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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July 17,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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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 한인 개척자들]25. 박선유 콜로니얼 한국장의사·몬트로스 운전학교 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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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유 콜로니얼 한국장의사·몬트로스 운전학교 전 대표. <사진 윤연주 기자>

북미 최초 한인 장의사, 이민자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다
월남전서 미국의 꿈 품고 1971년 시카고 이민
100달러로 일군 시카고 첫걸음, 공장 노동 거쳐 전문직 개척
한국식 장례문화와 미국 절차 사이 유가족의 안내자
몬트로제 운전학교 운영, 한인 1천 명 이상 면허 취득 도와

[편집자주] 본보는 한인 이민사의 현장을 지나온 원로들의 삶을 기록하는 ‘시카고 한인 개척자들’ 기획을 이어가고 있다. 이번 주인공은 박선유 콜로니얼 한국장의사 전 대표다. 그는 북미 최초 한인 장의사이며, 몬트로스 자동차 운전학교를 운영하며 초기 한인들의 정착을 도왔다. 운전면허가 이민자의 첫 자립이었다면, 장례는 이민자의 마지막 존엄이었다. 박 대표의 삶은 그 두 길을 함께 지킨 기록이다.

박 대표는 미국 장의사 콜로니얼 장의사의 벤슨 사장과 파트너십을 맺고 ‘벤슨 앤 팍(Benson & Park)’ 간판을 걸며 한인 장의업을 시작했다.

◇ 이민자의 첫 길과 마지막 길

낯선 미국 땅에서 운전면허증은 생계의 시작이었다. 직장에 가고,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장을 보러 가기 위해 이민자들은 먼저 운전대를 잡아야 했다. 그리고 가족을 떠나보내는 순간에는, 언어도 절차도 낯선 미국 장례 절차 앞에서 유가족들이 또 한 번 막막함을 마주해야 했다. 박선유 대표는 그 두 순간에 서 있었다. 그는 몬트로제 운전학교를 운영하며 한인들에게 운전을 가르쳤고, 북미 최초 한인 장의사로 유가족들에게 고인의 마지막 길을 안내했다.

박 대표는 “운전학교는 생활 전선에 나설 수 있도록 돕는 일이었고, 장의업은 마지막 길을 배웅하는 일이었다”며 “이민자들이 미국에서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두 순간을 함께한 셈”이라고 말했다.

100달러를 들고 시카고에 도착한 청년은 영어 사전을 붙들고 장의학을 공부했다. 타국 땅에서 외롭게 마주하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그는 한인사회가 아직 준비하지 못한 두 분야의 길을 묵묵히 열었다.

◇ 전쟁과 가난의 사선에서

박 대표는 1944년 강원도 횡성군 우천면, 치악산 아래 마을에서 6남 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의 고향은 산과 절, 들판의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는 “구룡사에도 자주 가고, 산에서 과일을 따 먹던 평화로운 시절이 아직도 기억난다”고 말했다.

아버지가 정비소를 운영했기에 전쟁 전 집안은 넉넉했다. 당시 드물던 오토바이와 말, 사진기도 있었다. 사진기로 동네 사람들의 신분증 사진을 찍어주기도 했다. 그러나 여섯 살 무렵 마주한 한국전쟁은 가정을 송두리째 흔들었다. 피난을 가지 못한 채 외할머니 댁에 머물던 시절, 동생 둘을 홍역으로 잃었다. 박 대표는 “약 한 알이면 동생들을 살릴 수 있었을 텐데, 전쟁 중이던 시골에서는 약도 의사도 부족했다”며 “나 역시 죽을 고비를 넘기며 간신히 살아남았다”고 회상했다.

전쟁 후 가세는 급격히 기울었다. 박 대표는 “그때는 국수 한 그릇 먹으려고 아침부터 줄을 섰다”며 “새벽에 공장에서 나오는 술지게미나 비지를 받아 허기를 달래던 시절이었다”고 설명했다. 가난은 그에게 일찍 현실을 가르쳤다. 그러나 그 현실은 포기가 아니라 다른 길을 찾아야 한다는 의지로 남았다.

원주고를 졸업한 뒤 1960년대 초 가족 모두 서울로 옮겨왔다. 그는 중앙대와 명지대 야간대학에 다니며 공부를 이어가려 했으나 형편은 허락하지 않았다. 이후 군에 입대했고, 백골부대를 거쳐 맹호부대로 옮겨 1966년 월남전에 참전했다.

