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 몇 개 내 놓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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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태환 목사(시카고기쁨의교회 담임)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교회에서 친구들과 밤늦게까지 모임을 갖던 어느 날, 잠시 바람을 쐬러 밖으로 나왔는데 어디선가 여자들의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울릉도 동남쪽 뱃길 따라 이백 리….” 술 취한 두 명의 여자들이 교회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얼마 전 ‘술집 여자들이 교회 근처에 산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났다.

그들 한 사람이 가던 길을 멈추고 예배당 십자가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내게 다가와 뜻밖의 말을 건넸다. “저기… 기도하고 가도 되나요?” 잘못 들었나 싶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당황스러웠지만 반가운 마음에 그들을 지하 기도실로 인도해 드렸다. 마룻바닥에 방석이 깔리고 캄캄한 중에 십자가 불빛만 보이는 추억의 기도실이었다.

두 사람이 기도실로 들어간 후, 밖에서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정말 기도하고 있을까? 혹시 방석에 다 토해 놓은 건 아닐까? 뭘 훔쳐가는 건 아니겠지? 기도실에 술 냄새 풍겨도 괜찮은 건가? 그러다가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간 기도실, 거기서 평생 잊지 못할 가장 아름다운 장면을 보았다. 두 여성이 십자가 불빛 아래 무릎 꿇고 어깨를 들썩이도록 흐느끼며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다.

기도가 끝난 후 ‘우리 교회 나오시라’고 전도를 시도했을 때, 그들이 한 말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 오면 교인들이 싫어해요.” 그 때 자신 있게 ‘아니에요’라고 말하지 못했다. 실제로 교회 어른들이 그들의 방문을 좋아할 것 같지 않았다. 그 후 얼마 뒤 목사가 되기로 헌신할 때, 그 기억을 떠올리며 한 결심이 있었다. 누군가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또 나타난다면, 그 때는 자신 있게 ‘아니에요. 우리 교회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어요’라고 말할 수 있는 교회 목회를 하겠다고.

세상은 늘 우리에게 자격을 묻는다. 우리 그룹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이러저러한 자격 요건을 갖추어야 한다고 말한다. 자격 없는 자에게 결코 자리를 주지 않는다. 오직 은혜만이 자격 없는 자에게 자리를 내어준다. 교회는 값없이 받은 구원의 은혜를 기뻐할 뿐 아니라, 그것을 삶으로 살아내는 공동체이다. 자격을 요구하는 세상의 기준에 못 미쳐 갈 곳 없는 이들에게 값없이 자리를 내어주는 것은 우리가 받은 은혜에 대한 당연한 반응이자 신앙 고백이다.

이민자보호교회 운동은 바로 이러한 믿음에 기초해 있다. 지난 5월 출범한 시카고 이민자보호교회 네트워크는 올 해 서류미비자들을 비롯해서 어려움에 처한 이민자들을 돕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해 왔다. 그 중에서도 특히 서류 미비 한부모(싱글맘) 가정을 위한 렌트비 지원 프로젝트는, 이 사회가 요구하는 자격과 기준을 맞추지 못해 이중 삼중의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위해 삶의 자리를 마련해주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사역이었다.

이정록 시인은 <의자>라는 시에서 어머니의 말씀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데/ 의자 몇 개 내 놓는 거여.” 산다는 건 누군가에게 의자 몇 개 내 놓는 거라는 말씀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세상 어디에도 맘 편하게 쉴 자리 하나 없는 이들에게 의자 몇 개 내 놓는 일, 아니 그들을 위한 의자가 되어 주는 일. 교회를 향한 마땅한 부르심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