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카고 한인사회의 법적 버팀목이 되다
▶“추방 위기 동포들, 내 조국 위하는 마음으로 지켜냈다”
▶한인회 창립부터 한인변호사협회 결성까지…
▶한인사회의 기틀 다진 영원한 개척자
[편집자주] 본지는 시카고 한인사회의 토대를 일군 1세대 원로들의 삶과 발자취를 기록하는 연재 기획 ‘시카고 한인 개척자들’을 이어가고 있다. 열 번째 순서는 시카고 한인사회의 산증인이자 미주 최초 한인 1세 변호사인 심기영 전 시카고 한인회장이다.
6·25 전쟁에 참전해 미군과 함께 사선을 넘나들었고, 미국 이주 후에는 척박했던 초창기 이민사회에서 한인 1호 변호사로 동포들의 든든한 방패막이가 됐다. 그의 삶은 곧 시카고 한인 이민사 그 자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 차례 한인회장을 역임하며 시카고 한인사회의 기틀을 다진 심 회장의 90여 년 인생 여정을 따라가 본다.
◇전쟁이 바꾼 운명
1931년 평안북도 구성에서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심기영 회장은 할아버지가 광산업을, 아버지가 정미소를 운영한 덕에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 어린 시절 그는 할머니 뜻에 따라 1년간 서당에 다니며 천자문과 명심보감 등을 익혔다. 또래보다 한 해 늦게 소학교에 입학한 것도 그 때문이다. 심 회장은 “할머니께서 신식 교육만으로는 인격의 근본을 세우기에 부족하다며 나를 먼저 서당으로 보내셨다”며 “어릴 때는 뜻도 모른 채 천자문과 명심보감을 외웠는데, 훗날 전쟁 중 중공군 포로와 필담을 나누며 정보를 파악할 때 그 배움이 결정적인 도움이 됐다”고 돌아봤다.
일제 치하의 조선에서 살아남으려면 결국 공부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절박함은 일찍부터 그의 마음에 자리 잡았다. 소학교를 마친 심 회장은 어린 나이에 홀로 서울로 올라와 경복중학교(당시 6년제, 현 경복고등학교) 시험을 치렀고, 합격 후 명륜동 하숙집에서 학업을 이어갔다. 그는 “그때는 좋은 학교에 들어가야 차별받지 않고 앞으로 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며 “서울에 와 하숙하며 공부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어린 시절 여유로운 집안에서 자라 독일 유학까지 꿈꿨지만, 해방과 전쟁은 그 계획마저 무너뜨렸다.
해방 직후의 혼란은 곧 6·25 전쟁으로 이어졌다. 심 회장은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아침, 서울 용산경찰서 뒤편 집 근처에서 탱크가 지나가는 모습을 보고 전쟁이 났다는 걸 직감했다”며 “교복을 입은 채 아무 짐도 없이 돈만 조금 챙겨 국군 패잔병과 경찰들을 따라나섰다”고 회상했다. 그는 마포나루를 건너 철길을 따라 수원, 대전, 대구를 지나 부산까지 이어지는 험난한 피란길에 올랐다. 심 회장은 “그때는 가진 것도, 아는 사람도, 앞일에 대한 계획을 세울 수도 없었다”며 “그저 살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남쪽으로 내려갔다”고 말했다.
부산에 도착한 그는 일본으로 피신할 기회도 있었지만, 끝내 군 입대를 택했다. 심 회장은 “살아남으려면 일본으로 가는 길도 있었지만, 그때 도망가면 조국을 버리는 것 같았다”며 “그래서 군대에 들어가기로 마음먹었다”고 말했다. 그는 육군사관학교 입대를 시도했으나 당시 모집이 중단돼 뜻을 이루지 못했고, 이후 일반 훈련소에 자원입대했다.
그의 인생을 바꾼 것은 전쟁 속에서도 빛을 발한 언어 실력이었다. 서당에서 익힌 한문과 경복중에서 다진 영어 덕분에 그는 미 육군 3사단 대대본부 작전정보과에 배속돼 미군과 함께 근무하게 됐다. 포로 심문과 정보 전달, 작전 보조 등이 그의 주요 임무였다.
그는 낙동강 전투부터 원산 상륙, 장진호 전투, 철원 전투, 흥남 철수 작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전장의 최전선에 섰다. 심 회장은 “중공군 포로가 잡혀오면 한문으로 필담을 나누며 작전에 필요한 핵심 정보를 파악해 미군 측에 전달했다”고 설명했다.