전쟁터에서 그는 삶과 죽음이 한순간에 갈리는 장면을 목격했다. 전투 중 동굴 수색 명령을 받았지만 위험을 직감해 들어가지 않았고, 자신을 대신해 동굴로 들어간 동료가 베트공의 총에 맞아 숨지는 일을 겪었다. 눈앞에서 마주한 동료의 죽음은 그에게 깊은 잔상과 상흔으로 남았다.

월남전은 그에게 미국이라는 나라를 품게 한 계기이기도 했다. 오작교 작전 당시 미군이 헬리콥터로 보급품과 장비를 체계적으로 운영하는 모습을 보며 그는 미국의 풍요와 기술을 체감했다. 박 대표는 “월남에서 미국에 가야겠다는 결심을 했다”며 “미군의 보급과 시스템을 보면서 저 넓은 나라를 다시 보게 됐다”고 말했다.

박 대표 부부는 2024년 팔순과 결혼 50주년을 함께 기념하며 가족과 지인 80여 명을 초대해 뜻깊은 시간을 가졌다.

◇ 100달러로 일군 시카고의 첫걸음

한국에서 미국으로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박 대표는 한때 전기기술 공부를 위해 유학을 꿈꿨지만, 당시에는 달러가 귀하고 해외 출국 절차도 까다로웠다. 결국 유학의 길은 좌절됐지만, 선반기술자였던 아버지가 기술이민을 추진하면서 가족 이민의 문이 열렸다. 아버지가 영주권을 받고 먼저 시카고에 정착했고, 군 복무를 마친 박 대표와 여동생들은 자녀 초청을 통해 1971년 시카고에 도착했다.

당시 그가 손에 쥔 돈은 100달러가 전부였다. 비행기표를 구하지 못해 마지막 날까지 발을 동동 구르다가 여행사를 하던 이종사촌 형에게 외상으로 도움받아 간신히 비행기에 올랐던 터였다. 박 대표는 “미국에 온 뒤 바로 주물공장에 다니며 그 비행기표 값부터 밤낮으로 일하며 갚았다”고 말했다.

당시 시카고 한인은 5천 명 남짓이었다. 켄모어와 셰리든 일대에 작은 식품점과 식당이 겨우 생겨나던 시절, 한국 사람을 만나면 서로 몰라도 반가워 길을 멈추던 정겨운 정서가 있었다.

영어는 쉽지 않았다. 한국에서부터 독학으로 영어공부를 했지만, 막상 현장에서는 말보다 눈치와 성실함이 먼저였다. 박 대표는 “처음에는 영어가 힘들었지만 한국인들은 상황 판단이 빠르다”며 “눈치와 성실함으로 버틴 것”이라고 말했다.

1974년, 휴가차 한국을 찾은 박 대표는 평생의 동반자가 될 염현숙 여사를 만났다. 당시 교사로 재직 중이던 염 여사는 이화여대 교수로 있던 이모의 주선으로 박 대표와 마주하게 됐다. 딸을 멀리 미국으로 보내고 싶지 않았던 장인의 완강한 반대도 있었지만, 박 대표는 진심 어린 설득 끝에 마음을 돌려놓았다. 두 사람은 그해 6월 8일, 이화여대 다락방에서 가족과 친지들을 모시고 기독교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을 마친 후 박 대표는 서류 절차를 위해 먼저 미국으로 돌아왔고, 염 여사도 이후 시카고에 합류하면서 두 사람의 이민 생활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박 대표는 “아내는 낯선 미국 땅에서 가정을 지키고 자녀들을 훌륭히 키웠다”며 “제가 새로운 일에 자신 있게 도전할 수 있었던 것도 뒤에서 묵묵히 도와준 아내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평생 함께 걸어온 아내에게 늘 고마운 마음”이라고 전했다.

1974년 박선유 대표와 염현숙 여사가 가족과 친지들의 축복 속에 기독교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 북미 최초 한인 장의사의 길

1979년, 박 대표는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개척하겠다는 일념으로 장의대학(Mortuary Science)에 입학했다. 당시 한인사회에서 장의사는 매우 생소한 직업이었다. 뉴욕이나 LA 같은 대도시에서도 한인 장의사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박 대표는 “남이 안 하는 일을 해야 장래가 있다고 생각했다”며 “시신도 본 적 없었지만 도전해 보기로 했다”고 말했다.

