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화평하게 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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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한마음재림교회 서상규 목사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사람이 살아가면서 누려야 할 화평이 있다면 다음의 두 가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첫째로 마음이 평화로와야 하고 둘째로 함께 사는 사람과의 관계가 평화로와야 합니다. 이 두가지의 화평이 지금 주께서 말씀하신 ‘화평’이라는 말 속에 다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의 화평을 이루기 위한 더욱 근본적인 화평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화평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케 하는 자가 되기 위하여 우선적으로 회복해야 할 것은 하나님과의 화평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관계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한 관계입니까?

불교 신문에 게재된 한 칼럼을 읽다가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불교는 모든 생명이 윤회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불교에서 윤회에 대하여 말할 때 유머러스한 예로서 부모 자식간은 전생에 원수일 확률이 높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말이 나왔을까요? 하는 짓마다 부모 마음에 들지 않는 것입니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 하나가 어쩜 그렇게 부모의 속을 뒤집어 놓는지. 그럴 때 부모님들께서 하시는 말씀이 있지요. “아휴! 이 웬수야” 이 한 마디 속에서 자식을 사랑하면서도 속이 타 들어가는 부모님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롬 8:7) 육신의 생각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였다는 것입니다. 하는 생각 마다, 하는 행동 마다,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하나도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에 맞지 않았습니다. 그저 죄악 된 생각, 죄악 된 행동, 죄악 된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니 죄인이었던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런 원수를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원수된 관계를 화평의 관계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엡 2:16-18) 이렇듯 예수님의 대속적 사역이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회복하셨기 때문에 구약성경 이사야서는 메시야를 평강의 왕으로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6) 오늘 우리가 얻은 화평의 축복은 당신의 목숨으로 우리에게 주신 귀한 평화입니다. 그래서 인류 역사상 가장 완벽한 화평의 실현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이렇게 화평하게 하는 사명을 이루신 예수님께서는 그 화평의 사명을 우리에게 이어 주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요 14:27) 따라서 그 평화의 왕의 은혜로 구원 얻은 성도들은 인간들 사이에서 예수께서 실현하셨던 평화의 사역을 지속적으로 수행해 가야만 합니다. 그리고 화평케하는 자의 사명을 따라 살아가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축복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왜 화평하게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까? 왜냐하면 화평케 하시는 당신의 모습을 닮았기 때문이다. 침례교회 목사이자 신학자인 존 앨버트 브로더스(John Albert Broadus)는 “세상에서 화평케 하는 일보다 더 하나님을 닮은 일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라 화평케 하는 자로 살아갈 때 그 모습이 하늘과 연결되어 있다는 증거가 될 것이고 생애의 향기와 품성의 아름다움은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세상에 드러낼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9, 14)