전장의 최전선에서 겪은 흥남 철수 작전 당시의 기억도 생생했다. 당시 중공군의 대공세로 함흥과 흥남 일대를 제외한 함경도 전역이 적의 수중에 넘어갔고, 원산마저 점령되면서 퇴로는 완전히 끊겼다. 육로가 막힌 상황에서 병력과 피란민이 남쪽으로 내려갈 수 있는 길은 배를 타는 것뿐이었다.
그 절박한 상황 속에서 심 회장은 “1950년 흥남 철수 때는 피란민 5만 명을 먼저 배 화물칸에 태우고, 군인들은 12월의 매서운 추위 속에서 침낭 하나에 의지한 채 갑판 위에서 잠을 청했다”고 회상했다. 그렇게 부산에 도착한 그는 부산 부두에서 부모님과 어린 동생들을 다시 만났다. 심 회장은 “피란 온 부모님이 수소문해 부두로 나와 계셨다”며 “그제야 비로소 가족의 생사를 확인할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미주 한인 1세 첫 변호사 탄생
가까스로 사선을 넘어 무사히 남쪽으로 내려와 군 복무를 마쳤지만, 전쟁의 상흔 속에서도 배움에 대한 갈증은 식지 않았다. 특히 작전정보과에서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미군 장교와의 인연은 그에게 새로운 인생의 길을 열어주었다. 심 회장의 성실함을 눈여겨본 미군 장교의 도움으로 아이오와주 듀북 대학교(University of Dubuque)의 정치경제학과 입학 기회를 얻게 됐다.
당시 미국으로 가는 유학 시험 경쟁은 치열했다. 미국 대사관에서 실시한 영어 시험은 타임(Time)지 같은 영문 잡지 기사를 읽고 요약하는 방식이었는데, 그에게 너무나 친숙한 주제가 주어졌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부상당한 미군의 이야기를 다룬 기사가 문제로 주어졌다. 미군과 함께 복무하며 영문 잡지들을 틈틈이 읽었던 그에게 군사 용어와 군대 조직에 관한 내용은 너무나도 익숙했다. 심 회장은 “운이 참 좋았다”고 회상했지만, 준비된 자만이 잡을 수 있는 기회였다. 그렇게 500여 명 중 20명 안에 들며 단번에 시험을 통과한 그는 1953년 8월, 300달러를 손에 쥐고 화물선에 올라 태평양을 건넜다.
미국 생활은 도착 직후부터 생존의 연속이었다. 다행히 학교 측이 등록금을 나중에 벌어서 갚을 수 있도록 배려하고 파트타임 일자리까지 알선해 준 덕분에, 그는 도착 이틀 만에 기숙사 공사 현장에서 학업과 일을 병행할 수 있었다. 심 회장은 “당시 수업 후, 시간당 1달러 15센트를 받으며 주 2회 기숙사를 보수하는 일부터 시작했다”며 “방학 때도 쉬지 않고 건축 현장으로 달려가 벽돌을 나르며 악착같이 학비를 마련했다”고 회상했다. 공부와 노동이 따로일 수 없던 시간이었다.
그 시절의 설움은 졸업식 날 더욱 선명하게 남았다. 밀린 학비 200달러 때문에 학교 측이 졸업장을 바로 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 회장은 “학사모를 쓰고 졸업식을 마친 뒤 봉투를 열어보니 졸업장 대신 콜라 상자를 잘라놓은 골판지가 들어 있어 큰 충격을 받았다”며 “나중에 학비를 내고 졸업장을 받았지만, 지금도 잊히지 않는 순간”이라고 회상했다. 그러나 그는 그 굴욕의 순간조차 멈춤의 이유로 삼지 않았다. 오히려 더 앞으로 나아갔다.
학부를 마친 뒤 그는 1956년 시카고로 옮겨 노스웨스턴대 로스쿨에 진학했다. 로스쿨 재학 중에도 식당 일과 페인트칠, 유리창 닦이, 잔디 깎기 같은 막일을 마다하지 않으며 학업을 이어갔고, 1960년 마침내 졸업했다.
그러나 로스쿨 졸업이 곧바로 변호사의 길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당시 일리노이주에서는 원칙적으로 시민권이 있어야 변호사 시험에 응시할 수 있었다. 심 회장 역시 먼저 영주권 문제를 해결해야 했고, 그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1965년 이민법 개정 전까지 아시아계 이민 쿼터는 극히 제한적이었고, 외국 출신 법학 전공자가 영주권을 받는 일은 특히 어려웠다.