장의업을 생각하게 된 데에는 한국 현충원에서 근무하던 당숙의 영향도 있었다. 미국식 장례 제도의 위생과 절차, 시간 운영을 보고 한국에 현대식 장례 시스템을 들여오자는 구상이었다. 그러나 계획을 뒷받침하던 당숙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며 한국에서의 사업 구상은 무산됐다. 박 대표는 방향을 미국으로 돌려 LA에서 자리 잡을 생각도 했지만, 일본계와 중국계 장의사들로부터 “한국 사람이 몇 명이나 된다고 장의업을 하느냐”는 냉담한 반응을 얻었다. 결국 그는 시카고로 돌아와 스스로 길을 내기로 결심했다.

장의학 공부는 혹독했다. 해부학, 화학, 약품 처리인 엠발밍(Embalming), 장례법규, 심리학과 사회학을 모두 영어로 배워야 했다. 처음 검시소에서 시신을 마주했을 때는 밥을 먹지 못할 정도로 충격이 컸다. 같은 반 학생 중에는 그만두는 이도 있었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수업이 끝나면 노스이스턴 일리노이대 도서관으로 가 밤 10시까지 사전을 찾아가며 공부했다. 박 대표는 “모르는 단어를 사전으로 하나하나 찾아가며 공부해야 했다”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수업과 시험을 따라갈 수 없었다”고 회상했다. 미국인 동기들은 유일한 동양인이었던 그를 위해 필기한 노트를 복사해 주며 학업을 도왔다.

미국 콜로니얼 장의사 사장의 결혼식에 참석한 박선유 대표 부부.

노력 끝에 그는 1982년 일리노이주 장의사 라이선스를 취득하며 ‘북미 최초 한인 장의사 1호’가 되었다. 이후 미국 장의사 콜로니얼 장의사의 벤슨 사장과 파트너십을 맺고 ‘벤슨 앤 팍(Benson & Park)’ 간판을 걸며 한인사회에서 본격적인 장의업을 시작했다. 나중에는 후배 장업인들에게 자문을 주며 한인 장의업계의 기틀을 닦기도 했다.

박 대표가 일을 시작하기 전 한인들은 고인이 생기면 미국 장의사로 향했다. 그러나 언어와 절차, 문화 차이 때문에 유가족이 겪는 어려움은 컸다.

미국식 장례는 조문객이 정해진 시간에 오가고 짧은 기도 후 마무리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한인 장례는 입관예배, 발인예배, 하관예배 등 예배 중심으로 진행됐고 조문객도 한꺼번에 모였다. 이 때문에 작은 장의사 공간과 부족한 주차장은 늘 문제였다. 박 대표는 주차장이 넓고 예배 공간을 갖춘 미국 대형 루터교회를 장례식장으로 빌리는 방법을 찾아 공간의 한계를 극복했다. 유가족과 조문객들에게도 교회는 익숙하고 편안한 장소였다.

박 대표의 역할은 단순히 절차 대행에 그치지 않았다. 미국 직원들이 시신 처리와 입관을 맡았지만, 그는 유가족이 오기 전 빈소를 직접 살폈다. 미국 직원들이 해놓은 화장이 너무 진하면 한국인 정서에 맞게 투명하고 편안하게 고쳤고, 한복 수의의 옷고름을 직접 매만지고 베개 높이를 낮추어 고인의 모습을 단정하게 정돈했다. 박 대표는 “말이 통하고 한국인의 정서를 아는 장의사가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슬픔에 가득 찬 유가족들에게는 큰 안식이 되었다”고 돌아봤다.

형편이 어려운 이웃이나 자살자, 가난한 유학생들의 장례를 수습해 주기도 했던 그는 특히 한 살, 두 살짜리 어린 한인 영아들의 장례는 비용을 받지 않고 공짜로 치러주었다. 박 대표는 “장례는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기 전에 사람의 마지막을 배웅하는 신성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당시 시카고 한인언론에 게재된 콜로니얼 벤슨 앤 팍(Benson & Park) 장의사 광고. 전화와 무선호출기(Beeper)로 24시간 연락을 받았다.

