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한국을 사랑한 선교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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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문 목사(시카고 나눔교회 담임)

메리 F. 스크랜턴(Mary F. Scranton)

메리 F. 스크랜턴 (Mary F. Scranton)는 미국 매사추세츠 벨처타운에서 1832년 12월 9일 출생하여, 1855년 윌리암 T. 스크랜톤(William T. Scranton)과 결혼하고 윌리암 외아들을 낳았다. 그녀는 평소 해외선교에 대한 꿈을 갖고 있었는데 남편 사별후 52세의 늦은 나이에 미국 감리회를 통하여 한국 여성 첫 선교사로 파송받게 되었다.

1884년 한국에서 의료와 교육 여선교사를 받아들이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고 의사인 아들 윌리암 B. 스크랜톤을 설득하여 미감리회 해외 선교부에 함께 파송을 받아, 1885년에 아들 내외와 아펜젤러 가족과 함께 한국에 도착했다. 그녀의 마음에는 한국의 유교적인 질서 속에 얽매여 있는 여성들이 선진문명을 받아들여 개화를 시키고 기독교적인 인생관을 가진 학교를 설립 하기고 결심하였다.

당시 우리 동족들은 외국인들에 대한 경계심과 오해로, 서양 사람들이 아이를 데려다가 노예로 팔아 먹는다는 소문과 어린아이의 눈과간을 빼서 약을 만든다는 괴담이 퍼져 서양 사람들이 사는곳에 습격을 당하기도 했다. 이화 학당에서 일하는 한국인 중에는 피살을 당하기도 했다. 어떤 가난한 여인은 이웃들이 서양 도깨비에게 자식을 팔아먹는 몰인정 엄마라고 공격을 받게되자 메리 스크랜턴 선교사를 찾아와서 맡겼던 아이를 도로 데리고 가는경우도 있다.

메리 스크렌턴는 문화적 충돌속에서도 조선인을 이해하며 인내를 갖고 비천한 계층, 돌보며 한국근대 여성 교육의 개척자로서 열정은 멈추지 않했다. 그녀 선교 편지에 이런 내용이 있다

“여자는 가르칠 필요 없다”는 조선의 유교사상 때문에 1년이 다 되도록 학생 0명,               “내가 하는 일이 이 땅의 사람들 마음에 들든지 안 들든지, 나는 이 땅의 사람들을 사랑하기로   마음 먹었다”

1년을 기다리던중 학생 한명이 찾아 왔는데 그 학생은 고관의 소실인 김부인이라는 기혼 여성이었다. 그 부인은 영어를 배워 왕비의 통역관이 되리라는 소망으로 공부를 했으며 한 달 뒤에 조별단이라는 극심하게 가난한 소녀가 들어오게 되었다. 그해 말에는 7명이 되었다. 그리고 1888년1월에는 이화학당 교내에 한국 최초로 여성들만으로 이루워진 주일학교와 주일예배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처럼 여성 교인이 증가함에 따라서 1889년2월12일에 최초로 여성교회가 조직되었다.

1890년대 들어 개화파 지도자인 박영효의 딸이 학당에 들어와서 스크랜튼과 기거하며 빈민출신과 함께 공부를 했다. 스크랜튼 부인은 학생들의 건강을 아들이 경영하는 시병원에서 보살피게 하다가 여의사인 메타하워를 초청하여 한국 최초의 부인병원인 보구여관을 운영 하였다. 이 보구여관은 민비가 하사한 이름이며 나중에 동대문에 있는 이화여대 병원의 전신이 되었다.

그후로 전도활동과 교회 개척에 전념하여 천민 계층이 많이 살고있는 동대문, 남대문 지역에   교회가 세워졌고 세워진 상동교회 중심으로 여자 중학교를 설립했다. 메리 스크랜턴의 선교 방침은 “여성에게 여성이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었다. 전도 부인들을 대상으로 성경교육이 시작하여 부인 성경학원이 되었고 후에 1920년에 감리교 협성 여자신학교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외 순회 전도로 교회와 학교들이 수원지역에 세우게 되는데 대표적 학교가 수원에 현재 매향 여자 중,고등학교이다. 오직 여성교육과 복음전파를 위해 사역을 하다가 향년 77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천대받는 여성을 깨우는 조선의 어머니이었다. 그녀의 장례식 날, 남녀노소 가릴것 없이 수천명이 모여 마지막 장례 행렬에 참여할 정도로 조선인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참고도서 : 한국을 사랑한 메리 스크랜튼, 양화진의 선교사의 삶

시카고 나눔교회 김영문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