심 회장은 “과학기술 분야와 달리 법률가는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기 전까지는 쓸모를 인정받기 어려웠다”며 “영주권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마음고생이 컸다”고 돌아봤다. 그는 “영주권을 받은 뒤에도 시민권이 없어 시험에 바로 응시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지도교수께서 일리노이 대법원에 직접 길을 열어 시민권 취득 전에 변호사 시험을 볼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아냈다”고 설명했다. 그 덕분에 심 회장은 1963년 변호사 자격시험에 합격해 자격증을 받은 뒤 곧바로 개업했고, 같은 해 시민권도 취득했다. 이로써 그는 미주 최초 한인 1세 1호 변호사라는 기록을 세우게 됐다.
전쟁의 사선을 넘고, 가난한 유학생의 세월을 견디고, 법조인의 길을 열기까지 또 다른 벽을 넘어야 했던 그의 전반부 삶은 한마디로 버텨낸 역사였다. 그러나 개인의 성공만으로 끝내기엔 현실이 녹록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변호사 자격을 갖췄지만, 당시엔 한인 인구도 적고 마땅한 광고 수단도 없어 생계조차 빠듯했다. 그러나 바로 그 시기, 그는 자신이 왜 이 길에 서 있어야 하는지를 분명히 깨달았다. 미국 사회에 막 발을 디딘 한인들이 체류 문제와 이민국 단속 앞에서 너무도 무방비 상태였기 때문이다.
◇동포들의 든든한 방패가 되다
심 회장은 추방 위기에 몰린 동포들을 돕는 일을 자신의 사명처럼 받아들였다. 당시 한국은 너무 가난했고, 미국행 자체가 한 가정의 운명을 거는 일이었다. 심 회장은 “당시 고국이 너무 가난해 집을 팔아 미국에 온 동포들이 많았는데, 서류 문제 하나로 강제 귀국을 당하면 본인뿐 아니라 가족 전체가 무너질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며 “이들이 억울하게 쫓겨나지 않도록 곁에서 방패막이가 되어주는 것이 조국을 위하는 내 역할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에게 이민 사건은 단순한 업무가 아니라 조국과 동포를 향한 책임감의 연장이었다.
현장에서는 무엇보다 순발력과 끈질긴 집요함이 요구됐다. 심 회장은 이민국 직원들과 수시로 부딪히면서도 신뢰를 쌓았고, 실낱같은 가능성이라도 보이면 끝까지 물고 늘어졌다. 단속 소식이 들리면 당사자에게 발 빠르게 알려 대책을 세웠고, 서류부터 먼저 접수해 체포와 추방 절차를 늦추는 등 기지를 발휘했다. 당장 완벽한 해결이 어렵더라도 강제 추방만큼은 막아내려 했던 그의 헌신은 벼랑 끝에 선 수많은 한인에게 미국 땅에서 다시 일어설 기회를 안겨줬다.
그가 들려준 일화 가운데에는 초창기 이민사회의 현실과 그의 기지가 함께 드러나는 대목도 있다. 한 한국인 전자기술자가 대학을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류 문제에 걸리자, 심 회장은 심사관에게 “토머스 에디슨이 대학을 나왔느냐”고 일침을 가했다. 서류상의 형식보다 실제 능력과 경험이 더 중요하다는 점을 날카롭게 파고든 것이다. 이 당찬 한마디는 결국 심사를 무사히 넘기는 계기가 됐다. 심 회장은 “내가 맡은 사건 가운데 쫓겨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고 자부한다”고 말했다. 이는 동포사회를 지켜야 한다는 그의 절박한 책임감에서 비롯된 자부심이었다.
변호사로서의 활동은 이민법에만 머물지 않았다. 당시 한인사회는 규모가 작았기 때문에 부동산, 계약, 사업, 일반 민사 문제 등 거의 모든 영역에서 도움을 줄 수 있는 변호사가 필요했다. 심 회장은 “특정 분야를 정하지 않고 광범위하게 다루는 ‘일반 법률(General Practice)’을 주로 맡았다”며 공동체의 현실적 요구를 폭넓게 수용했다. 누군가 집을 사고, 작은 비즈니스를 시작하고, 서류를 작성하고,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언제든 곁에서 서류를 작성해 주고 법적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초창기 이민사회에서 그런 법률가는 한 개인의 전문 직업인을 넘어 공동체 기반을 붙드는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그의 공동체 활동은 학생 시절부터 시작됐다. 유학생이던 시절 그는 시카고지방 학생회장을 맡으며, 직접 등사기를 밀어가며 한인 소식지를 만들었다. 교민 신문이 없던 때라 동포사회 소식과 교회, 학생회 소식을 전하는 일은 공동체를 연결하는 거의 유일한 통로였다. 이런 경험은 1962년 시카고 한인회 창립 과정으로 이어졌다.