◇ 생존의 도구, 운전면허

장의사 라이선스를 취득했다고 곧바로 일이 밀려든 것은 아니었다. 1970~80년대 시카고 한인사회는 젊은 이민자와 유학생이 주축이었고, 당시 한인 장례 의뢰는 드물었다. 이후 초기 이민자들이 생활 기반을 잡고 한국의 부모 세대를 초청하면서 1990년대 이후 한인 시니어 인구가 늘었고, 그때부터 한인 장례 수요도 서서히 생겨났다.

그 공백의 시기에 박 대표가 함께 붙든 일이 운전교육이었다. 그는 1970년대 후반 운전교육을 시작했고, 1981년 무렵 ‘몬트로스 자동차 운전학교’를 설립해 운영했다. 박 대표는 운전강사 라이선스와 학교 라이선스를 갖추고 한인들을 가르쳤다.

당시 이민자들에게 운전면허는 생존 도구였다. 면허가 있어야 직장에 가고, 장을 보고, 가족을 돌볼 수 있었다. 영어가 서툰 초창기 이민자, 미국 교통법을 모르는 초보자, 한글조차 익숙지 않은 노인들이 그를 찾아왔다. 운전교육은 운전면허가 절실했던 초기 한인 이민자들의 정착을 돕는 일이었다.

가족은 박 대표가 오랜 이민 생활 속에서도 고비마다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한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박 대표는 교통표지판과 필기시험 문제를 철저히 분석해 ‘박선유식 족집게 강의법’을 만들었다. 그는 “영어가 서툰 동포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문장 속 핵심 단어와 규칙을 찾아 이해하도록 돕는 방식을 연구했다”고 설명했다. 복잡한 문장을 무조건 외우게 하기보다 실제 운전에 필요한 핵심을 잡아주는 강의였다.

박 대표는 “몬트로스 운전학교를 통해 면허를 딴 사람이 1천 명은 넘을 것”이라며 “운전면허는 초창기 이민자들에게 미국 생활 전선에 설 수 있게 발을 달아준 첫 자격이었다”고 말했다.

이후 박 대표는 본업인 장의업 일이 늘어나 두 가지 일을 병행하기 어려워지자, 1993년 운전학교를 자진 폐교했다. 그는 학교 문을 닫을 때까지 수많은 한인의 자립을 묵묵히 도왔다.

박 대표 부부는 은퇴 후 지금까지 17차례 크루즈 여행을 다니며, 여유와 감사의 시간을 함께 누리고 있다.

◇ 장례식장에서 배운 삶의 질서

수십 년간 수많은 죽음을 배웅하며 그가 얻은 인생의 기준은 명확했다. 평소 우애가 좋고 화목했던 집안은 장례식장에서도 서로를 보듬으며 평안하게 장례를 치렀다. 반면 화합이 무너진 집안은 관 앞에서도 장례 방식이나 여러 문제로 다투는 것을 보았다.

박 대표는 “집안이 우애가 좋으면 장례식장에서도 편안하다”며 “가족이 화목하게 사는 것이야말로 잘 사는 인생의 중요한 기준”이라고 말했다.

정작 자신은 큰 장례를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부모님 장례도 가족끼리 조용히 치르고 부조금을 받지 않았던 그는, 자녀들에게 짐을 지우지 않기 위해 자신과 아내의 장례 절차와 비용(Pre-arranged Funeral)을 이미 완납해 두었다. 화장 후 묻힐 부부 자리까지 미리 마련해 둔 상태다. 박 대표는 “미리 준비해 놓으면 물가가 올라도 조건이 유지되고 자녀들이 당황하지 않으니 마음이 편하다”고 조언했다.

박선유 대표 부부는 자녀와 손주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건강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인생의 가장 큰 축복으로 여기고 있다. 아들 박영 씨는 윌링의 인디언 트레일스 공공도서관 매니저로, 딸 박소연 씨는 캘리포니아 초등교사로 일하고 있으며, 부부는 슬하에 네 명의 손주를 두었다.

