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록이 울창한 6월, 계절이 주는 이름 ‘하지’(6월 22일)가 있다.
이날은 일 년 중 낮이 가장 길고 밤이 가장 짧은 날, 정오의 태양 높이가 가장
높고 일사량이 가장 많은 날이며 황소가 짝짓는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는
날이기도 하다.
1962년 6월 22일 금요일 오후, 바로 이 ‘하지’ 날 나는 언니 집을 방문했다.
언니네는 Y대 입구 근처 하숙집이 즐비한 동네 ‘ㄷ’자 모양의 한옥,
왼쪽 옆으로 이어진 방 두 개를 얻어 3개월 전에 백일 지난 아들내미 하나를
데리고 형부 직장 따라 이곳에 이사를 왔다.
‘언니’ 부르며 집 안으로 들어섰을 땐 언니는 조카 녀석 잠을 재우고 있었다.
반가운 얼굴로 나를 쳐다보며 손으로 입을 가리면서 조용하라는 신호를
보낸다.
아기가 잠이 들었다.
언니는 미장원에 약속이 되어 있다며 한 시간은 충분히 잘 거니까 아이를
보고만 있으라고 한다.
‘알았어 언니’
언니가 떠났다.
한 시간은 충분히 잔다던 녀석이 10분쯤 지났을까 눈을 번쩍 뜬다.
그리고 나를 쳐다본다. 소리 내어 울기 시작한다.
‘큰일 났다’ ‘낭패다’
서투른 솜씨로 어르고 달래도 소용없다. 쩔쩔매는 꼴이 한심했나 보다.
바로 그때 건넌방에서 공부하던 큰 학생이 와서 아이를 번쩍 들고 나간다.
‘와, 살았다’ ‘고마우신 분’
아이는 아버지인 양 울음을 뚝 그친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전에도 종종 언니를 도와서 아이를 돌봐주곤
했단다.
언니가 미장원에서 돌아왔다.
서둘러 저녁밥을 지어서 맛있게 먹었다. 이제는 집으로 가야 할 시간…
그런데 언니가 뜻밖에 날씨도 좋고 달도 밝으니 Y대 캠퍼스로 산보를 가잔다.
그렇잖아도 백향목이 쭉 늘어선 길을 한번 걷고 싶었던 터라 좀 늦기는 했지만
의견에 동의했다. 건넌방 큰 학생이 안내를 하기로 하고 우리는 집을 나섰다.
얼마쯤 갔을까 언니는 형부 저녁 준비를 깜빡 잊고 왔다며 금방 올 테니 조금
기다리라고 한다. 그런데 오지 않았다.
녹음이 풍성한 초여름의 달밤… 보름달이었나 보다.
전등 없는 백향목로를 걷고 있는 두 사람을 뒤에서 환하게 비춰 주고 있었다.
앞서 가는 그림자를 천천히 밟으며 조금은 멀어 보이는 본관 건물을 향하여
걷다 보니 어느새 뒷동산 오솔길을 걷고 있었다.
풀벌레들의 속삭임을 들으면서,
때로는 오르막길을, 때로는 내리막길을…
2026년 6월 22일 시간은 많이도 지났다.
64년 전, 초여름 밤의 만남은 아직도 우리 두 사람 가슴속에 살아 숨 쉬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도 걷는다.
풀벌레들의 속삭임을 들으면서.
때로는 오르막길, 때로는 내리막길을…
‘걷자’… ‘오늘도 함께’… ‘주어진 날까지’…
<김숙영 예울림합창단 전 단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