사람이 뭉치면 힘이 생기고 서로 도울 수 있다”고 강조했다. 남을 시기하거나 끌어내리기보다 서로 힘을 보태 함께 성장해야 공동체도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오랜 신념이었다.
이처럼 한인사회의 권익 신장과 화합을 위해 오랜 세월 헌신해 온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목련장을 수훈했다.
◇ ‘성실’의 유산
시카고 개척사의 중심에서 쉼 없이 달려온 심 회장의 곁에는 아내 고(故) 홍정현 여사가 있었다. 두 사람은 시카고 제일감리교회에서 만나 1960년 로스쿨 졸업 직후 부부의 연을 맺었으며,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다.
첫째 아들 고(故) 데이빗 심 씨는 선천성 심장병(블루 베이비 증후군)을 안고 태어나 두 살 때까지 걷지 못할 정도로 건강이 몹시 좋지 않았다. 미네소타 메이요 클리닉 등에서 수차례 생사를 넘나드는 대수술을 받아야 했다. 심 회장 부부는 스무 살을 넘기기 힘들 거라는 의사의 비관적인 전망에도 포기하지 않고 정성으로 아들을 키워냈다.
부부의 노력에 기적처럼 건강을 되찾은 아들은 아버지의 모교인 노스웨스턴 대학교를 거쳐 의사가 됐고, 심장 전문의(스텐트 시술 권위자)로 성장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40대의 젊은 나이에 먼저 세상을 떠나며 부모의 가슴에 묻혔다.
심 회장은 “세 쌍의 쌍둥이를 포함해 7명의 손주를 남기고 떠난 아들과, 꿋꿋하게 아이들을 훌륭히 키워낸 며느리에게 깊은 감사와 애틋함을 느낀다”고 전했다. 현재 딸 리사 심 씨와 사위 역시 LA에서 피부과 전문의로 활동하며 의료인의 길을 이어가고 있다.
◇ “끝까지 성실하게 버텨내라”
전쟁의 포화와 가난한 유학생 생활, 법조인의 길을 가로막은 제도의 장벽, 그리고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아픔까지. 심 회장은 90여 년의 삶에서 수많은 시련을 마주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그를 다시 일으킨 것은 포기하지 않는 마음과 성실함이었다.
그는 차세대 한인들에게 남을 시기하거나 깎아내리지 말고 서로 돕고 협력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절대 남을 시기하거나 깎아내리지 마십시오. 남이 잘되면 서로 돕고 협력해야 커뮤니티가 성장합니다. 그리고 어떤 시련이 와도 끝까지 성실하게 사십시오. 포기하지 않고 성실하게 버텨내는 것, 그것이 가장 위대한 삶의 자산입니다.”
낯선 이국의 법정에서 동포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시카고 한인사회가 오늘의 기반을 다질 수 있도록 힘써온 미주 최초의 한인 1세 변호사. 심기영 회장의 일생은 미주 한인 이민사의 한 축이자 후세가 오래 기억해야 할 개척의 기록으로 남아 있다.
<윤연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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