2001년경 직장암 판정을 받고 한인사회에 사망 루머가 돌 만큼 힘든 암 투병을 겪기도 했다. 방사선과 항암 치료, 수술을 거치는 고된 시간이었지만 그는 굳건히 회복해 냈다. 만 명 중 한 명꼴인 철분 과다증 체질 탓에 3개월에 한 번씩 피를 뽑는 치료를 받고 있지만, 피를 빼고 나면 오히려 새 피가 돋아 기운이 넘쳐난다며 웃어 보였다.

그는 “현재 82세인데 노인성 질환 약을 먹지 않을 만큼 정정하다”며 “밤 11시에 자고 새벽 4시에 일어나 골프밀 몰을 매일 한 시간씩 걷는 규칙적인 생활을 20년째 이어온 덕분”이라고 말했다.

사교댄스와 라인댄스를 즐겨온 박 대표 부부. 두 사람은 지금도 토요일이면 시카고 한인문화원을 찾아 함께 춤을 춘다.

◇ “자신만의 가치관과 중심을 가져라”

염현숙 여사는 박 대표의 긴 이민생활을 함께한 평생의 동반자였다. 박 대표가 암 투병으로 자리를 비웠을 때는 장례식장에 나와 차분하고 다정한 안내로 목사들과 유가족들의 신뢰를 얻으며 비즈니스를 지켜냈다. 박 대표가 새로운 길에 도전할 수 있었던 뒤에는 염 여사의 묵묵한 내조가 있었다.

부부의 헌신 속에 자란 자녀들도 각자의 자리에서 뿌리를 내렸다. 아들 프레드 박 씨는 노스웨스턴대 저널리즘 학과를 3년 만에 조기 졸업한 뒤 UIUC 대학원에서 도서관학을 전공했으며, 현재 윌링의 인디언 트레일스 공공도서관에서 매니저로 근무하고 있다. 딸 크리스티나 박 씨는 교육학을 전공한 뒤 캘리포니아에서 25년째 초등교사로 일하고 있다. 박 대표는 자녀들이 각자의 삶을 당당히 살아가는 모습을 가장 큰 보람으로 꼽았다.

2010년경 후배 장의업자들에게 비즈니스를 물려주고 은퇴한 뒤 박 대표 부부의 삶은 한결 여유로워졌다. 박 대표는 “지금까지 17차례가량 크루즈 여행을 다녔고, 배 안에서 열린 부부 댄스 행사에서 1등을 차지한 적도 있다”며 미소를 지었다.

춤은 그의 오랜 취미다. 사교댄스와 라인댄스를 즐겨온 그는 한인사회에 댄스에 대한 편견이 있던 시절부터 라인댄스를 배웠고, 지금도 토요일이면 시카고 한인문화원을 찾아 춤을 춘다. 걷기와 춤은 노년의 큰 활력이다. 최근에는 팔순과 결혼 50주년을 함께 기념하며 가족과 지인 80여 명을 초대해 뜻깊은 시간을 가졌다.

박 대표 부부는 2024년 팔순과 결혼 50주년을 함께 기념하며 가족과 지인 80여 명을 초대해 뜻깊은 시간을 가졌다. 올해도 오는 7월 25일 윈덤호텔에서 생일 파티를 열고 지인들과 함께 축하의 시간을 가질 예정이다.

차세대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묻자 박 대표는 길게 말하지 않았다. 박 대표는 “요즘 젊은이들은 자기 자신을 잘 알고, 자기 갈 길도 이미 잘 알고 있다”며 “우리가 특별히 이래라저래라 할 건 많지 않다고 본다”고 말했다.

많은 이들의 마지막 길을 배웅해온 그가 끝에 남긴 말은 결국 삶을 향해 있었다. 박 대표는 “세상만사 산전수전을 다 겪어도 결국 빈손으로 떠나는 것은 모두가 같다”며 “인생을 살아가며 자기만의 가치관과 중심을 가지고 그 길을 계속 걸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고생도 하겠지만, 즐기면서 살고, 신앙도 가지며 주어진 운명 안에서 자기 삶을 잘 살아가면 된다”고 덧붙였다.

낯선 땅에서 이민자들이 홀로 설 수 있도록 운전대를 잡게 했고, 생의 끝자락에서는 마지막 배웅의 자리를 지켰다. 첫 자립의 순간부터 마지막 이별의 순간까지, 박선유 대표가 묵묵히 지켜온 길은 시카고 한인 이민사에 깊이 새겨진 개척의 기록으로 남았다.

<윤연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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