그는 “한국 사람도 서로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조직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낯선 미국 땅에서 한국인을 만나는 것 자체가 반갑고 힘이 되던 시절, 한인회는 단순한 친목 단체가 아니었다. 정보와 도움, 보호와 연대가 모이는 생존의 울타리였다.
◇ 시카고 한인사회의 주춧돌을 놓다
심 회장은 제4대, 5대, 13대 등 세 차례나 시카고 한인회장을 맡으며 공동체의 틀을 다졌다. 한인사회가 커지기 전부터 조직을 만들고, 사람을 연결하고, 문제를 조율하며 조금씩 기반을 쌓아 올렸다. 또한 심 회장은 당시 10여 명 수준이던 한인 법조인들을 모아 1993년 시카고한인변호사협회를 창립해 초대 회장을 맡았고, 1995년에는 세계한인변호사협회 초대 회장도 역임했다. 변호사끼리 정보를 나누고 힘을 모아 후배들을 위한 길을 열어주자는 취지였다.
그는 “여러 사람이 뭉치면 힘이 생기고 서로 도울 수 있다”고 강조했다. 남을 깎아내리기보다 다 함께 올라가야 공동체가 성장한다는 그의 지론은 평생 일관되게 이어졌다.
한인회관 건립 과정에서도 그의 헌신은 빛났다. 말로만 모금을 독려한 것이 아니라, 본인이 먼저 1만 달러를 쾌척하며 물꼬를 텄다. 그는 누가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는지 파악해 직접 찾아가 기부를 설득했고, 커뮤니티의 보금자리를 세우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 모금 과정에서 큰 교통사고를 당해 생사를 넘나드는 위기를 겪기도 했지만, 그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한인회관이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공동체의 역사와 자존심을 세우는 구심점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꺾이지 않는 헌신이 모인 끝에 마침내 1981년 8월, 링컨 애비뉴 소재의 한인회관 구입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이처럼 한인사회의 권익 신장과 화합에 평생을 헌신한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목련장을 수훈했다.
◇ ‘성실’의 유산
시카고 개척사의 중심에는 언제나 묵묵히 곁을 지켜준 아내 고(故) 홍정현 여사가 있었다. 시카고 제일감리교회에서 만나 1960년 로스쿨 졸업 직후 부부의 연을 맺은 두 사람은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다.
첫째 아들 고(故) 데이빗 심(David Shim) 씨는 선천성 심장병(블루 베이비 증후군)을 안고 태어나 두 살 때까지 걷지 못할 정도로 건강이 몹시 좋지 않았다. 미네소타 메이요 클리닉 등에서 수차례 생사를 넘나드는 대수술을 받아야 했다. 심 회장 부부는 스무 살을 넘기기 힘들 거라는 의사의 비관적인 전망에도 포기하지 않고 정성으로 아들을 키워냈다.
부부의 노력에 기적처럼 건강을 되찾은 아들은 아버지의 모교인 노스웨스턴 대학교를 거쳐 의사가 됐고, 심장 전문의(스텐트 시술 권위자)로 성장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40대의 젊은 나이에 먼저 세상을 떠나며 부모의 가슴에 묻혔다.
심 회장은 “세 쌍의 쌍둥이를 포함해 7명의 손주를 남기고 떠난 아들과, 꿋꿋하게 아이들을 훌륭히 키워낸 며느리에게 깊은 감사와 애틋함을 느낀다”고 전했다. 현재 딸 리사 심(Lisa Shim) 씨와 사위 역시 LA에서 피부과 전문의로 활동하며 의료인의 길을 잇고 있다.
전쟁의 포화부터 척박한 이민 생활, 그리고 자식을 먼저 가슴에 묻는 아픔까지. 그 모든 시련을 견뎌내고 단단한 가문과 커뮤니티의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비결은 다름 아닌 꺾이지 않는 마음이었다. 94년의 긴 여정을 돌아보며 심 회장은 차세대 한인들에게 진심 어린 당부를 남겼다.
“절대 남을 시기하거나 깎아내리지 마십시오. 남이 잘되면 서로 돕고 협력해야 커뮤니티가 성장합니다. 그리고 어떤 시련이 와도 끝까지 성실하게 사십시오. 포기하지 않고 성실하게 버텨내는 것, 그것이 가장 위대한 삶의 자산입니다.”
낯선 이국의 법정에서 동포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시카고 한인사회가 오늘의 기반을 다질 수 있도록 힘써온 1세대 한인 1호 변호사. 심기영 회장의 일생은 미주 한인 이민사의 한 축이자, 후세가 오래 기억해야 할 개척의 기록으로 남아 있다.
<윤연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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